2008년 07월 11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가
받다
사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물론 많은 사람은 자신이 이승을 떠난 후 어떤 현실을 맞이하게 될지 궁금해하고, 경이로워하며, 심지어 기대하기도 한다. 사실 여기에 역점을 두는 것이 세상 종교들의 기반이다. 어떻게 보면 당신 몸의 기능이 멈추는 순간, 당신의 모든 지성과 역량을 갖춘 이 삶이 중단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믿기 어렵고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왠지 모르게 이것은 모순처럼 보인다. 이것은 단순히 두려움이나 불안 때문만은 아니다. 이것은 모순이다. 당신은 의식의 불꽃을 지니고 태어났으며, 의식의 불꽃을 지닌 채 이승을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사후 문제를 둘러싼 신비와 수많은 철학, 온갖 추측은 전 세계 사람들을 계속해서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사실 사후 문제는 우주의 삶이 있는 큰 공동체 전역에 걸쳐 큰 관심사이며, 인간만 골몰하는 문제가 아니다.
중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나 이승에서의 자기 삶이 마지막 단계에 가까워진 많은 사람은 이승을 떠난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깊이 생각해 볼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실제로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관심사가 된다. 당신이 이곳에서 자기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는 전반적으로 자기 삶을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대체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자기 몸과 동일시한다면, 당신은 자기 몸만큼이나 나약하고 취약하다고 느낄 것이다. 당신은 몸을 해치거나 파괴할 수 있는 수천 가지를 두려워할 것이다. 그리고 몸을 보호하고, 돌보고, 즐거움과 욕구를 충족하고, 고통과 어려움을 완화하는 데 전념할 것이다.
따라서 당신이 삶을 사는 방식은 당신 내면의 어떤 것과 동일시하느냐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분명히 당신 몸보다 더 큰 부분이 있으며, 그것은 당신 마음이며, 당신이 생각하는 마음이다. 이 마음은 당신의 기억과 감정과 정서, 당신과 연관된 것들 등 당신이 태어난 순간부터 이 삶에서 당신에게 깊은 영향을 준 모든 것도 담고 있다. 물론 많은 사람이―사실 어느 정도는 모든 사람이―이 생각하는 마음이나 자기 생각과 동일시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이름표에 적힌 존재라고 실제로 믿는다. 그들은 자기 성격의 모든 특성과 독특한 특징, 약점, 강점, 해로운 성향 등을 포함하여 자기 성격이 진정한 본연의 자신이고, 자기 생각이 본연의 자신을 진정으로 나타낸다고 실제로 생각한다. 따라서 자신을 마음과 동일시할 때, 당신은 자기 몸의 취약함을 넘어 조금 더 전능하다고 느낄 것이다. 당신은 “사람들이 내 몸은 해칠 수 있지만, 내 마음은 해칠 수 없다. 나는 여전히 자유롭게 내 생각을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매우 일반적인 가정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정신 환경에서 살고 있고, 당신 생각의 99%는 당신 환경에서 받아들였거나, 가족이나 다른 중요한 인물들에게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회 관습을 따르고,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가족에게 필요한 것이나 요구되는 것을 충족하고 있다. 실제로 당신은 생각하는 마음에서 거의 자유가 없다. 왜냐하면 이 마음은 당신 안에 깊이 조건화되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이 점에서는 자유롭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생각과 동일시하며, 자신의 고착된 신념과는 더욱더 동일시한다. 사람들은 기꺼이 자신의 신념을 위해 죽고, 자신의 신념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전쟁을 일으키고, 대량 학살을 저지르고, 세상을 완전히 폐허로 만들고, 다른 사람들을 헐뜯는다. 왜냐하면 자신의 신념에 고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신념과 동일시하며, 자신의 신념이 곧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누구나 어느 정도는 이런 망상으로 고통받는다.
자신의 정치적 견해나 신념, 혹은 종교적 견해나 신념이 없다면, 당신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 혹은 자신의 사회적 기준도 없고, 기대도, 계획도, 관리도, 일정도, 습관도, 취미도 없다면, 당신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 이 모든 것이 없다면, 당신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 존재하지 않게 되는가? 사라지는가?
많은 사람이 자신의 생각과 관념, 감정과 정서, 기억과 기대에 이렇게 지속적으로 투자하지 않으면, 자신이 어떤 식으로든 사라지거나, 미쳐버리거나, 통제력을 잃거나, 이런 비슷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면서, 심지어 잠깐 고요를 경험하는 것조차 매우 두려워한다. 그리고 이성을 초월하는 혼이 어쨌든 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혼은 신비롭다. 마음이나 몸의 어떤 측면도 혼으로 여기기는 어렵다.
어떤 사람들은 어떤 물질적 형태가 없는 자신을 상상할 수 없으므로 자신이 일종의 투명한 몸인 에테르체를 가졌다고 믿는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혼이 많은 생각을 담고 있으며, 어쨌든 단지 이성과 사회적 조건화의 또 다른 형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행히도 자신과 다른 사람들 안에 마음과 몸을 넘어서는 어떤 것이 있음을 인지하는 사람이 많다. 이것은 희망적인 신호이다.
만약 당신이 병원에 입원하여 움직일 수 없다면, 어찌할 것인가? 당신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으므로, 마음과 마주해야 할 것이다. 혹은 당신이 휠체어에 앉아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없다면, 하루 종일 돌아다닐 수 없으므로, 마음에 담긴 내용물과 훨씬 더 많이 마주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때 만약 삶이 당신을 실망하게 하거나, 사랑이나 특권을 잃거나, 다른 사람들에게서 존중과 존경을 받지 못하면, 이것은 당신 마음에 엄청난 충격일 수 있다. 자신에 대한 관념이 심각하게 도전을 받거나 의심에 빠지면, 자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아마도 당신은 어떤 예지의 순간이나, 아니면 심각한 실망의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실제로 자신에 대한 관념을 계속 강화할 수 없는 순간, 자신의 믿음이나 취미, 활동, 소일거리에 계속 빠져 있을 수 없는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삶이 당신의 계획을 망쳤고, 당신의 꿈과 자기 집착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이제 당신은 내면에 있는 다른 것을 마주해야 한다. 어쩌면 자신이 누구인지 실제로는 모를지도 모른다. 어쩌면 당신 관념이 그다지 확실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신, 삶, 자연, 문화, 문명에 대한 당신의 믿음이 이전에 당신이 생각한 것만큼 진실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제 당신은 의심하고 있다. 이제 당신은 그다지 확신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기 생각에 너무 집착하고 그 생각과 너무 동일시하므로, 자신을 의심하는 순간을 맞닥뜨리면, 매우 놀란다. 마치 삶 전체가 의문에 빠지고, 존재 전체가 의문에 빠지는 것과 같다.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 세상에 왔는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있는지 안다고 생각했다. 당신은 삶을 이해한다고 생각했고, 삶에 양식과 전략과 청사진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다지 확신하지 못한다.
이런 경험을 하면, 사람들은 비록 이 경험을 피하고, 이 경험에서 달아나 가능한 한 빨리 벗어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겠지만, 이것은 언제나 희망적인 신호이다. 바로 이런 순간에 당신은 자신의 깊은 본성을 들여다볼 기회를 얻을 수 있고, 어쩌면 진짜 본연의 당신은 자신의 마음이나 생각, 신념, 확신, 관계, 기억, 기대 등 이 모든 것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큰 실망의 순간이 이 문제에서 진정한 돌파구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만약 당신이 큰 실망이나 큰 자기 의심을 경험한다면, 이것은 당신에게 앞날이 기대되는 순간이다. 당신이 마음의 감옥, 즉 신념, 생각, 확신의 감옥에서 벗어날 기회일 수도 있다.
어쩌면 당신은 이제 자신의 생각과 신념을 주장하는 데 그다지 단호하지 않을 것이며, 당신과 의견이 맞지 않거나 당신의 기준이나 기대에 따라 살지 않는 사람들을 그렇게 쉽게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언제나 희망적인 신호이며, 어쩌면 여기에서 당신은 본연의 당신이 자기 생각도, 자기 마음도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거나 상기할 기회를 가질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초월한 당신의 큰 부분이 있다. 당신은 이것을 혼이라고 할 수도 있고, 존재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는 이것에 많은 형태를 부여할 수는 없다. 당신은 이것이 신과 같은 것이나 에테르체라고 상상할 수도 있고, 온갖 것을 상상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마음은 영을 이해할 수 없다.
마음은 모든 것에 형태를 부여해야 하는데, 당신은 영에 형태를 부여할 수 없다. 영은 형태 안에서 살 수 있으며, 당신 자신과 현재 당신 삶처럼 형태를 점유할 수는 있지만, 영이 실제로 형태를 취할 수는 없다. 당신은 영을 중심으로 형태를 만들 수는 있다. 영은 형태를 점유할 수는 있지만, 형태와 같은 것은 아니다.
당신은 영을 영이 아닌 다른 것으로 바꿀 수는 없다. 당신은 신이 창조한 것을 바꿀 수는 없다. 비록 모든 사람이 그리하려고 매우 열심히 애쓰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세상이 당신 몸을 창조했다. 물질 우주에서의 당신 삶이 당신이 인식하고 있는 당신 마음을 창조했다. 하지만 당신 영은 신이 창조했다. 자연이 당신 마음과 몸을 창조했다. 신이 자연을 창조했지만, 당신 내면에 실제로 신이 창조한, 영원한 것은 마음과 몸을 초월한다.
만약 당신이 여기에서 말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면, 이것은 큰 도약이고, 인식의 큰 전환이며, 큰 문턱을 의미한다. 당신은 여전히 세상에 살고 있고, 몸 안에서 살아가면서 활동하고, 마음을 이용하여 끊임없이 변하는 상황과 삶의 무수한 문제들을 헤쳐 나가지만, 마음과 몸 너머에 있는 자기 자신을 경험하는 것은 큰 위안을 준다. 이것은 두려움에서 비롯된 온갖 집착에 대한 훌륭한 해독제이다. 사람들은 열렬한 종교적 믿음, 취미, 낭만적인 추구, 강박적인 일에 지나치게 집착한다.
이 모든 것 너머에 당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때, 당신은 일종의 깊은 자신감이 생기고, 자신을 깊이 신뢰하게 된다. 몸은 오류에 빠지기가 너무 쉬우므로, 당신은 몸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다. 몸은 너무 쉽게 손상되고, 수많은 문제에 매우 취약하다. 그리고 당신이 내일 급사하거나 차에 치일 가능성, 또는 어떤 재난을 만날 가능성은 항상 있다.
당신은 마음을 진정으로 신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마음은 너무 혼란스럽고, 매우 많은 두려움, 불안, 적의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실제로 상당히 무질서하다. 왜냐하면 마음에는 자신을 안내할 영이 없고, 영의 안내가 없으면, 상당히 변덕스럽기 때문이다. 마음은 온갖 어려움과 심지어 자멸적인 행동에 빠지기 쉽다.
가장 균형 잡히고, 내적 삶이 가장 조화로운 사람들은 이성의 영역 너머에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그러고 나서 자기 마음이 어떤 것을 섬기기 위해 여기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만약 마음이 자기 생각만을 섬긴다면, 변덕스럽고 갈등을 일으키며, 그 결과 당신이 보는 것은 당신이 경험하는 세상이다. 이 세상에서 인류는 아름다운 것도 만들어낼 수 있고, 공포스러운 것도 만들어낼 수 있다. 심지어 온갖 이 이성적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고통받고, 비참해하고, 부정직하며, 자신과 함께할 수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 현존할 수 없고, 잠시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다. 또한 자신과 함께하는 법도 모르고, 삶과 함께하는 법도 모르며,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능력에도 제한되어 있다. 영의 안내가 없다면, 마음은 미쳐 날뛴다.
마음은 소통의 매개체가 되도록 만들어졌다. 그것이 마음의 가장 큰 목적이다. 하지만 만약 이 목적을 경험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고, 실제로 한 개인의 삶에서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한다면, 그 사람은 자기 마음과 다른 사람들의 마음으로 인해 미쳐 날뛸 것이다. 그것은 끊임없는 소음이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내적 대립, 즉 지옥 같은 마음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마약을 한다. 사람들은 우울증에 빠지며, 자신의 습관이나 취미에 강박적이 된다. 정신 질환이 만연하고, 늘 상존한다. 마음은 영을 섬기지 않으면, 자멸적이 된다. 그리고 비록 마음의 자멸적 성향이 억제된다 하더라도, 행복이나 성취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본연의 당신은 몸과 마음보다 더 크며, 이것을 깨달으면 당신은 자신의 존재가 이생 너머에서도 계속될 것임을 알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본연의 당신이 마음과 몸이 아니라면, 당신 몸의 기능이 멈추고, 심지어 당신이 경험하는 마음이 멈춘다고 해서 당신 존재가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사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물음을 다룰 때, 당신이 이 문제를 어떻게 보고 이해할지는 당신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동일시하는 것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만약 자신을 단순히 몸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죽음이 끝이다. 당신은 마치 다시 바다로 되돌아가는 물 한 컵과 같다. 당신 몸을 구성하는 분자는 그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무, 바위, 다른 생물의 일부 등 무엇이든 다른 어떤 것이 되는 우주 분자의 일부가 된다. 당신은 그저 물질 우주에 있는 물질의 일부일 뿐이다.
만약 마음이나 생각과 자신을 동일시한다면, 당신은 자기 이성이 살아남고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천국을 만들려고 할 것이다. 사람들은 온갖 천국의 상태를 생각해 냈지만, 그중 어느 것도 그다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당신은 하루 종일 신을 찬양하면서 앉아 있을 수도 없고, 역겹거나 넌더리가 나지 않고 오랫동안 쾌락을 누릴 수도 없다. 만약 당신이 완전히 편안하고 아름다운 삶을 산다면, 이것은 이성에게 대단히 지루한 일이 된다.
천국에서 당신은 여전히 마음과 몸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는 이 모든 관념은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지옥이 된다. 당신이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아름다운 곳 말고 무엇이 지옥인가? 사람들이 자신의 이성과 몸이 실제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상상하는 천국은 얼마 후 지옥처럼 된다.
어떤 사람들은 그냥 신 안으로 다시 녹아든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은 소멸이다. 그것은 마치 물 한 컵을 다시 바다에 붓는 것과 같다. 당신이 자신을 그저 이성과 몸이라고 생각한다면, 어쨌든 그렇게 녹아든 것에서는 당신 자신과 관련된 의미를 찾을 수 없다. 비록 신이 훌륭하다고 해도, 사람들 대부분은 실제로 소멸을 반기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사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이 질문에 접근하는 방식은 실제로 당신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무엇과 동일시하는지에 달려 있다. 몸이 없을 가능성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 많다. 대조되는 것이 전혀 없고, 아무런 풍경도 없이, 텅 빈 존재 속에서 그저 마음만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만약 몸 없이 물질 현실에 있다면, 당신은 참여할 수 없으므로 상당히 좌절하게 된다. 사람들에게 말해도, 그들은 당신 말을 들을 수 없다.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도, 그들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막 하려고 하는 어떤 것을 하지 못하도록 알려주려고 고함치고 소리질러도, 그 사람은 당신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몸을 떠날 때, 다시 말해 죽을 때, 그들은 사랑하는 이들과 떨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 곁에 있으면서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은 그들에게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답답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짧은 시간 동안만 “방문”이 허락된다.
당신이 죽고 아내가 재혼한다면, 그 좌절감을 상상할 수 있는가? 당신은 그들이 결혼식을 올리거나 사랑을 나누거나 로맨틱한 시간을 보낼 때 지켜보고 싶은가? 그리고 자녀들이 실패하고 심각한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면서도 그들과 전혀 소통할 수도 없고, 그들에게 경고할 수도, 조언할 수도 없는 상태에서 그들 곁에 머물러 있고 싶은가?
그래서 누군가가 죽으면, 그들은 사랑하는 이들과 떨어지게 된다. 만약 이처럼 떼어놓지 않는다면, 그들이 사후에 겪는 것과 지내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고 울화가 치밀 것이다. 연결이 지속될 수 있는 관계도 있지만, 이런 경우에도 어쩌다 한 번씩 연결된다.
당신이 죽으면, 물질적 매개체를 잃게 된다. 몸이 그 목적을 다했든, 너무 이른 시기에 죽었든, 어쨌든 매개체를 잃는다. 젊은이도 죽고, 늙은이도 죽는다. 몸은 일시적인 매개체이다. 노쇠해지거나, 다치거나, 병들기도 하며, 싸움으로도 죽는다. 실수로 차에 치이거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나무에 부딪히기도 한다.
사람들은 완벽한 순간, 마치 삶을 마친 순간에 죽는다고 생각하는 듯한데,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언제든지 어떤 일도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당신은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현존해야 한다.
사람들은 “오, 이 사람은 떠날 때가 되었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터무니없다. 극소수만이 떠날 때가 된 사람이다. 노인이 그렇고, 오랫동안 병을 앓은 사람들이 그렇고, 살 가치가 없을 만큼 삶이 너무 비참한 사람들이 그렇다. 하지만 사람들 대부분은 죽을 때 죽는다. 그들은 때가 되어 죽는 것이 아니다. 그냥 죽는다.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기거나, 몸이 쇠약하거나, 아니면 그들이 어떤 어리석은 실수를 하여 죽는다. 다른 이유는 없다.
그래서 이제 당신에게는 몸이 없다. 그러나 잠깐은 여전히 마음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다른 종류의 마음 상태이다. 왜냐하면 몸이 없으면, 마음도 동일한 차원에서 기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 마음 대부분은 몸을 관리하고 지시하는 데 사용되며, 여기에는 계획·활동·기억이 포함된다. 정신 능력과 정신 에너지의 상당 부분은 몸을 관리하고 몸의 행동을 계획하는 데 사용된다.
몸이 없으면, 이성의 상당 부분이 몸과 함께 사라진다. 몸이 없는 상태에서 당신은 다음주에 무엇을 할 것인지, 지난주에 무엇을 했는지 여전히 생각하겠는가? 자신의 활동, 다른 사람들과의 약속, 모든 계획에 대해 여전히 걱정하겠는가? 몸이 없으면 활동도 없다. 활동이 없으면, 계획도 없다. 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존재한다.
당신은 이승을 떠난 후, 어쩌면 잠깐 자기 삶을 엿볼 수 있겠지만, 곧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차원에서, 당신이 죽었을 당시 마음 상태에 따라, 또 몸과 마음을 초월한 자기 삶에 대한 인식에 따라, 당신은 자신의 영적 가족의 한 구성원을 만날 수도 있고,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깊은 무지, 증오, 폭력의 상태에서 죽으면, 그 사람은 의식적으로는 이런 접촉을 하지 못한다. 그 사람은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일종의 중음계로 보내지며, 그곳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다음 그들은 또 다른 과제를 부여받지만, 그 과정을 경험하지는 못한다. 그들은 물질 현실에서 자신의 학습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으므로 그저 다른 형태의 존재 상태로 들어갈 뿐이다.
당신 마음과 경험은 아직 돌아갈 준비가 되지 않았으므로, 당신은 신에게 돌아갈 수 없다. 신은 당신에게 요술 지팡이를 흔들어서 당신의 온갖 갈등과 어려움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당신에게는 여전히 마음이 있고, 마음은 여전히 어려움으로 가득 차 있으므로, 당신은 천국으로 돌아가거나 더 큰 존재 상태로 들어갈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당신이 위대한 심판관 앞에 가서 당신 삶이 평가받고, 선하면 통과해서 천국으로 가고, 악하면 지옥이나 끔찍한 상태로 떨어지는 심판의 날은 없다. 그것은 완전히 환상이다. 그것은 종교 기관에서 사람들을 순종하게 하거나, 그들에게 선한 행동을 하도록 겁을 주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끝없는 형벌로 위협하기 위해 이용된다. 하지만 그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신을 정말 끔찍한 존재로 생각한다. 사나운 존재, 잔인한 존재로 생각한다.
실수하기가 매우 쉬운 세상, 현명해질 가능성이 아주 희박한 세상에 당신이 있었는데, 왜 신이 당신을 벌하겠는가? 당신을 안내할 앎이 없다면, 즉 당신 내면에 신이 창조한 지성, 신이 심어 놓은 깊은 지성이 없다면,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실수를 저지르는 것뿐임을 신은 안다.
그런데 당신이 삶에서 안내하는 이 힘과 현존을 인지하거나 경험하지 못했다고 해서 신이 당신을 처벌하겠는가?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를 어린아이라고 처벌하거나, 바보를 바보라고 처벌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당신을 안내할 앎, 즉 신이 창조한 이 깊은 지성이 없다면,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실수를 저지르는 것뿐이다.
그래서 선한 행동, 악한 행동이라는 이 개념은 다시 말해, 만약 당신이 삶에서 정말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면, 당신은 또 다른 형태의 삶으로 보내질 것이며, 그곳에서 그것을 보상하고, 이성을 초월한 마음의 일부를 회복하려고 노력한다는 말이다. 당신은 이 마음을 어느 정도는 물질적 삶 너머까지 지니고 간다. 단지 마음에서 많은 생각과 집착이 사라질 뿐이다. 왜냐하면 몸이 없다면, 집착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물질 영역을 벗어나면, 당신 생각의 90%는 그저 무의미하고 맥락도 없다.
만약 당신이 폭력적이고 무지했다면, 혹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죽었거나, 신에게 화가 났거나, 대단히 심한 갈등을 겪었다면, 당신은 다른 형태의 삶으로 배정될 것이다. 어쩌면 같은 행성일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우주 다른 곳으로 보내질 수도 있다.
만약 큰 평정심을 지니고 자신을 받아들인 상태에서 죽는다면, 당신은 영적 가족의 구성원을 만날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이며, 그들이 있는 데서 깨어나, “와! 내가 지금까지 어디 있었지?”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들은 모두 비록 형체가 없더라도 서로를 알아볼 것이다.
이것은 마치 불편한 긴 잠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을 것이다. 당신은 이전에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고, 그곳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다. 하지만 그곳은 아직 천국이 아니고, 사실 더 높은 상태도 아직 아니다. 이승에 있는 당신을 지켜보는 영적 가족은, 당신이 받아들이는 상태, 마음이 열린 상태로 이승에서 떠나면, 당신을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극도로 폭력적이지도, 갈등도 없는 삶을 살았다면, 당신은 오랫동안 자신과 함께한 학습 단체에 다시 합류하는 영광과 기쁨을 누릴 것이다. 그들은 당신이 물질 우주의 삶에 계속해서 봉사하기 위해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할 기회를 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것이 당신이 해야 하는 일임을 완벽하게 알 것이기 때문이다.
선택하는 이 능력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당신은 물질 현실에서 사는 다음의 경험에서 자기 앎을 찾을 큰 기회를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큰 가능성을 지닌 훨씬 더 큰 임무를 맡을 수도 있다. 이제 보상할 것이 없다면, 당신은 더 큰 일, 더 큰 기회를 배정받을 수 있다.
이것은 당신과 당신의 영적 가족이 함께 결정하고, 천사의 현존이 인도한다. 이것은 당신이 지금 거의 상상할 수 없는 현실이므로, 여기에 형태를 부여하려고 하지 말라. 우리는 여기서 어떤 장면이 아닌, 심오한 경험을 이야기한다.
모든 사람은 결국 천국으로 돌아가겠지만, 거기에 도달하려면 엄청나게 긴 시간이 걸리고 많은 고통을 받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것이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업보의 개념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사람들은 업보를 이용해 세상의 수많은 사람의 비참한 상황을 정당화하고, “저들은 전생에 나쁜 짓을 했으니, 벌로 이번 생을 살아야 한다.”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잔인한 정당화가 된다.
당신이 세상에 오면, 세상을 상대해야 한다. 당신은 매우 나쁜 환경에서 태어날 수도 있다. 이것은 당신이 지난 삶의 경험에서 선했는지 악했는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형벌이 아니다. 만약 당신이 어느 정도 성장했고 건강한 영적 상태를 이루었다면, 선택의 문제일 수도 있다. 인류의 비참한 상황이나 빈민가에서 얼마나 많은 성자가 나왔는가? 성자가 나오기에는 부와 풍요로움보다 가난이 더 낫다.
그러므로 지금 삶이 전생의 과보라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것은 정말로 사실이 아니다. 단지 만약 당신이 어느 한 생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지 않았다면, 다른 생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을 것이라는 의미에서만 부분적으로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끔찍한 상황에 빠져 잔인한 대우를 받는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이것을 하나의 기회로 선택할 수는 있다.
하지만 당신이 물질적 삶으로 들어가면, 당신의 태곳적 고향과 영적 가족에 대한 기억은 이제 대체된다. 그 기억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삶을 살면서 겪는 어려운 경험으로 대체된다. 여기에서 당신에게 근본적이고 영원한 것 위에 완전히 새로운 인식과 이해의 층이 씌워지기 시작한다.
만약 당신이 정말 나쁜 사람이고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면, 어쩌면 당신은 전생의 상처들을 치유하고 보상할 때까지 돌보미나 간호사나 간병인이 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처벌을 받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처벌받는 것과는 다르다.
물질적 삶으로 들어가기 위해 기다리는 많은 존재가 이곳 지구에서 당신이 자신을 위해 선택하고 싶어 하지 않을 상황을 선택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에 있는 동안 그러한 환경에 있을 때, 자신의 영적 헤리티지를 되찾거나 영적 가족을 기억하기가 훨씬 더 낫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부유하고 안락하고 대단한 집안에서 태어난다면, 그 모든 것의 유혹이 너무 커서, 세상에 들어와서 자신의 참된 영적 선물을 드러내고 싶은 사람에게는 진정한 약점이 된다.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보다 착각하기가 훨씬 더 쉽다. 훨씬 더 산만하고, 훨씬 더 유혹을 많이 받으며, 가난한 사람들보다 가치가 거의 없는 것들에 훨씬 더 집착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가난을 더 큰 기회로 선택한다. 그렇다고 가난이 옳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가난은 여전히 극도로 힘들고, 심지어 많은 경우 끔찍하다. 따라서 여기에서 사람들의 가난한 삶을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영적인 일은 모든 곳에서 진행된다. 부자들 사이에서도,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가난한 사람들, 심지어 절망적인 사람들 사이에서도 진행된다. 영적인 일은 어디에서나 진행된다.
그래서 가난한 보통 사람들이 부유한 보통 사람들보다 더 종교적이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종교가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들은 물질적 삶의 한계를 알며, 자기 내면에 있는 영적 힘에 더 의존한다. 어쩌면 그들이 더 미신적이지만, 동시에 전반적으로 더 경건하다.
그러므로 당신이 이승을 떠날 때, 몸을 놓고 가며, 몸과 관계된 많은 생각과 사고, 계획, 목표, 전략, 태도 등을 놓고 간다. 왜냐하면 당신에게는 이제 이것들과 관련된 맥락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여전히 마음이 있다. 여전히 세상 마음이 있다.
만약 불화와 갈등이 거의 없이 더 큰 의식 상태인 이 단계로 들어가면, 당신은 자신의 영적 가족을 만날 것이고, 그들은 당신에게 다음 임무를 줄 것이다. 그리고 그 임무를 수행할 곳은 같은 행성이 될 수도 있고, 우주의 삶이 있는 큰 공동체의 다른 어떤 곳이 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같은 행성으로 되돌아가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일단 당신이 물질 현실에서 사는 것을 모두 마치면, 당신을 이 수준의 삶과 계속 연결해 주는 이 마음은 당신이 더는 경험하지 않는다. 이제 당신은 순수한 앎의 수준에서 일하며, 당신의 개체성은 우주에서 하나의 빛이 된다.
이제 당신은 별처럼 빛나며, 조약돌처럼 굴러다니지 않는다. 그러면 형태 안으로 들어갈 필요도, 변화를 겪을 필요도, 보상할 필요도, 심지어 특정 공헌을 할 필요도 없어진다. 이제 당신은 물질 현실 너머에 있는 창조의 큰 파노라마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당신은 지금 이 큰 현실을 상상할 수 없으며, 어쩌면 심지어 이 현실이 당신에게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 현실은 당신의 성장이나 진보 단계에 해당하지 않으며, 지금 이 순간 당신에게 필요한 것과 관련도 없기 때문이다. 마치 여섯 살 아이에게 35세가 되는 것의 이점을 알려주는 것과 같다. 여섯 살 아이는 자동차를 운전하거나 다른 자유를 누리는 것이 재미있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이 현실은 그들의 영역과 범위 너머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물질 현실 너머에 있는 삶을 이야기할 때, 그 삶은 정말로 당신의 영역과 범위 너머에 있다. 당신은 겨우 여섯 살이고, 물론 비유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35세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사람들은 죽는 것을 두려워하며, 자연은 이 두려움을 그들 안에 심어 놓아 그들이 어리석게 행동하여 실제로 이곳에서 어떤 것을 할 기회를 얻기 전에 너무 이른 시기에 자기 삶을 끝내지 않게 하였다. 만약 당신이 삶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하려고 한다면, 살려는 의지가 죽으려는 의지보다 더 강해야 하며, 그것은 좋은 일이다. 모든 것이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그러지 않으면 사람들은 바로 포기할 것이다. 삶이 힘들어지면, 바로 포기한다.
당신은 그리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이곳에 있어야 한다. 여기가 바로 당신이 있기로 되어 있는 곳이다. 그래서 당신이 이곳에 있으며, 지금 이 순간 이 상황에서 삶에 독특한 공헌을 하려고 한다. 이렇게 할 때 당신이 복원되며, 우주 삶의 진화와 안녕에 공헌하기 때문이다.
일단 몸과 마음 너머에 삶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당신은 목적이 있어 세상에 왔다는 것을 경험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이 목적에는 당신 삶의 가장 큰 의미가 담겨 있으며, 동시에 관계를 찾는 이유도 담겨 있다. 분명히 이 목적은 당신이 삶에서 추구하고 행하는 모든 것의 이면에 있는 더 깊은 동기를 나타낸다.
이것이 지금 당신 앞에 놓인 여행이다. 그래서 신이 앎으로 가는 계단을 제공했다. 그래서 인류를 위한 새 메시지가 세상에 있다. 그래서 지금 큰 석명이 있다. 세상에 다가오는 변화의 큰 물결을 마주하고, 지적 생명체로 이루어진 큰 공동체 안에서 인류의 미래에 대응하려면, 인류가 더 굳게 단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당신은 더욱 명확하게 영성과 종교를 이해해야 하고, 삶을 이해해야 하며, 자신의 진정한 목적·의미·방향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는 세상의 모든 종교에서 진실인 것이 강조되어야 한다. 당신은 목적이 있어 세상에 파견되었고, 이 삶은 당신이 그 목적을 경험하고 표현할 기회라는 것이 강조되어야 한다. 이 목적은 당신이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자신의 인식 속에 그 목적이 드러날 수 있는 삶을 창조해야 한다. 당신은 어려움에 처한 세상에 봉사하기 위해 이곳에 왔으며, 그 보답으로 자신도 봉사를 받는다.
당신은 죽음에서 이곳으로 왔다. 죽음은 시작이자 끝이지만, 이것은 단지 당신의 큰 존재 방식의 한 단계, 삶에 대한 큰 봉사의 한 단계일 뿐이다.
이것들을 생각해 보며, 묵상하라. 하지만 당신의 이성은 이것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라. 이성은 영을 제대로는 이해할 수 없다. 이성은 오직 영을 섬길 수만 있으며, 그것이 이성의 큰 목적이자 큰 의무이다.
하지만 당신 삶이 이 한 존재 방식보다 더 크다는 것과 본연의 당신은 마음, 이성, 몸 너머에 있다는 것을 알라. 그러면 당신은 더 큰 경험, 더 큰 확신, 더 큰 힘으로 가는 문을 열게 된다. 이것들은 모두 당신이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이 세상에 공헌하기 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