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9월 01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가
받다
지구는 강력한 지질학적 힘들이나 생물학적 힘들에 의해 움직인다. 이 힘들은 물질 우주가 시작할 때 작동하도록 설정되었다. 신은 이 힘들이 저절로 작동하며 특정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설정했다. 이것은 엄청난 격변을 일으켰으며, 심지어 이 지구가 생성된 이후에도 그러했다. 이 격렬한 힘들은 행성의 특정 환경에 따라 우주 전역에 걸쳐 작용한다.
인류는 험악한 날씨, 가뭄, 홍수, 전염병 등 온갖 것을 견뎌야 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물리 법칙과 자연법칙에 지배받는 변하는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삶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당신이 온 곳이자 돌아갈 곳인 고향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러한 환경에서 살아가려면 끊임없이 적응하고 끊임없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세상은 아름답고 훌륭하지만, 동시에 위험하고 어려운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사는, 지능을 가진 모든 생명체, 모든 생물체에게는 요구되는 것이 많다. 특히 자의식이 있고 미래와 과거를 인식하는 이들에게는 요구되는 것이 많다.
이곳에서의 당신 삶이 일시적이고, 육체적 매개체가 일시적이라는 사실은 당신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경험을 할 때 당신에게 한층 더 부담을 준다. 현재 심리적 부담을 주는 것은 물론 미래의 어려움이나 심지어 당신 생명을 잃을 가능성으로 인한 큰 불안감도 안겨준다.
이것은 신이 내린 벌이 아니라, 당신이 신과 떨어져 살고 분리 속에서 살아갈 때 삶이 의미하는 것을 나타낸다. 삶은 변할 것이며, 어려울 것이다. 이곳의 삶은 당신 고향과는 다르며, 천국의 상태와는 다를 것이다. 당신은 많은 역경을 마주해야 할 것이다.
이제 인류는 변화의 큰 물결에 직면할 것이다. 기후 변화, 험악한 날씨, 자원 감소, 환경 악화, 증가하는 경제적·정치적 불안정, 남은 자원을 둘러싼 충돌과 전쟁의 위험 증가 등 변화의 큰 물결에 직면할 것이다.
당신은 이런 변화의 큰 물결에 맞서 살기 위해 세상에 왔으며, 이런 변화의 큰 물결은 이미 오늘날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다. 당신은 어쩌면 아직 변화의 큰 물결을 마주하지 못했을 수도 있으며, 어쩌면 아직 변화의 큰 물결의 규모를 알지 못할 수도 있다. 이 변화는 현재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자연환경의 균형을 바꾸고, 기후 변화의 힘들을 촉발하면서, 세상 여러 지역에서 허리케인, 토네이도, 홍수, 가뭄, 극심하고 험악한 기상 조건 등 큰 재난을 일으키고 있다.
인류가 지구를 남용하고 오용하여 이제 자연의 균형이 바뀌고 있으며, 이 변화는 인류에게 유리하지 않다. 지금 이 순간에도 국가들과 국민은 현재 일어나는 일의 규모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자신의 특권을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무역망과 자원 개발은 이제 확고히 자리 잡았다. 사람들은 자제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일부 부유한 국가에서는 제한을 두겠지만, 그 외 국가에서는 그런 제한이나 제약이 없다.
이것은 인류가 자연환경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자연환경이 인류에게 더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뜻이다. 물론 결국에는 자연이 승리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딜레마를 낳는다. 이것은 근본적인 딜레마를 낳는데, 그 까닭은 자연과 당신의 근본적인 관계, 환경과 당신의 관계가 국가법보다 더 크고, 사회 관습보다 더 크며, 종교적 믿음보다 더 크고, 개인이나 국가의 태도나 관점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인류 전체가 자연과의 이 근본적 관계를 잃어버렸으며, 환경과 당신의 관계에 담긴 힘과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잃어버렸다. 당신은 기술로 자연의 힘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어느 정도는 자연의 힘을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연의 힘을 극복할 수는 없다. 우주 전역에서 강대국들이 시도했지만, 단지 큰 힘과 자연의 힘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뿐임을 알았다.
지금 이 순간, 인류는 마치 청소년처럼 자신의 힘에 들떠 있으며, 자연계를 초월하여 자연의 힘에 지배받지 않는 환경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당신은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강력한 반응, 즉 인간의 남용과 무책임에 대한 자연법칙의 강력한 반작용을 경험하고 있으며, 그 결과는 비극적이다.
지구는 점점 더 더워지고, 더 뜨거워지고, 더 건조해지고 있으며,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지구는 새로운 균형을 이루어 바뀌겠지만, 이것은 인간 가족에게 유리한 균형이 아닐 것이다. 이것을 바꾸고 이러한 결과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의 행동이나 활동, 관리 방식에서 변화가 급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 이런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은 낮다.
심지어 분리된 상태에서도 당신은 당신 삶을 지배하는 힘에 순응해야 한다. 당신은 그 힘을 어느 정도까지는 통제할 수 있고, 그 위험을 완화할 수 있으며, 기회를 개발할 수도 있다. 어쩌면 심지어 짧은 기간일지라도 인류는 인간 가족 대부분에게 큰 풍요를 창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에는 자연이 지배할 것이다.
이 지구의 자원을 다 써버리고 나면, 인류는 우주 외계 세력의 설득에 넘어갈 것이다. 그들은 나약하고 분열된 인류를 이용하려고 할 것이며, 지구 자연의 아름다움과 자원을 통제하려 할 것이다. 이 지구는 생물의 다양성이 풍부하며, 다른 이들이 매우 가치 있게 여기는 행성이다.
지금 당장은 그들이 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력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힘은 무력이 아니라, 설득력이다. 그리고 인류가 자신이 한 행동의 결과로 더 궁핍해질수록, 이 설득은 점점 더 강력할 것이며, 인류는 평화의 목적으로 이곳에 온 척하는 이들이 제시하는 것의 유혹에 점점 더 저항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인류를 이용하고 인류의 상황을 이용하려고 이곳에 왔다.
이 세력들은 소수이지만 영리할 것이다. 그들은 인류가 모든 것을 다 써버려 이제는 가난하므로, 그들이 제공하는 것의 유혹에 저항할 수 없음을 알 것이다. 그들은 안정이나 안전보장이나 자원과 같은, 인류가 포기한 것들, 이곳 지구에서 희생된 것들을 제공해 준다고 할 것이다.
이 세력들은 대규모로 오거나 많은 수가 오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열등한 상태로 전락한 상황에서는 이 지구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데 단지 소규모 집단만 있으면 될 것이다.
이런 상태로 전락하는 것이 당신의 숙명이 되거나, 운명이 될 필요는 없다. 또 그렇게 되도록 정해진 것도 아니다. 이것은 이전에 내린 수많은 결정, 지금 내리는 결정, 앞으로 내릴 결정의 결과일 뿐이다.
이미 변화의 힘은 세상에서 촉발되었고, 이것은 경우에 따라서 인간 가족 대부분의 상황을 급진적으로 바꿀 것이다. 비록 당신이 방향을 바꾸고자 하고, 자제하고 활동을 억제한다 하더라도, 당신이 바꿀 수 없는 힘들이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신은 이 힘들을 “불가항력(acts of God)”이라고 말할지도 모르며, 일종의 징벌로 험악한 날씨와 가뭄 상황을 신이 내린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것들은 당신이 환경에 미친 영향을 나타낸다.
당신이 우물물을 다 써버리면, 바닥이 드러난다. 당신이 농사를 제대로 짓지 않으면, 토양이 황폐해진다. 당신이 너무 많은 것을 태워 환경을 오염시키면, 날씨가 변한다. 자원을 얻기 위해 지구를 과도하게 개발하면, 자원이 사라진다.
이것을 알아내기 위해 천재가 되지 않아도 된다. 상식이 필요하지만, 지금은 상식이 상식으로 여겨지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지금 당신은 인류가 세상에 파괴적인 충격을 준 결과를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충격은 계속될 것이다. 신은 이 충격을 직접 주지는 않았다. 다만 삶의 메커니즘을 창조했고, 지질 작용이 일어나게 했다. 이 지질 작용으로 물질 우주가 형성되었고, 진화하는 방식으로 계속 형성되고 있다. 당신은 허리케인이 있다고 신을 비난할 수 있다. “신이여, 당신은 왜 태풍을 만들었는가?”라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신은 단지 태풍이 발생하는 조건만 만들었다. 그때는 이 지구에 어떤 생명체도 존재하지 않았다. 신은 인류를 벌하려고 특정 태풍을 창조하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고 무지하다.
만약 인류가 지금 가는 방향으로 계속 간다면, 이 같은 사건은 더 많이 발생할 것이다. 세상의 많은 지역이 큰 피해를 볼 것이며, 건조 지역은 극심한 가뭄으로 사람들이 떠나야 할 것이다. 국가가 붕괴할 것이다. 수백만 명의 난민이 갈 곳이 없을 것이다.
인류는 과도한 개발, 무지한 사용, 미래에 대한 무관심으로 인해 아주 소중한 자원들을 잃을 것이다. 인류는 미래를 생각하지 않으므로, 지금 당장 모든 것을 가지려고 할 것이고, 자녀들의 미래를 빼앗을 것이며, 상상도 못 할 어려움이 있는 미래를 만들 것이다. 여기에는 처벌이 없다. 단지 결과일 뿐이다.
자연계를 배우고, 또 계속 유지될 수 있는 방식으로,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당신의 책임이다. 이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배운 것이며, 새롭게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배운 것을 인류는 탐욕, 부패, 야심으로 인해 잃어버렸다. 그리고 지금 세상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 배가 이미 만원이다.
당신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변화의 큰 물결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자연계에 큰 균형을 회복하여 당신에게 도움이 되도록 할 수 있는가? 답은 당신의 이성 너머에 있다. 당신에게 매우 좋은 생각이 있을 수도 있고, 세상에서 제안하는 해결책도 많다. 만약 그 해결책들을 한데 모아 제대로 활용한다면 전반적으로 매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질문들에 진짜 답을 얻으려면, 이성보다 더 깊숙이, 당신 내면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위해 해결해 줄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문제이다. 이것은 단순히 정부나 과학계나 정치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문제이다.
이것은 자연과 당신의 관계를 나타낸다. 당신이 그 관계를 훼손하면, 관계가 나빠질 것이다. 그 관계는 건강하지 않을 것이고, 불안정할 것이다. 그리고 마찰이 있을 것이고,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마치 당신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처럼, 만약 상대방을 학대하고 존중하지 않으면, 상대방도 불쾌하고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방식으로 행동하고 반응할 것이다. 당신들 사이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며, 함께 조화롭게 지내지 못할 것이다.
자연과 당신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만약 당신이 자연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즉 자연이 돌아가는 방식이나 당신이 이 관계 안에서 행동해야 하는 방식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조화를 잃고 원하지 않는 결과와 불쾌한 경험을 초래한다.
만약 당신이 사는 집을 돌보지 않는다면, 집은 더이상 살고 싶지 않은 곳이 된다. 당신 집이 무너져 가는데도, 당신이 집을 보수할 수 없거나, 보수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 집은 살고 싶지 않은 곳이 된다. 지구는 인류의 집이다. 만약 당신이 지구를 돌보지도 유지하지도 않고, 또 능력껏 적절히 관리하지도 않는다면, 지구는 더이상 살고 싶지 않은 곳이 된다.
자연의 법칙을 바꿀 수는 없다. 당신은 자연이 주는 어려움의 충격을 제한할 수 있고, 자연이 주는 기회와 이점을 강화하고 발전시킬 수 있으며, 자연의 힘을 자신에게 이롭게 활용할 수는 있다. 인류는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는데, 그것은 균형의 문제이다. 그런데 인류는 그 균형을 잃었다.
인류는 기술을 획득함으로써 우월감을 느끼게 되었으며, 그 도가 지나쳤다. 만약 인류가 지혜롭다면, 지금 연료를 배급제로 할 것이며, 배급제를 강제로 해야 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인류는 가장 소중한 에너지와 자원을 보존할 것이다. 에너지와 자원을 대체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있을 것이고, 그 전환 과정에서도 어떤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믿고 가정하면서, 가능한 한 빨리 에너지와 자원을 소진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류가 만들어낸 삶의 방식은 지구 환경이 수용할 능력을 훨씬 넘어섰고, 자연계와의 균형을 무너뜨렸으며, 심지어 자기 본성과의 조화도 깨뜨렸다. 이제 당신은 지나치게 행동하고, 지나치게 바쁘며, 지구 자원을 지나치게 사용하고, 지나치게 방종에 빠져 있다.
시간과 당신의 관계가 바뀌었고, 자연과 당신의 관계도 바뀌었으며,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바뀌었다.
지금 당신은 대부분의 인간 가족을 궁핍하게 하는 생활 방식을 유지하려고 분주하다. 아주 부유한 이들의 생활 방식은 전쟁의 동력이 되고 있으며, 국가와 국민을 지탱하는 자원을 강탈하고 있다. 마치 미래가 없는 것처럼,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무모하게 내달린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는 인간의 기술과 영리함과 독창성이 어쨌든 이 모든 것을 지속할 방법을 찾을 것이라는 온갖 가정이 깔려 있다.
당신들은 자연과의 관계를 저버렸다. 당신들은 기술을 애첩처럼 받아들여 어쩔 수 없이 일종의 불륜을 저질렀으며, 그로 인해 자기 자신이나 서로에게는 물론 환경과도 조화를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신은 이 모든 것을 막기 위해 개입하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올바르게 행동하도록 당신을 격려할 뿐이다. 왜냐하면 신은 개개인의 내면에 깊은 앎을 심어 놓았고, 그 앎을 통해 신의 뜻과 힘이 흐를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타고난 감각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갖고 싶고, 되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을 위해 이 깊은 앎과 자신의 관계를 저버렸다. 그들은 열정과 환상에 이끌렸고. 세상을 살아가는 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을 훨씬 초과하는 새로운 욕구에 이끌렸다.
그래서 신은 말하지만, 당신은 들을 수 없다. 당신은 어쩌면 피상적으로 혹은 가끔씩 느끼는 것을 제외하면, 신이 당신의 행동을 제지하려는 것이나 다르게 행동하도록 당신에게 동기 부여하는 것을 느낄 수 없다. 이것은 마치 당신이 통제력을 잃고 스스로 멈출 수 없는 것과 같다. 이미 몸에 필요한 양을 훨씬 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먹는 것을 멈출 수 없어 계속 먹는 사람과 같다. 이제 그들은 자기 내면에 있는 어떤 감정적 불안, 결핍감, 상실감을 채우기 위해 계속 먹는다.
신은 이 거대한 물질 현실을 창조했지만, 동시에 당신 내면에 앎을 심어 놓았다. 그래서 당신이 물질 현실에서 사는 법을 배우고, 심지어 이곳에 있는 동안, 특히 이곳에 있는 동안, 고향과의 연결을 다시 경험할 기회를 얻을 수 있게 했다. 만약 당신 마음이 분리 속에 머물러 있다면, 당신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 단순히 죽는다고 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준비해야 하며, 이렇게 준비할 때 온갖 어려움과 도전이 있는 이 물질 현실에 온 큰 목적을 알게 된다.
당신은 자연의 웅장함, 아름다움, 다양성, 화려함, 복잡성에 감탄하면서 자연을 미학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으며, 실제로 자연은 이 모든 것을 제공한다. 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자연 안에서 생존해야 하며 생존은 쉽지 않다. 어쩌면 기술 덕분에 생존하는 것이 쉬워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단지 남들이 당신을 대신하여 그 일을 해주거나 기계가 당신 대신 일한다는 뜻일 뿐이다. 하지만 당신은 이 기계들에 에너지를 공급해야 하고, 당신을 위해 일하는 기계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당신의 진정한 균형을 되찾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준비해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당신에게 무엇이 있어야 온갖 당신의 성향과 주변 사람들의 성향에 휘둘리지 않고 이겨낼 힘, 확신, 능력을 얻을 수 있는가?
당신의 이성으로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다. 그 답은 인간의 창작과 상상력 너머에서 온다. 신은 당신 내면에 깊은 앎을 심어 놓았다. 당신이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길을 오직 앎만이 알며, 당신이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고 앎과의 연결을 더 많이 경험할수록, 당신의 활동은 자연계와 더욱 조화를 이룰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이 관계를 해치는 행동들, 바람직하지도 않고 어떤 경우에는 살 수도 없는 미래를 만들어내는 행동들에서 멀어지게 될 것이다.
인류를 자멸로 몰아가는 모든 힘은 앎의 현존과 힘으로 상쇄된다. 여기서 사람들이 자연유산을 파괴하지 못하도록 제지하는 것은 무엇인가? 좋은 생각인가? 개혁 운동인가? 이것들은 인간의 탐욕과 인간의 무지로 인해 촉발된 것을 상쇄할 만큼 충분히 강하지 않을 것이다. 더 강력한 힘이 있어야 할 것이다.
중독보다 더 강력한 힘 말고 사람들을 중독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인류가 지구를 훼손하는 것을 멈추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인류가 자연유산을 과도하게 소비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전쟁을 멈출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의 잔인함을 멈출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인류의 미래를 위태롭게 하고, 이미 자연계에 등을 돌리는 온갖 행동을 완화하고 궁극적으로 멈추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더 강력한 힘이어야 한다. 당신은 자신이 어떤 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것을 하며, 어떤 방식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렇게 살아간다. 어쩌면 당신은 일과의 관계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방향을 바꾸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자신이 불행하다는 것을 알지만, 자신에게 이 불행을 초래하는 상황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왜 그러는가?
물론 답은 많지만, 당신 삶에 젖어 있는 타성을 바꾸려면 결국에는 더 강력한 힘이 필요할 것이다. 의무·집착·관계 등 당신이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 혹은 전 세계와 맺은 것들이 당신 삶의 타성이 되어 당신 삶을 재앙으로 내몰고 있다. 더 강력한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올 것인가?
당신 내면에는 강한 것도 있고 약한 것도 있으며, 지혜도 있고 무지도 있다. 당신 내면에 있는 강하고 지혜로운 것이 우세해야 당신은 이것이 내줄 큰 혜택을 경험할 수 있다.
신은 당신 내면에 깊은 앎을 심어 놓았다. 앎은 정직함과 지혜의 원천이며, 진실을 알아보고 진실에 응답하는 능력의 원천이다. 앎은 당신 용기의 원천이며, 당신 힘의 원천이다.
앎과 함께 있지 않으면, 당신은 어리석게 행동할 것이며, 다른 사람들의 어리석은 행동을 따라할 것이다. 당신은 미래도 포기하고, 미래에 대한 대비도 포기한 채 순간만을 위해 살 것이며, 자기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결과에 대해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이기적으로 살 것이다. 그리고 결과와 무관하게 자신을 위해 즐거움·행복·소유물 등 모든 것을 얻으려고 애쓸 것이며, 마음의 욕망·중독·환상을 채우기 위해 자연과의 관계, 심지어 깊은 본성과의 관계도 잃어버릴 것이다.
앎과 함께 있지 않으면, 당신은 이런 것들을 할 것이다. 어쩌면 이것에 대해 죄책감과 불안감을 느낄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그렇게 할 것이다. 어쩌면 남들만큼 심하게 하지 않을 수는 있으나, 여전히 끌릴 것이다. 당신은 갖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굴복할 것이며, 이 두려움 때문에 결국 건강하지 못한 것을 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맞지 않은 사람과 결혼할 것이고, 맞지 않은 직업을 선택할 것이며, 자신에게 맞지 않은 환경에서 살 것이다. 당신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심지어 당신 내면의 경고조차 무시할 것이다. 당신은 사람이나 장소, 그 밖의 다른 것들에 중독되어 공허함을 채우려 하고, 당신 행동이 만들어내는 불안을 몰아내려고 할 것이다.
앎과 함께 있지 않으면, 당신은 어느 정도, 어쩌면 아주 많이 이런 일을 할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라. 사람들이 어떻게 내몰리는지 보라. 그들은 절망적인 삶을 살며, 상황의 노예이고 욕망의 노예이다. 그들은 심지어 자유 국가에서조차 자유민처럼 활동하지 못한다. 그들은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며, 사로잡혀 있다. 5분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다. 그들은 자신을 알지 못하며, 자기 삶이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끔찍한 결정, 때로는 터무니없는 결정을 내린다. 그리고 미래가 없는 것에 자신을 내준다. 왜 그러는가?
물론 당신은 많은 것을 탓할 수 있다. 문화를 탓할 수도 있고, 나쁜 끌림을 탓할 수도 있으며, 악을 탓할 수도 있고, 신을 탓할 수도 있다. 당신은 오만 가지를 탓할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것은 당신이 앎의 안내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진실은 단순하다. 진실은 복잡하지 않다. 하지만 단순한 진실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본질적으로는 단순하지만, 이해하기는 그다지 쉽지 않다.
신은 당신에게 깊은 본성을 주었다. 그 본성은 당신 주변의 자연과 부조화를 이루지 않으며, 당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이 당신에게 건강하고 무엇이 해로운지, 어디에 자신을 바치고 어디에 자신을 바치지 말아야 하는지, 누구와 함께하고 누구와 함께하지 말아야 하는지, 다른 사람의 어떤 점을 따라야 하고 어떤 점을 따르지 말아야 하는지 안다. 깊은 본성은 완벽한 안내 체계이다.
하지만 당신은 깊은 본성에 복종해야 하며, 깊은 본성을 자신의 경험 속에서 발견해야 한다. 당신은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음으로써 깊은 본성과 연결하고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리고 깊은 본성을 따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작은 것에서 시작하여 더 크고 더 어려운 문제에서 깊은 본성을 경험하고 따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은 타협하지 않는다. 당신은 앎과 거래할 수 없다. 앎은 협상과 타협을 통해 원하는 것을 얻는 세상 마음, 개인적 마음과는 다르다. 앎과 함께하면, 이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어떤 것을 정말로 알면, 정말로 아는 것이며, 그것을 바꿀 수는 없다. 당신은 그것을 무시하려 하거나 다른 것들로 덮으려고 할 수는 있다. 심지어 그것에서 도망치려 할 수도 있다.
사람들이 매우 바쁘고 어떤 것에 빠져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자신에게서 도망치고, 앎에서 도망치고, 자기 양심에서 도망친다. 온갖 규칙과 지침으로 이루어진 문화가 정한 양심이 아니라 자신의 깊은 양심에서 도망친다. 이 양심은 근본적으로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아는 깊은 양심이다. 사람들은 이 깊은 양심에서 도망친다. 그래서 그들은 동요하거나 염려하거나 불안해하지 않고서는 5분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다. 그들은 벌떡 일어나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 그들은 심지어 자기 자신과 함께 있는 법조차 모른다.
정말 통제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인류 문명은 통제 불능 상태가 되었다. 이것은 마치 역을 향해 달리고 있지만, 브레이크가 없는 기차, 거칠고 통제되지 않는 기차와 같다.
세상에 다가오는 변화의 큰 물결은 자연의 반응이며, 인류가 자연을 침해하고, 자연유산을 낭비한 결과이다. 당신은 이 결과들을 마주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결과들은 당신을 무너뜨릴 수도 있고, 끌어올릴 수도 있으며, 당신이 어떻게 대응하는지에 달려 있다. 즉 당신이 앎으로 반응하는지, 혹은 이상주의나 타협이나 탐욕으로 반응하는지에 달려있다. 전자는 협력과 통합으로 이어지고, 후자는 갈등과 분열로 이어진다.
이것은 단순히 정부나 정책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당신이 세상을 어떻게 보고 세상에 어떻게 대응하는지와 관련이 있다. 이것은 당신이 앎의 안내를 받고 있는지, 아니면 앎을 대신하는 온갖 다른 것의 안내를 받고 있는지와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자연과 당신의 관계는 단순히 그 아름다움과 복잡성에 감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 관계는 실제로 자연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자연과 어떻게 함께하는지와 관련이 있다. 만약 자연과 당신의 관계가 낭만 그 이상이 되려면, 즉 낭만적인 자연, 자연의 아름다움에 매료되는 것 그 이상이 되려면, 당신은 자연과 함께 자연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다루어야 하고, 자연의 어려움을 감내해야 하며, 함께하는 관계에서 자연의 웅장함을 누려야 한다. 당신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상대하고, 그들과의 차이를 다룰 것인가?
신이 당신 내면에 답을 심어 놓았다. 그 답은 단순히 생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지성이다. 인류가 앎으로 강해질수록, 인류는 파괴적인 행동을 더 많이 자제하고, 인류에게 이익이 되는 행동과 기술과 사회 정의 체계를 더 많이 육성하고 만들어낸다.
결국 인류는 성장에 초점을 두는 청소년기의 주안점에서 벗어나, 안정과 안전보장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주의 모든 종족이 진화하면서 겪는 과정이다. 그들이 성장 단계를 거칠 때, 대개는 자원의 과도한 소모로 이어지고, 때로는 문명을 파괴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환경 안에서 어떻게 안정적으로 살아갈지를 결정해야 한다.
이것은 매우 큰 일이다. 이것이 바로 문명의 진화가 실제로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한 사람의 삶에서 일어나는 삶의 단계와 같다. 젊을 때는 성장하고 확장하고 싶어 하며, 더 많은 것을 갖고 싶어 한다. 그리고 새로운 경험을 원하고, 계속해서 성장하고 확장하며, 성장하고 확장한다. 하지만 만약 성숙한 환경에서 성숙한 한 개인으로서 활동하려면, 안정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가정을 이루려면, 안정과 안전보장이 있어야 한다. 항상 새로운 것을 가지거나 자유분방하게 사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이제는 당신의 기본 책임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당신은 안정과 안전보장을 추구한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것은 당신이 여전히 삶에 매료되지도 않고, 삶을 즐기지도 않고, 변화에 마음을 열지도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단순히 자신이 살아가는 데 따르는 책임, 자신이 만들어낸 것을 유지하는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뜻일 뿐이다.
결국 인류의 문명은, 심지어 매우 황폐해진 세상에 직면하더라도,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청소년기의 행동은 인간 문화, 경제 시스템, 정치적 의제 등 모든 것에 스며 있다. 당신은 점점 더 많은 것을 원하지만,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당신은 자연과도, 서로 간에도 안정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다.
모든 것은 개인적 성취, 개인적 획득, 개인적 부, 개인적 행복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이 모든 것이 큰 불안정을 낳고 있다. 진정한 부, 진정한 행복은 다른 수단을 통해 얻어질 것이다.
신은 당신 내면에 앎을 심어 놓았다. 그리하여 당신을 안내하고 보호하며, 환경과 조화롭고 당신들 서로 간에도 조화롭게 사는 법을 가르치게 하였다. 앎은 진실을 지향한다. 실재하고 진짜이고 참된 것, 정직한 것, 자비로운 것을 지향한다. 자신의 깊은 본성과 관계를 맺을 때, 당신은 자연계와 진정으로 함께하는 관계를 재구축할 수 있으며, 지속 가능한 삶, 균형 잡힌 삶을 회복할 수 있다. 변화의 큰 물결 앞에서도, 앎은 당신을 인도하고 안내하며, 당신이 앞에 놓인 어려운 시기를 헤쳐 나갈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미래에는 인간의 많은 혁신이 필요하겠지만, 앎의 안내를 받는다면, 그 혁신은 유익할 것이다. 당신은 자원이 감소하는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당신 삶의 상황을 바꿔야 하겠지만, 앎이 그리할 힘을 당신에게 줄 것이며, 그 결과로 당신은 보상을 얻을 것이다.
당신은 큰 두려움과 불안으로 미래를 마주할지 모르지만,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앎이 유일하게 우려하는 것은 당신이 이 시기에 세상에 온 큰 목적을 인지하지도, 이루지도 못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그것이 바로 밑바탕에 깔린 우려이다. 하지만 이것을 제외하면, 앎은 당신을 두렵게 하는 것들에 의해 위협받지 않는다. 그래서 앎은 당신의 힘을 나타낸다.
앎은 당신의 깊은 본성이다. 이것을 무시하면, 당신 스스로 위험을 초래한다. 이것을 회피하면, 당신은 재앙을 마주할 것이고, 자신을 알지 못할 것이며, 세상에서 지혜 없이 살 것이다. 그래서 앎으로 돌아가는 것이 모든 유익한 활동의 기반이다.
자연과 균형을 회복하고, 미래에 인간 가족에게 닥칠 재앙을 막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천 가지는 있어야겠지만, 이 모든 것의 기반은 당신의 깊은 본성인 앎이어야 한다.
물론 이것에 많은 반론이 있을 것이다. “그렇긴 한데, 이것은”, “그렇긴 한데, 저것은” 사람들은 불평할 것이며, 그것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하, 고작 어떤 직관 같은 것에 의존하겠다고?” 그들은 앎이 단지 직관에 불과하며, 빈약하고 순간적인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앎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앎의 힘, 앎의 엄청난 능력을 인지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여전히 모든 것이 기술과 혁신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에는 서로 의견이 일치할 수 없다. 그들은 어떤 정치 체제가 더 나은지, 어떤 사회 체제가 더 나은지를 두고 서로 논쟁한다. 그 논쟁은 끊임없이 계속되며, 의견 불일치와 갈등이 모든 인간 문화에 스며 있다. 사람들은 셀 수 없이 많은 것을 두고 서로 싸운다. 말의 전쟁, 행동의 전쟁, 극단적인 경우에는 전쟁 그 자체로 싸운다.
그러나 자체적으로 갈등이 없는 큰 힘이 당신 내면에는 있다. 앎의 수준에서는 다른 사람과 전쟁할 수 없다. 당신은 서로 필요한 것을 인지하고, 그것을 충족하거나 함께 해결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것에 대한 의견 차이조차 앎의 현존에 의해 누그러질 것이다.
당신은 해결책들에 헌신할 것이다. 비록 그 해결책들이 인지하기도 어렵고 실현하기도 어려운 것으로 드러나더라도, 앎의 안내를 받을 것이므로 그리할 것이다. 당신은 행동을 자제할 것이다. 만약 앎의 안내를 받고, 앎으로 강한 사람들의 안내를 받는다면, 국가도 행동을 자제할 것이다.
자연재해가 발생할 것이다. 당신은 이것에 대비하는 법을 알 것이다. 그러나 멈추어야 하고, 중단해야 하는 것은 인류가 자연유산을 남용하는 것이다. 당신은 이 남용이 무엇을 말하는지 궁금할 수도 있다.
지구 산림의 절반은 보존되어야 한다. 연료는 배급되어야 하며, 20년 전부터 이미 배급되어야 했다. 만약 인류가 안정과 안전보장을 확보할 수 있으려면, 인구 증가와 소비를 통제해야 할 것이다. 인류가 지구를 함부로 소비하면서 이곳에서 사는 능력을 유지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인류는 다른 행성으로 이주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다른 행성은 다른 이들이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태양계를 벗어나면, 그곳은 사유지이다. 당신은 자신이 사는 곳을 올바르게 해놓아야 하며, 신은 이리할 수 있는 힘과 능력과 지혜를 당신에게 주었다.
당신은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고, 자기 삶을 재평가하기 시작해야 한다. 다른 활동에 헌신하기 전에, 이 일부터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당신에게는 기반이 없을 것이며, 자신의 지혜와 힘과 능력의 근원을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어떤 개혁 운동을 시작하겠지만, 성공하는 데 필요한 힘과 능력과 지혜를 실제로 갖추지는 못할 것이다.
이것들을 갖추려면, 당신은 내면에 있는 앎에 도달해야 한다. 바로 거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당신은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당신은 고요히 있는 법을 배운다. 그럼으로써 앎을 경험하고 앎의 현존을 느끼고 앎의 안내를 들을 수 있으며, 또 앎의 제지와 앎의 부추김을 느낄 수 있다. 당신은 과도한 자극이 있는 세상에서 물러나 당신 내면의 더 깊고 더 고요한 세계로 들어간다. 그러면 자기 내면에서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큰 힘이 있음을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