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2월 18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가
받다
사람들은 조급하다. 그래서 지금 당장 답을 원하고, 확실성을 원하며, 최종 결과를 원한다. 물론 그들은 이러한 것들을 얻지 못한다. 그래서 실망하고 의심한다. 그들은 준비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다.
깊은 통찰, 큰 관계, 놀라운 기회들, 개인적 계시, 이러한 것들은 준비한 결과로 생긴다. 이것들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이 자신에게 주어진 큰 책임을 맡을 수 있는 인식과 역량을 길렀을 때 비로소 찾아온다. 이것들 대부분은 한 개인이 준비한 결과물이다. 그리고 준비 기간에는 결과를 확신하기가 매우 어렵다. 때로는 자신이 무엇을 위해 준비하는지조차 모를 때가 있다. 당신은 단지 자신이 준비해야 한다는 것만 안다.
따라서 여기에는 큰 신뢰가 필요하며, 신이 당신 내면에 심어 놓은 깊은 지성인 앎, 당신 내면에 있는 이 앎의 힘과 현존에 대한 큰 믿음, 다른 사람 내면에 있는 앎에 대한 큰 믿음이 필요하다.
이 믿음은 필요하지만, 지혜롭게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왜냐하면 당신을 방해하는 것이 많으며, 다른 사람들, 특히 당신 삶에서 큰 역할을 하기로 되어 있는 이들을 방해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준비하는 동안에는 결과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당신 삶에서 가장 중요한 많은 것에도 해당한다. 이것은 대학 과정을 이수하는 것과는 다르다. 대학교에서는 당신이 모든 필수 과정을 이수하면 마지막에 졸업장을 받는다. 그런데 이것은 그렇지 않다.
앎이 당신 삶을 강하게 해줄 것임을 이해하고, 당신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과 당신을 방해하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이해할 때, 당신은 앎과 더 깊이 연결된다. 하지만 당신은 앎이 무엇을 가져올지 모른다. 당신은 이것이 어떤 모습일지 모르며, 그 순간이 언제 올지, 자신이 매우 중요한 것을 받을 준비가 언제 되는지를 모른다.
따라서 조급한 사람들은 먼저 결과에 대한 보장을 받고 싶어 한다. 물론 결과를 정말로 보장해 주는 것은 없다. 그래서 그들은 준비하지 않을 것이고, 자신의 능력이나 기량을 기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것들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지닌 지혜나 이룩해 놓은 것에 의존한다.
그들은 조급하고, 불안정하다. 그들은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계시의 과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설사 준비하기 시작하더라도, 끊임없이 결과를 찾으며, 과정을 더 빠르게 진행하려고 하거나 과정을 바꾸려고 한다. 물론 자신의 내적 성장을 통제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들은 이 과정이 지닌 큰 힘에서 더 많이 벗어나게 되며, 참된 내적 준비를 통해 얻을 실제 결과에서 더 멀어지게 된다. 참된 내적 준비를 할 때, 당신은 자신이 모르는 것을 배우고, 자신에게 없는 기량을 계발하며, 지혜와 분별력과 신중함을 기른다.
이러한 것들은 당신이 책을 읽거나 어디에서 강의를 듣는다고 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당신이 평생 모든 상황에서 길러야 하는 기량이며, 그 결과를 당신에게 지금 당장은 물론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가져다준다.
그러나 당신은 규정할 수 있는 단순한 목표를 위해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현명해지기 위해 현명해지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현명해지는 것이 실제로 어떤 것이고, 어떤 상태인지, 현명해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하며, 얼마나 많은 것을 한쪽으로 제쳐두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제 당신은 이러한 깊은 기량을 기르면서 이성의 영역과 범위를 넘어설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이루고 싶은 것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을지도 모르고, 노력의 가치를 인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과정이 어떻게 펼쳐지고, 무엇을 드러낼지, 이 계시가 언제 일어날지 결정하는 것은 당신의 능력 너머에 있다.
우리가 한 개인의 계시를 말할 때, 우리는 당신 자신의 인식을 훨씬 뛰어넘고 심지어 당신 자신을 훨씬 뛰어넘는, 세력들과 접촉하는 것을 말한다. 설사 당신을 안내하는 현명한 교사가 있더라도 이 교사조차 이 계시가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 알 수 없다.
이 계시는 본질적으로 신비롭다. 왜냐하면 계시는 세상 안팎의 힘들, 개개인의 안팎에 있는 힘들과 연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기 내면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과정, 자기 생각뿐만 아니라 우주의 큰 힘들과도 보조를 맞추는 과정에 참여할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실제로 자신의 진보를 판단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긴 여정이고 높은 산을 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행 중 어느 시점에서든, 당신은 여행이 절망적이라고 느낄 수 있다. 아무런 진전도 없고, 여전히 예전과 다를 바가 없다고 느낄 수 있다. 여행은 계속되고, 당신은 낙담하며, “도대체 이것이 정말 가치 있는 것인가? 내가 왜 이것을 하지? 나는 경력을 쌓을 수도 있고, 부를 쌓을 수도 있고, 배우자를 구할 수도 있는데, 왜 이것을 하지?”라고 생각한다. 당신이 이것을 하는 것은 당신 내면의 앎이 이것을 하도록 당신을 이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신비한 힘인 앎이란 무엇인가? “왜 나에게 필요한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데 나는 앎을 활용할 수 없는가?” 왜냐하면 앎은 이성보다 더 크고 순수하므로, 당신은 앎을 자원으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당신은 신성한 힘들과 접촉할 것이고, 인간의 논리와 이성이 가진 한계를 넘어설 것이며, 단순히 자신이 직접 정한 목표 너머로 나아갈 것이다.
당신 삶에서 일어나는 정말 큰 모든 사건, 단순히 당신이 직접 계획한 개인적 성취가 아니라, 실제로 큰 것들, 다시 말해 당신에게 올 큰 관계, 깊은 통찰, 큰 전환점, 큰 문턱, 이런 것들은 당신이 예측할 수 없다. 이런 것들은 단순히 의지력의 산물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당신 내면에서의 깊은 결합에서 비롯된 것이며, 목적·운명과의 깊은 연결, 당신을 세상에 파견한 이들, 당신이 이곳을 떠날 때 당신을 맞이하려고 기다리는 이들과의 깊은 연결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서 당신은 외적으로는 현실적이어야 하고, 내적으로는 신비를 따를 수 있어야 한다.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어떤 것을 따르는 동안, 당신은 자기 일을 잘 처리하고, 재정을 관리하고, 책임을 다하고, 필요한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당신은 신비에 자신을 완전히 내맡겨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당신은 여전히 세상에서 자신을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신에게는 책임이 있고, 일정이 있으며, 필요한 것들이 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 합의한 것들이 있고, 그중 일부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
당신은 이제 두 현실에서 살 것이다. 하나는 발현된 현실이고, 다른 하나는 신비의 현실인, 이 두 현실에서 동시에 살 것이다. 그래서 당신 삶에서 안정을 유지하고, 외적 현실이 당신을 압도하거나 진척을 방해하지 않도록 외적으로 열심히 일하고 책임감을 가져야 하지만, 동시에 본질적으로 신비로운 길을 따를 것이다.
당신은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알므로 참여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준비에 전념할 것이다. 왜냐하면 준비에 전념해야 한다는 것이 당신에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당신에게 있는 유일한 이유, 정말 필요한 유일한 이유이다.
여기서 당신은 어떤 것을 해야 한다거나 시작해야 한다는 느낌이 들 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것은 중요하다. 앎이 그 과정에서 당신을 안내할 것이다. 앎은 당신이 길을 벗어나지 않도록 잡아주고, 곤란하고 대가가 큰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당신을 제지한다. 앎은 당신의 큰 사명이나 목적과 무관한 사람이나 활동에 당신 삶을 내주지 않도록 당신을 제지한다.
철학적으로나 형이상학적으로 이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거나, 거쳐야 할 모든 단계를 정말로 이해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착각에 빠진다. 사람들은 실제로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여정을 이해하려면, 당신은 자신의 이념이 아닌 앎의 안내를 받아 참여해야 한다.
이때 당신은 자신의 삶에 큰 힘들이 있고, 맡아야 할 큰 책임들이 있다는 것을 인지한다. 그럼으로써 당신은 항상 겸손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과정은 당신 너머, 세상 너머, 우주 너머에 있는 힘들이 당신을 위해 창조했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큰 힘들은 미로를 통과하도록 당신을 안내할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의 한계에서 벗어나게 하고, 당신의 약점에서 벗어나게 하고, 도중에 다른 이들과 위험하면서도 부적절하게 참여하는 것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다. 이 모든 과정에서 당신은 힘을 얻고, 통찰력을 얻고, 지혜를 기르고, 앎의 경험을 강화하고, 앎의 격려와 앎의 제지에 응답하고, 앎의 경고와 안내에 귀 기울일 것이다.
당신은 이렇게 하는 법을 배워 당신 마음의 온갖 교묘한 책략과 속임수, 즉 사회적 조건화, 방어기제, 자기기만에서 앎의 안내를 분리할 것이다.
당신이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계획을 세울 수는 없으며, 자신을 자유롭게 하고 동시에 깨우치게 하는 과정을 설계할 수는 없다. 당신에게는 폭넓은 경험이 없다. 당신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당신이 가는 곳은 미지의 영역이고, 합리적인 과정이 아니며, 철학적 추구가 아니다.
앎으로 가는 계단을 공부하기 시작하면, 당신은 이 공부가 왜 중요한지 나름 감을 잡는다. 어쩌면 당신은 내면에 큰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고서, 큰 마음과 연결하려고 하고, 큰 마음이 당신 삶을 지금까지의 삶보다 훨씬 더 좋게 할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괜찮으며, 어쩌면 필요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넘어, 당신의 참여 능력, 동기, 과정 자체는 당신의 이해를 넘어설 것이다.
앎으로 가는 계단은 앎과 공명하고 조화를 이루도록 사고하는 법을 당신에게 가르쳐 줄 것이다. 하지만 이것 이상으로, 앎 자체와의 연결을 구축하게 할 것이고, 여기에서 당신 마음속에 있는 내면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당신의 내적 삶과 외적 삶에 영향을 미칠 다양한 변화의 과정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당신은 이러한 것들을 예측하거나 예견할 수 없다. 당신은 자신이 진입하는 영역을 모르므로 통제할 수 없다. 당신은 이 과정에서 얻게 될 기량을 지니고 있지 않다. 당신은 배우는 이 과정, 잘못 배운 것을 버리는 이 과정이 어떻게 진행될지 모른다.
여기서 당신은 매우 인내해야 하고, 끈기가 있어야 한다. 큰 산을 오를 때, 열 걸음마다 멈춰서 “아직 멀었나?”라고 물어서는 안 된다. 그저 계속 나아가면,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더 높이 올라가고, 더 멀리 갈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당신이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여행이다. 그래서 당신은 이 여행이 무엇을 요구할지 모르고, 구불구불한 길이 얼마나 많을지 모르며, 여행 도중에 당신을 이 길에서 끌어낼 유혹과 끌림이 얼마나 많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재정적 안정을 원하고, 사랑과 로맨스를 원할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 인정을 원할 것이다. 도중에 매우 많은 것이 당신을 길 밖으로 불러내고, 끌어당길 것이다. 그리고 그것도 여행의 일부이다.
만약 당신이 이러한 끌림을 인식하고 그 끌림에 굴복하지 않는다면, 앎은 당신 내면에서 더 강해질 것이다. 앎은 당신의 결정을 압도할 정도로 강력한 힘이 되어, 당신은 무엇을 해야 할지 매우 분명하게 알 것이다. 이 명확성은 당신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 것이고, 당신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나올 것이다.
당신이 이 여행을 시작한다면 계속 끝까지 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당신이 여행을 계속하는 동안, 뒤로 돌아갈 수 있는 다리들은 불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가치관이 바뀔 것이고, 우선순위가 바뀔 것이다. 이제 당신은 자극보다는 고요를 추구할 것이고, 미모나 매력보다는 다른 사람들과의 정직한 관계를 추구할 것이며, 다른 사람들과 오락을 함께하기보다는 진정한 결합을 추구할 것이다. 당신의 추구는 더 정직하고, 더 성실하고, 더 진정성 있고, 자신의 실제 본성에 더 충실할 것이다.
어느 순간이 되면, 당신은 사소한 일, 사소한 관심사를 추구하는 사소한 삶이나, 다른 사람들과 사소한 대화를 하는 사소한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알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지금까지 살아온 곳 너머에 있는 미지의 영역으로 나아가야 한다.
당신 뒤에는 더이상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당신은 돌아가서는 안 된다. 당신은 더 나은 것을 알고 있으니, 다시 돌아가서 과거의 삶을 되살리고, 그 안에서 행복하고 안전하게 삶을 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자신이 쌓은 지혜를 되돌릴 수 없다. 이제 당신은 지금까지 여행하면서 자신에게 드러난 진실을 숨길 수 없다.
실제로 엄청난 갈등과 고통에 빠지지 않고는 되돌아갈 수가 없다. 당신은 계속 나아가야 한다. 당신은 목표가 무엇이든 그 목표에 도달해야 하며, 이 산이 얼마나 높든, 이 산을 올라가야 한다. 당신은 이 안내가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든, 이 안내를 따라야 한다.
모든 위대한 성인, 인류에게 공헌한 모든 위대한 이들은 이와 같은 여행을 해야 했다. 이 여행은 교육 기관이나 대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지만, 신비롭고 심오하며 필수적인 교육이다.
결국 모든 사람은 정신을 차릴 것이며, 자신이 고통받고 있고, 그 고통의 원인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제거하려는 이 결정은 먼 미래가 될 수도 있다.
당신은 지금 이 결정을 존중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러지 않았다면 이 글을 읽거나 이 메시지를 듣지 않을 것이며, 여전히 세상에서 헤맬 것이다.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끊임없이 바쁘고, 끊임없이 자극을 받고, 자신을 피하고, 다른 사람들을 피하고, 자신의 깊은 경험을 회피하고, 자신의 깊은 느낌을 회피하고, 노예처럼 바쁘게 뛰어다니며 내몰릴 것이다.
그러나 이제 당신은 그런 상태가 아니다. 당신은 다른 길을 선택하는 과정에 있다. 즉 당신 자신이 만든 길이나 직접 만들려고 하는 현실이 아니라, 큰길, 모든 길 중 가장 큰길, 모든 종교의 핵심, 혼이 추구하는 것, 가장 본질적인 교육을 선택하는 과정에 있다.
당신은 외적으로 현명하고 실용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 주변 세상은 당신의 여행을 방해하고, 그 길에서 당신을 끌어낼 것이다. 당신은 내적 계시가 계속될 수 있도록 외적 일들을 관리해야 한다.
앎은 당신을 어딘가로 데려갈 것이며, 한 삶에서 빼내어 다른 삶으로 데려갈 것이다. 앎은 당신의 약점을 드러내어 다시 선택하는 힘을 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강점을 기르고, 당신 자신을 위해서나 다른 사람들의 안녕을 위해서 그 강점을 행사하는 모든 기회를 당신에게 제공할 것이다.
당신은 아무것도 가정하는 일 없이 하나하나 배우면서 이 과정을 거쳐야 한다. 깨달음에 대한 당신의 관념을 잊으라. 성자가 되겠다는 생각도 잊으라. 영성에 대한 당신의 이런 낭만적인 이상을 모두 잊으라. 이 여행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니다.
당신이 겪는 모든 일이 훌륭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큰 산을 오를 때, 당신은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밟으며 나아갈 것이다. 그 길은 계속 이어진다. 당신은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다. 하지만 산을 절반쯤 올라간 어느 지점에서, 정말로 다시 내려가서 지금까지 온 것을 모두 되돌리고 싶은가?
당신은 지금 있는 곳에서 잠시 야영을 할 수는 있지만, 그 여행은 여전히 당신을 기다리고 있으며, 당신은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당신 마음은 여전히 불분명하고 구름과 어둠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당신은 여전히 다양한 설득과 유혹에 자신을 쉽게 내어주는 경향이 있고, 여전히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여 있으며, 여전히 다른 사람들에게 힘을 내주고, 자신과 타협하는 것으로 힘을 잃는다.
따라서 중간에 멈춘다면 평화나 해결책은 없다. 설사 당신 삶이 나아지고 있을지라도, 당신은 “나는 이제 도착했어. 이 정도면 충분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불안정한 이성에는 그것이 충분할지 모르지만, 혼에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절반만 가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당신은 끝까지 가도록 설계되었다.
모든 사람은 발견하고 성취해야 할 큰 목적과 특정 일들을 세상에 오기 전에 부여받았다. 이것들은 각자의 내면에 있는 앎 안에 심어져 있으며, 앎은 그들이 삶에서 이 큰길을 걷기 시작할 만큼 충분히 자유롭고, 충분히 성숙하고, 충분히 응답할 수 있을 때를 기다리고 있다. 어쩌면 그들은 젊을 때 시작했을 수도 있고, 중년에 시작했을 수도 있으며, 삶의 후반기에 시작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시작해야 할 지점에 도달했다.
여행이 쉽지 않은 것은 여행이 너무 힘들어서가 아니라, 당신이 규정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영역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 사실을 감당하기 매우 어렵다. 본질적으로, 이 산의 정상까지 구불구불한 길을 올라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당신은 단지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면서, 필요한 준비물을 갖추고, 자신이 그러한 여행을 지속할 수 있을 만큼 외적인 일을 충분히 관리하기만 하면 된다.
여행은 어렵지만, 힘들지는 않다. 여행이 힘들어 보이는 것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싸우고, 계속해서 자신이 통제하려고 하고, 자기 의심과 싸우고, 쉽고 즐거워 보이는 것에 이끌리기 때문이다. 단지 타협과 속박의 삶일 뿐인 편안한 삶, 안전이 보장되는 삶에 이끌리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그런 삶을 선택하고 있다. 당신은 왜 그런 삶을 선택하지 않는가? 당신은 왜 이렇게 신비롭고 혼란스러운 이 모든 과정을 스스로 겪고 있는가?
당신이 이것을 하는 이유는 해야만 하기 때문이고, 당신에게 해야 하는 일이 있고 당신은 그것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앎이 당신의 동기이고, 당신의 이유이며, 당신의 확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행하는 내내 계속 울고 소리치며 불평한다.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것이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미래에 있을, 알 수 없는 큰 것을 위해 겉보기에 멋진 것들을 포기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왜 그렇게 하는지 끊임없이 물을 것이다.
그런데 앎은 그들에게서 가치 있는 것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앎의 인도가 없었다면 그들이 스스로 갔을 곳, 문화가 그들을 이끌었을 곳, 사회적 조건화가 그들을 이끌었을 곳에서 그들을 끌어낼 것이다. 따라서 자주 멈췄다가 다시 시작하고, 자신을 의심하고, 되돌아가고, 자신에 대해 의문을 품을 것이다. 그래서 여행이 매우 힘들어 보인다. 그렇지만 그 여행 자체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앎이 없이 사는 것, 즉 확실성도 없고 명확한 목적도 없고 진정한 영감도 없이 사는 것은 힘들고 고단하다. 그 삶은 힘들고 고단하며, 결국 그 어떤 것도 내놓지 않는다. 당신은 의미 없는 것을 위해 일하고, 희생할 것이다. 그리고 실패할 것을 선택할 것이고, 자신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에 불충분하거나 부적절한 것을 선택할 것이며, 자신이 꼭 가야 할 곳에는 결코 함께 갈 수 없는 관계를 선택할 것이다. 당신은 자기 의심과 불안감으로 인해 자신을 제지하는 타협을 할 것이며, 여기에는 좌절과 실망만 남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모든 것을 얻고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여기에서 당신은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삶에서 자신에게 있는 힘과 강점의 근원에서 얼마나 분리되었는지 안다. 이것이 분리의 문제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이성에 지나치게 많이 투자하는 것은 자신의 진정한 본성과 단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보상하려고 노력하므로, 자신에 관해 대단히 부풀려진 관념이 있고, 삶에 관해 대단히 부풀려진 관념이 있으며, 영성에 관해 대단히 부풀려진 관념이 있다. 그리고 깨달음이나 해탈 등 이 모든 것에 관해 부풀려진 관념이 있다. 왜냐하면 자신의 깊은 본성에 연결되지 않음, 즉 자기 내면에 있는 앎의 힘과 현존에 연결되지 않음을 보상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비한 여행을 하지 않고 이해하려고 한다. 하지만 당신은 그 여행이나 그 여행에서 드러나는 것을 대체할 수는 없다. 당신은 안전과 안정을 위해 자신의 관계와 일에서 스스로 타협하면서 단순히 이해하려 하는 것으로는 삶의 가장 큰 경험들에서 드러나는 것을 대체할 수 없다. 이런 타협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당신은 산 아래에 앉아서 자신이 산을 이해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당신에게는 자신을 만족스럽게 해주는 생각들로 가득 찬, 지나치게 발달한 이성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사실은 당신이 여행을 시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신은 길가에서 편안하게 있기 위해 경주에서 빠져나왔다. 이때부터 당신은 상상 속에서 여행하거나, 관념의 수준에서 여행할 것이다. 당신은 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이고 세련된 사람이 될 것이며, 다른 사람들과 훌륭한 토론을 벌이고 심오한 책을 쓰고 학문적 활동에 참여할 것이다.
혹은 그저 자신만의 개인적 우주관을 지어낼 것이다. 서로 관련이 없는 당신의 생각과 느낌, 불만과 목표를 하나로 붙이고, 실제로는 어울리지 않는 이 모든 것 사이에 어떤 일관성을 만들려고 하면서, 삶을 단순한 정의, 단순한 관념에 끼워 맞추려고 애쓸 것이다.
당신은 길가에 앉아 환상을 품고, 정당화하고, 타협할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가정하거나 결론 내리거나 개인적으로 거창하게 선언하지 않고, 그저 여행을 떠나기만 하면 된다.
당신은 사회가 이 여행을 존중하지 않을 것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당신은 이것으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할 것이고, 찬사를 받지 못할 것이다. 설사 이 여행에서 큰 목표를 달성하더라도, 여기서 찬사를 받는다면, 그것은 모두 잘못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당신을 이용하려 할 것이며, 당신을 칭찬하겠지만 당신의 진정한 성취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영광에는 영광이 없고, 찬사에는 성취감이 없다. 그것은 오히려 부담과 골칫거리가 되며,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온갖 잘못된 이유로 당신과 함께하고 싶어 하고, 온갖 잘못된 이유로 당신을 소중하게 여기며, 자신의 개인적 자원으로 당신을 이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중이 위대한 교사를 만나기 위해 모이지만, 그들은 교사가 진정으로 그들에게 제공하는 것인 여행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들은 교사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 교사가 하는 말은 잘못 해석되거나 혼란스럽게 한다. 그들은 교사가 개인적으로 이룬 성취의 혜택을 보고 싶어 하지만, 정작 그 혜택을 받아들이거나 이해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개인적 계시란 무엇인가? 그것은 개인의 성취인가? 아니면 삶의 큰 힘들과 다시 결합하는 것인가? 신의 창조물로의 복귀, 포함으로의 복귀인가? 바로 여기에 영광이 있고, 바로 여기에 행복과 성취가 있다.
그러나 산 아래에 있는 분리된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을 이해할 수 없다. 이것들은 훌륭하고, 영광스럽고, 신성하게 들린다. 그러나 산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경험할 수 없다. 그들은 이 음식을 먹을 수 없고, 이 지혜를 소화할 수 없다. 그래서 교사는 모든 사람을 산 위로 데려가고 싶어 하고, 모든 사람은 교사가 산에서 내려와 함께 있기를 원한다. 그래서 목적이 상충하고, 진정한 만남은 드물다.
진정한 교사는 세상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한다. “이 모든 사람 중에서 진정한 학생은 누구인가? 자신을 미치게 하지 않고, 첫 번째 어려움이나 첫 번째 큰 끌림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고, 이 여행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진정한 지혜를 얻고 큰 관계에 참여할 수 있는 인내와 끈기가 누구에게 있는가? 누가 단순히 개인적 만족을 얻기 위한 일이 아니라 삶의 높은 목적을 나타내는 결합인,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진정한 결합을 할 준비가 되었는가? 누가 그저 일시적으로 마음에 필요한 것들이 아닌, 혼에 절실히 필요한 것을 기꺼이 따를 수 있는가? 누가 단지 영적 공부에서 도피처를 찾으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외적 의무에 기꺼이 책임질 것인가? 정말로 신뢰할 만한 사람은 누구인가? 자신의 강점을 구축하고 약점을 관리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정말로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여기 있는 이들 중 누가 실패하지 않을 것이며, 누가 영적 힘들이 그들에게 쏟을 모든 위대한 투자를 받아들이고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인가? 누가 이 투자를 받을 자격이 있는가? 누가 진정한 가능성을 보여주는가? 결국 세상에 큰 공헌자가 될 사람은 누구인가?”
교사에게는 이것이 문제이므로, 여기서 심지어 인정이나 찬사도 공허한 것이다. 사람들이 겉으로만 관심을 보이고 헌신하는 것은 이제 오히려 더 큰 문제이다. 이 가르침에 진정한 감사의 마음이 없다. 사람들은 전혀 나아가지 않으면서 자신이 진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지금 모든 것을 가지려고 한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소비 행위와 같다. 마치 영적 통찰, 영적 힘, 영적 인정을 얻으려고 쇼핑하는 것과 같다. 모두가 훌륭한 교사, 성자,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당신이 진보하거나 진보하지 못할 때, 당신 삶을 지켜보는 내면의 교사들이 이런 식으로 바라본다. 똑같은 도전과 좌절을 그들도 경험했다. 당신이 끊임없이 자기 생각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항상 하찮은 일들이나 유혹에 이끌리고 자신의 진정한 동기를 끊임없이 의심하는 것과 같다.
교사들은 당신에게 신호와 단서를 줄 것이며, 당신은 그중 90%는 놓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다른 일에 너무 사로잡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이 바로 안내자인 교사에게 과제이자 좌절이다.
여행은 실재하며, 순수하다. 당신이 직접 여행을 창안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여행을 따르거나 따르지 않는다. 여행은 크고 신비하지만, 매우 확실하다. 만약 산을 계속 오르면, 당신은 수목한계선보다 더 높이 올라갈 것이다. 그러면 삶의 더 큰 파노라마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모든 것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음이 분명하게 보이는 지점에 도달했으므로, 모든 것의 관계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전에는 이러한 것을 볼 수 없어서, 그렇게 큰 계시를 개념적으로만 이해했다. 당신은 그 관계를 상상하려고 할 수밖에 없었지만, 당신의 상상은 결코 그 현실과 맞지 않을 것이다.
계속 나아가다 보면, 당신은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약함에서 벗어나고, 내면의 갈등에서 벗어나고, 타인의 지배와 설득에서 벗어나고, 힘을 얻고, 용기를 얻고, 결의를 얻고, 지혜를 얻고, 여행이 정말로 어떤 것인지 배울 것이다. 그래서 언젠가는 자신이 이 여행을 해보았으므로 누군가를 안내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미지의 구름을 통과했으며, 자신을 강하게 의심하고 크게 실망하는 시기를 겪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보았으며, 힘을 얻었다. 당신은 자신을 옭아맨 족쇄와 사슬을 벗어버렸다. 당신은 이 일을 해봤기 때문에 이해한다.
따라서 개인적 계시는 어느 날 갑자기 지혜롭고 명쾌하고 강하고 결단력 있는 상태로 깨어나는 것이 아니다. 마법의 약을 먹거나, 신이 당신 앞에서 요술 지팡이를 흔드는 것과는 다르다. 만약 당신이 어리석고 게으르고 나태하고 쉽게 속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이러한 능력과 강점을 가질 수 없다.
신은 요술 지팡이를 휘둘러 당신을 당신이 아닌 어떤 것으로 바꾸지 않는다. 당신은 어느 날 갑자기 위대해지거나, 어느 날 갑자기 명료해지지 않으며, 어느 날 갑자기 현명해지지 않는다. 이것은 당신이 돈을 지불하여 물품을 구입하거나 서비스를 받는 가게에서 쇼핑하는 것과는 다르다. 세상의 모든 돈을 다 줘도 이것을 사지 못할 것이다.
해야 할 여행, 올라가야 할 산, 도달해야 할 목적지, 거쳐야 할 과정이 있다. 그것은 현실이고, 어떤 것보다도 더 현실적이다.
당신이 이생을 떠나면, 영적 가족은 당신이 이 여행을 했는지, 얼마나 멀리 갔는지 보기 위해 당신을 기다릴 것이다. 그들은 당신의 성공과 실패에는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고, 당신의 개인적 비극에도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며, 당신의 실패한 로맨스에도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개인적으로 얼마나 많은 부를 쌓았는지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며,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았는지, 찬사를 받았는지에도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여기서 그 차이가 보이는가? 이것이 바로 당신에게 모든 것이 달라지게 할 차이이다.
당신의 혼은 당신이 이곳에 온 큰 목적을 발견하고 성취하기를 갈망한다. 이렇게 하려면, 당신은 이 엄청난 준비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과정은 신이 창조했고, 큰 힘이 관리하며, 속임수나 조작 너머에 있다. 당신이 조작할 수도 없고, 변질시킬 수도 없다. 당신은 성공하거나, 아니면 실패하며, 그 길을 따라 올라가거나, 아니면 다른 길로 빠진다. 당신은 앎을 따르거나, 아니면 다른 것을 따른다.
만약 조급하면, 당신은 사랑, 로맨스, 동반자 관계, 성공 등 모든 것을 지금 가지려고 할 것이다. 당신은 광적인 추구와 위험한 참여와 어리석은 결정에 자신을 내주고 결국 실망과 좌절만 하게 될 것이다. 설사 당신이 유명하고 부자가 되더라도, 당신 삶은 공허하고 무의미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앎의 부름 및 혼에 절실히 필요한 것에 응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랑의 선물이다. 그리고 당신을 구원하고, 끝없는 고난에서 당신을 벗어나게 하고, 개인적인 패배에서 당신을 벗어나게 하고, 중독·우울·분노·원한에서 당신을 끌어올리기 위해 여기에 있다. 이것은 당신 삶의 목적, 의미, 방향을 알려는 당신 기도에 대한 신의 응답이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큰 목적을 발견하고 성취하기 위해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오직 앎만이 당신을 그곳으로 데려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 가려면, 당신은 앎길을 따르고, 실천하며, 앎길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제 당신의 안내자는 앎이지, 자신의 이성이나 타인의 이성, 사회가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가치관, 타인의 기대, 당신 배우자의 요구가 아니다. 당신은 여기서 큰 부름에 응답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부름 자체가 창조한다.
사람들이 조급한 것은 자신이 주도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확실히 얻고 싶어 하며,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조건화된 것에 부합하고 자신의 문화나 사회에서 거는 기대에 부합하기를 원한다. 따라서 그들의 동기는 모두 잘못되었다. 그들의 동기는 해결책이 아니라, 잘못된 동기, 잘못된 목표, 잘못된 접근 방식, 잘못된 이해 등 모든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그들은 심지어 신, 종교, 복원이라는 미명 아래에서도 개인적인 추구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부와 쾌락을 추구하는 상인과 다르지 않으며, 다른 상품과 서비스를 소비하는 다른 소비자들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이제 단지 다른 옷을 입은 부와 개인적인 찬사일 뿐이다.
이것은 당신의 목표도 운명도 아니다. 당신은 세상에서 길을 잃고 헤매려고 세상에 파견된 것이 아니다. 욕망과 두려움의 세상, 혼란과 좌절과 실망의 세상에서 길을 잃고 헤매려고 파견된 것이 아니다. 당신이 이곳에 온 큰 목적을 찾지 못한다면, 세상은 실망스러운 곳이다. 세상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줄 수 없다. 하지만 당신은 세상에 절실히 필요한 어떤 것을 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을 동식물과 구분하는 것이며, 다른 모든 생명체와 구분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행은 단순한 끌림이 아니다. 이것은 부름이며, 응답하라고 당신의 깊은 내면에 있는 어떤 것을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당신의 욕망이나 야심, 비난, 두려움에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큰 부분, 깊은 본성에 말한다.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이 응답할 것이다. 그래서 이 부름과 응답은 여행 내내 계속되며, 당신이 앞으로 나아갈수록, 다른 것에 빠지지 않고 계속해서 신비를 따르는 것을 선택할 때마다 더 강해진다.
이것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속임수와 타협의 삶, 부정과 좌절의 삶을 살려고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쉽다. 이것은 당신 내면에 살아 있는 앎을 지닌 당신에게 신이 준 선물이다.
앎이 없으면 당신은 응답할 수 없고, 그런 여행을 할 힘을 찾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앎은 당신 내면에 있다. 그리고 당신은 앎이 제공하는 계단을 밟을수록 앎은 당신 내면에서 더욱 강해질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세상에 있는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편안함과 안정감을 찾을 것이며,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얻을 수 없는 깊은 관계를 특정 사람들과 맺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가장 큰 선물을 줄 수 있는 곳을 찾을 것이며, 이러한 상황이 이전에는 당신이 혼자 힘으로 찾을 수 없었던 선물을 당신에게서 끌어낼 것이다.
여기서 하는 말들은 단지 당신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가슴과 깊은 본성을 향해 하는 말이다. 당신은 아직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여행이 어떤 모습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괜찮다. 아무도 이것을 진정으로 알 수는 없다. 당신은 이 여행을 해야만 하므로 하는 것이지, 이 여행을 통해 당신이 원하는 어떤 것을 얻을 것으로 생각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격려는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 길에 당신을 계속 있게 하는 것, 당신 삶에서 당신을 계속 나아가게 하는 것, 타협하지 말아야 할 것과 타협하지 않게 하는 것, 다른 것에 당신 삶을 내어주지 않게 하는 것은 바로 앎의 힘과 현존이다.
신과 앎 사이의 바로 이 신성한 관계가 앎을 깨울 수 있고, 당신을 앞으로 나아가도록 이끌 수 있으며, 당신의 진정한 힘을 회복할 수 있고, 당신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이나 모든 생명체와의 큰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