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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shall Vian Summers
on 5월 22,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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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5월 22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가
받다

사람들은 인류에게 무엇이 다가오는지 알고 싶어 한다. 그들은 안심하고 싶어 하고, 자신이 세상에서 투자한 것이 안전한지 알고 싶어 하며, 자신이 기대한 것이 맞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 그리고 진실을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두려움을 가라앉히고, 인류의 미래에 대해 느껴질 수도 있는 불안이 커지는 것을 완화하려고 한다.

그들은 그 순간의 문제들에 집중한다. 그 문제들은 이해할 수 있어 보이고, 어쩌면 해결할 수도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큰 문제들은 혼란스럽다. 그들은 큰 문제 앞에서 나약하고 무력하다고 느끼고, 전문가가 누구이든 간에 전문가에게 맡길 것이다. 또는 자신이 독실한 신자이므로 신의 섭리가 자신의 미래를 보장해 줄 것으로 생각한다.

눈앞의 상황을 훨씬 뛰어넘어, 오늘이나 내일, 다음주나 몇 달 뒤의 일들을 훨씬 뛰어넘어, 더 멀리 나아가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물론 그들에게는 자신의 계획이 있지만, 그들은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이 새들에게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었듯이 인간에게도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었다. 새들은 지켜보고 귀 기울이며, 들짐승도 지켜보고 귀 기울인다. 그러나 지적 생명체, 양심 있는 생명체는 전혀 이렇게 하지 않거나 양가적이다.

신은 신호를 보낸다. 세상은 세상의 상태와 방향을 보여준다. 하지만 누가 그것을 볼 수 있는가? 누가 응답할 수 있는가? 누가 용기와 자신감을 가지고 큰 규모의 불확실성을 마주할 것인가? 게다가 답도 없고 모든 것이 잘되리라는 보장도 없고 자신의 선호를 옳다고 말하는 일 없이, 또 과거에 투자한 것이 미래에도 유효할 것이라고 굳게 생각하는 일도 없이, 마주할 것인가?

사람들은 많은 것을 원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이전에 자신이 투자한 것을 지키거나, 원하는 것을 더 많이 얻으려는 것이다. 누가 죽음의 불확실성을 보고 알고 직시하기를 원하는가? 사람들은 스스로 확신하는 말이나 국가 지도자들이 확신하는 말에 의존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보들의 천국이고, 거짓 희망이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닥치는 재앙은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문제의 징후도 있었고, 돌이켜보면 되새길 만한 신호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가오는 신호를 보지 못했다. 그들은 건강의 큰 변화, 경제의 큰 변화, 근무 조건이나 직장의 큰 변화, 관계의 큰 변화, 지역사회의 큰 변화를 보지 못했으며, 다가오는 변화를 예측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결과뿐만 아니라 그 결과에서 오는 충격으로도 고통받는다. 그들은 화내고, 좌절한다. 그리고 정부나 지도자나 부자들에 대해 불평하거나, 자신의 곤경과 딜레마에 책임이 있어 보이는 사람이 누구이든 그에 대해 불평하지만, 실제로 그 원인은 보지 못하고 대응하지 못한 데 있다.

날짐승이나 들짐승은 괜찮다는 보장이 없으므로 항상 환경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문제없다고 말하는 마음, 그렇게 지켜보고 경계할 필요가 정말 없다고 말하는 마음이 없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이 문제를 대신 해결해 줄 것이라고 말하는 마음도 없다. 그들에게는 미래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 소유하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 거절에 대한 두려움, 부상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 두려움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마음도 없다.

그들은 미리 알아야 하는 부담이 없으며, 미래나 과거에 대한 인식이 없다. 그리고 과거를 보상하려고 하면서 후회하며 살지 않는다. 그들의 삶은 단순하고 기본적이지만, 더 지적인 생명체가 발휘하고 되찾아야 하는 어떤 것을 실연한다.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통찰력과 알아차림과 경계심을 잃어버렸다. 이것들은 삶을 성공적으로 사는 데 필요하고, 큰 자신감과 확신을 얻는 데 필요하다. 이 확신은 자신이 저승에서 왔으며, 이곳에서의 여행은 다음 단계를 위해 자신을 준비시키기 위한 것일 뿐으로 일시적임을 깨닫는 데서 온다.

당신의 확신은 무지가 아니며, 단세포적인 마음이 아니다. 당신의 확신은 지성의 부족이 아니라, 창조주가 당신에게 준 깊은 마음, 영원한 마음, 두려움이 없는 마음, 앎의 마음이라는 큰 힘과 큰 능력이다.

미래와 과거를 인식하는 것으로 당신은 엄청난 두려움과 불안에 취약해지며, 후회와 슬픔에서 오는 부담, 비탄과 자기 비난에서 오는 부담에 취약해진다. 그것은 마치 마음이 폭군이면서 동시에 끔찍한 짐이 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 사회적 마음, 이 세속적 마음의 표면 아래에는 앎이라는 깊은 마음이 있다.

만약 당신이 알아차리고 지성적이 되려면, 또 미래를 계획하고 놀라운 것들을 창조하고 자기 삶을 바꾸고 세상 모습을 유익하게 바꿀 수 있으려면, 자신을 안내할 이 큰 힘이 자신에게 있어야 한다. 이 큰 힘이 안내하지 않으면, 당신은 너무 두려워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한 채, 큰 힘이 두려움과 불안의 부담만 가중할 뿐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자신은 옳고 괜찮을 것이라는 온갖 생각 아래 도사리고 있는 불안과 무력감과 절망감만 키울 것이라고 두려워할 것이다.

낙관적인 사람들조차도 여전히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의 낙관주의는 보고 듣고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며, 자신의 상태와 환경, 수평선 너머에서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리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그 순간 기분이 나아지기 위해 그들은 현실을 보지 않고 자신에게 문제가 없음을 선택하며, 이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들에만 귀 기울이는 것을 선택한다. 일시적으로는 그들이 휴식을 찾은 것처럼 보이고, 더 잘 알아차리는 사람들만큼 비참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거나 겉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곤경은 동일하며, 자신의 태도가 자기 삶의 상황을 바꿀 것으로 정말 생각한다는 사실로 인해 더욱 복잡해진다.

큰 신뢰는 깊은 곳에서 나와야 하며, 이 신뢰가 자신감과 힘과 결의를 낳는다. 이 자신감과 힘과 결의는 믿음이나 자제력보다 훨씬 더 크며, 부정과 환상과 두려움 속에 살면서 자신이 원하거나 기대하는 방식으로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

당신이 앎의 힘을 얻어 앎이 당신을 인도하도록 허용하고, 끊임없는 두려움과 불안에 대한 부담 없이 보고 들을 수 있는 눈과 귀를 당신에게 주도록 허용할 때까지는, 지성과 인식은 큰 부담이다.

인류 문명은 벼랑 끝에 서 있다. 당신이 직면하는 세상은 쇠퇴하는 세상, 즉 자원이 감소하고 인구가 증가하는 세상, 정치적·경제적 불안정이 점점 커지는 세상, 삶의 기초 자원이 소멸 위기에 처하고 그 자원을 구하기가 훨씬 더 어려워지는 세상이다. 하지만 누가 여기에 주의를 기울이겠는가?

일반 시민은 자신에게는 문제가 없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일반 시민은 자신의 취미·즐거움·오락에 집중하고 싶어 하며, 자신의 결정과 미래를 결정할 변하는 세상 상황을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앎으로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정·재계 지도자들, 종교 지도자들도 같은 무능력으로 고통받는다. 그들은 마치 요술 지팡이를 흔들면 자신의 국가와 민족의 진로와 방향이 바뀌기나 할 것처럼, 현재의 문제가 어떤 마법 같은 일, 즉 시장의 힘이나 정치 이념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정말 알고 있고, 앎으로 강하다 하더라도, 누구와 소통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봉사하는 사람들과 국가는 이런 말들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들은 너무 두렵고, 너무 나약하며, 준비되어 있지 않다. 이들은 단지 믿고 싶어 하고, 안심하고 싶어 하며, 다른 누군가가 자기 대신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원한다.

따라서 앎으로 강하고, 변하는 세상 상황을 보고 대응할 수 있는 지도층 인사들조차도 매우 가로막혀 있고 고립되어 있다. 그들이 지금 전하는 모든 것은 그들에게 응대할 사람들의 역량에 좌우되고 제한될 것임이 틀림없다.

국민이 눈을 감는 바보가 되고 싶어 하는데 어떻게 지도자들을 탓할 수 있는가? 그리고 생존하려고 투쟁하지 않고 자신이 가진 것을 움켜쥐고 있는 사람들은 취미, 관심사, 로맨스, 건강에 대한 자기 집착, 집 단장 등 무엇이 됐든 간에 거기에 빠져 있다. 그들은 다가오는 변화의 큰 물결, 경제 쓰나미를 보지 못한다. 그들은 해변에 살면서 라디오를 들으며 따스한 햇살을 즐기고 있다.

신의 새 계시를 듣고 준비하고 그것에 응답할 기회가 있는 당신에게는 통찰력을 얻고, 인식을 얻고, 힘을 얻고, 앎의 힘을 얻을 기회가 있다. 그러나 당신은 문화에서 한 발짝 물러나야 한다. 왜냐하면 문화는 응답하지 않고, 준비하지 않고, 통찰력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화는 길을 잃었다. 이는 큰 비극이다. 매우 많은 지성, 기량, 재능을 오용하고, 낭비하고, 잃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응답할 힘과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새로운 정당이나 다른 이념이 상황을 다르게 만들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것들은 문제를 실제로 존재하는 수준에서는 해결하지 못한다. 이는 인류가 준비할 수 있는 시간만 지연시킬 뿐이다. 당신은 주변에서 이런 모습을 모두 볼 수 있다.

사람들은 “나는 이런 것들을 알고 싶지 않아. 나는 행복하고 싶어. 이런 것들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아. 모든 것이 잘 풀릴 거야.”라고 생각하며 심지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래서 앎을 따르는 사람은 재난의 증거가 드러나기 전에 높은 곳으로 이동한다. 그들은 바닷물이 빠질 때 조개껍질을 주우며 해변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황폐해질 큰 물결에 대비한다.

동물들은 높은 지대로 이동하고, 새들은 물러난다. 그런데 사람들은 잠들어 있고, 베란다에 앉아 바닷물이 빠지는 모습을 보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해한다.

보지 않을 사람, 응답하지 않을 사람, 주위 환경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사람에게 신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평화와 평정심을 얻고, 이점을 얻고, 어려움을 피하고, 치유를 받고, 경제적 기회를 얻기 위해 신에게 기도해 보라. 보지 않고 응답하지 않을 사람에게 신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신이 제공해야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신이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을 그들은 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이 그들에게 경고하며 보내는 신호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비극이 싹튼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준비하는 것이며, 기꺼이 응답하려는 다른 사람들을 준비시키고, 경고와 축복과 준비 자체를 담고 있는 새 메시지를 그들에게 가져가는 것뿐이다.

그들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다. 그들이 계시에 응답할 수 없다면, 당신이 그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사실상 보지 않겠다고 선택한 것을 가리키려고 끊임없이 애쓰는 것뿐이다.

신이 그들에게 다가갈 수 없다면, 당신이 어떻게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겠는가? 계시가 그들의 삶을 안전하게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그들을 준비시킬 수 없다면,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굶주린 사람, 집 없는 사람, 아무것도 없는 사람, 절망적이고 궁핍한 사람이 매우 많다. 당신은 항상 그들을 돌보아야 한다. 그들은 세상에 대응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그들은 생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으며, 전 세계 많은 사람이 여기에 해당한다.

우리가 응답하지 않거나 않을 이들을 말할 때, 우리는 응답할 능력이 있고 준비할 자원이 있는 이들을 말한다. 그들이 세상의 부름에 실패할 이들이며, 가난하고 궁핍한 이들이 아니다. 가난하고 궁핍한 이들의 목표는 정치적·종교적 억압 아래에서 생존하기 위해 그날그날 필요한 것들,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충족하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자유롭거나 더 많은 자유가 있는 사람들, 더 많은 부와 자원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인류를 저버리고 자신마저 저버리는 이들이다.

당신은 신에게 구원해달라고 기도하지만, 신은 당신에게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었고, 당신을 안내하는 깊은 앎을 주었다. 그러나 당신이 이것들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신이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신은 날씨를 관리하지 않으며, 경제를 관리하지 않는다. 신은 당신 건강을 관리하지 않으며, 당신 관계를 관리하지 않는다. 신이 이런 것들을 관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을 당신의 개인적 소망이나 종잡을 수 없는 욕망을 위한 심부름꾼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한심하고, 무지하며, 오만한 것이다.

인류 문명이 실패한다면 그것은 응답할 수 있던 사람들이 응답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응답하는 소수 사람에게는 비극이다. 그들은 주위를 둘러보며 “이 상황에서 누가 나와 함께하는가?”라고 말하고, 자기 친구와 가족 중에 세상에 다가오는 변화의 큰 물결이나 외계 종족들의 개입에 직면하여 우주에서 인류가 처한 위치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누가 이 사실을 알고 싶어 하는가?

지구 정부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은 자국민을 강하게 하고 큰 변화에 대비해 준비시켜야 하지, 단순히 신을 믿기만 하면 신이 모든 것을 알아서 해결해 줄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신은 당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제공했지만, 당신이 받은 것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더 많은 것을 요청할 수 있겠는가?

신은 당신에게 힘과 선물과 기량과 지성을 주었다. 신은 당신을 안내할 두려움 없는 마음을 당신에게 주었고, 당신이 이 마음을 발견하고 직접 경험할 수 있도록 새 계시에 앎으로 가는 계단을 제공했다.

불평하지 말라. 모든 불평을 거두어 대비하는 데 집중하라. 자신의 방주를 만들고, 응답할 수 있는 사람들을 격려해야 한다. 응답할 수 없는 모든 사람에게는 그들의 안녕을 위해 기도하라. 당신이 그들의 미래를 보장할 수는 없다.

자연에서는 가장 잘 적응하는 자가 생존하고, 큰 공동체에서는 가장 현명한 자가 생존한다.

사람들은 많은 것을 원한다. 많은 사람이 이것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러나 실제로 기도는 볼 수 있는 힘, 알 수 있는 힘,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직시할 수 있는 용기, 바뀌어야 하는 것을 바꾸고 확보되어야 하는 것은 확보하는 힘을 당신에게 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당신을 섭리의 선물과 결합하는 기도이다.

신은 개별적으로 당신 삶을 다스릴 수도 없고 다스리지도 않을 것이다. 모든 우주의 주인은 현존하지만, 당신의 상황을 조종하지는 않는다.

당신은 앞으로 많은 사람이 변화의 큰 물결 앞에서 실패할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 실패는 큰 비극이며, 불필요한 일이다. 원래는 이런 식으로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신이 바라는 것과 사람들이 선택하는 것은 같지 않다. 신이 강조하는 것과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우선시하는 것은 같지 않다. 이것이 바로 딜레마이다. 이것은 우주 전체의 비극이며, 인간 가족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그래서 계시에서 앎에 대한 가르침은 매우 근본적이다. 앎은 세계 종교들에 항상 있었지만, 충분히 강조된 적은 없었다. 어렵고 예측할 수 없는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신이 당신에게 준 것이 바로 앎이라면, 앎이야말로 당신이 가진 가장 중요한 자원이다. 앎이 당신에게 있는 가장 큰 힘이며, 당신에게 확실성과 성실성, 정직과 힘을 주는 것이다.

이것을 무시하면,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가정한 것이나 상황의 겉모습에 의존하고, 본질적으로 변덕스러운 인간의 자각과 결의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즉 한순간에 변할 수 있는 모든 것, 미래를 대비해 당신을 준비시킬 수도 없고 당신의 삶, 관계, 노력을 강하게 할 수도 없는 모든 것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많은 것을 원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앎이 아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다. 혹여 알아차리더라도, 즐거운 것만 알아차리고 싶어 한다. 그들은 행복하고 황홀하기를 원하고, 영적 희열감에 빠지기를 원하며, 자신이 매우 독실한 사람이므로 신이 자신을 돌봐 줄 것으로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대비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중요한 큰 문제이다. 그리고 종교는 종교의 가장 순수한 형태와 진정한 의도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기 있다.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또 무엇이 자신에게 다가오는지 몰랐고, 삶의 현실을 직시할 만큼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인류 역사를 통틀어 죽어갔는가? 그 숫자는 셀 수 없이 많다.

당신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이 사람은 변화의 큰 물결에 대비해 준비되어 있는가?”, “이 사람은 이렇게 커지는 불확실성과 격변에 어떻게 대응하거나 어떤 상태로 있을 것인가?”라고 자문해 보라.

우주에서 지성은 적응하고 대응하려는 의지와 열망이다. 지성은 단순히 영리함, 유용한 도구를 만드는 것, 재치 있는 것, 예술 분야에서 창의적인 것이 아니다. 왜 새들은 쓰나미에서 살아남고 해변에 있던 사람들은 살아남지 못하는가? 사람들은 호텔 베란다에 앉아 있는 동안 왜 코끼리들은 높은 지대로 향하는가? 지성이란 무엇인가? 누가 지성적인가? 누가 응답할 수 있는가? 누가 대응할 수 있는가? 누가 책임지는가?

우리가 말하는 이것들이 당신 삶과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을 구할 것이다. 이것들은 엄청난 사랑과 자비의 선물이지만, 강력하게 전해져야 한다. 사람들은 잠들어 있고, 나약하며, 제멋대로 행동한다. 그들은 주변 세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깊은 본성인 자기 앎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며, 신이 드러내는 것이나 인류가 보고 알고 행동해야 하는 것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식품이 시장에 전달되지 않거나, 석유가 상당 기간 공급되지 않거나, 당신 주변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할 돈이 정부에 없을 때,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이런 일은 모두 미래 세상의 일부이다. 이런 일들이 다가오고 있다는 증거는 대단한 교육을 받지 않아도 식별할 수 있다. 당신이 도시 외곽이나 두메산골에 사는데 이동 수단이 없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이 의료 서비스를 받을 형편이 안 되고 당신을 위해 아무도 의료 서비스를 제공해 줄 수 없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것들은 까다롭고 도전적인 질문들이다. 앎을 따르는 사람이 이 질문들을 숙고하는 것은 이것들이 삶의 일부이고 세상에 다가오는 큰 변화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공포나 두려움으로 답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잘못된 결정으로 이어질 것이고, 당신은 더욱 취약해질 것이다. 그렇게 답해서는 안 되며, 답은 앎에서 나와야 한다. 밟아야 할 단계가 많다.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리면, 공포와 혼란이 있을 것이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래서 당신은 대비하기 시작하고, 폭풍이 닥치기 전에 대비해야 한다.

이것이 삶이다. 당신은 이 순간을 살면서 미래를 대비한다. 당신은 어릴 때, 성인이 될 것에 대비한다. 가정생활이 당신의 운명이라면 당신은 가정생활을 대비해 준비한다. 당신은 노후를 대비하지, 노후가 될 때까지 그저 기다리지 않는다. 당신은 정상적인 상황에서도 삶에서 일어나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다. 그것이 바로 지성이다. 하지만 이러한 대비를 할 수 있는 사람 중에도, 누가 이 대비를 충분히 할 것인가?

당신이 대비하지도, 대응하지도 못한 것에 대해 당신의 정부가 끝없는 복지와 보상을 제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당신 건강이 나빠지게 내버려두면 아무것도 당신의 건강을 되돌려주지 못할 것이다. 당신이 적절히 대비하지도, 대응하지도 못하면 당신을 구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당신의 작은 휴대용 도구들은 당신에게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경이로운 기술은 당신과 당신 주변 사람들에게 필요한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것들을 충족시키지 못할 수도 있다.

당신은 더 큰 어려움이 있는 세상에 대비하고 있다. 그 세상에서는 모든 것을 확보하고 유지하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며, 자원이 제한되고 인간의 창의력과 협력이 전례 없이 요청될 것이다. 이것은 마치 당신이 전시 사회에서 사는 것과 같다. 전시에는 모든 국민이 함께 힘을 모아 모든 자원을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여기서 전시와 다른 점은 이런 필요성이 계속 진행되고 본질적으로 그저 일시적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뿐이다.

신은 당신에게 경고하고, 대비할 것을 촉구하며, 당신의 힘과 용기와 성실함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준다. 그 원천은 당신 생각 속에 있지 않을 것이고, 당신이 가정한 것들에도 있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신에 대한 당신의 믿음에도 있지 않을 것이다. 변화의 큰 물결에 대비하지 않으면, 신앙이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모두 함께 멸망할 것이다.

신이 실제로 당신에게 제공하고 있고, 이미 제공한 것을 당신이 받아들일 수 없다면, 당신의 믿음은 당신에게 아무런 이득도 주지 못할 것이며, 오히려 당신을 더욱 눈멀게 하여 당신에게서 책임감을 빼앗고 당신의 힘과 용기를 가릴 것이다.

사람들은 진통제를 원하지만, 진정한 건강, 진정한 활력, 세상에서의 진정한 참여, 자기 내면에 있는 앎과의 진정한 결합을 선택하지 않는다. 당신이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신이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당신의 임무는 계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당신을 마비시키는 두려움과 불안을 극복하고, 당신의 내적 삶과 외적 삶을 준비하기 시작하며,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고, 당신의 상황에 명확성과 해결책을 가져오고, 당신의 영감을 빼앗는 사람들에게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응답한다는 뜻, 책임진다는(response-able) 뜻이다. 이것이 바로 신이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문화의 기억상실증에서 벗어나야 한다. 당신은 기꺼이 벗어나야 한다. 왜냐하면 인류 전체가 재앙을 향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응답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과 자신의 상황뿐만 아니라 그들 주변 세상을 위해 모든 변화를 불러올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당신의 부름의 중요성이다. 그래서 당신에게는 부름이 있다. 그래서 당신이 세상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