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온 모든 사람의 목적은 그들 내면에 신이 심어놓은 앎을 발견하는 것, 각자 공헌할 수 있는 상황과 기회를 고려하여 최선을 다해 앎을 발견하는 것임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오늘날 세상의 많은 곳에서는 이러한 기회와 상황이 매우 제한적인데, 이는 사람들이 매우 어려운 환경적·정치적 상황 속에서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그들의 종교적 믿음이 그들을 제한하기도 한다. 이것은 자신의 참되고 신성한 본성을 이해하는 데 사람들에게 큰 문제를 일으키며, 모든 생명의 창조주가 각 개인의 내면에 잠재력으로 심어놓은 깊은 지성인 앎을 발견하고 표현하는 것을 제한한다.
그러므로 건강한 결혼 환경에서 자녀를 갖는 기회는, 한 개인이 앎과 점점 더 깊이 연결하고, 심지어 어린 시절부터 앎의 힘과 현존을 경험하는 데, 진정한 이점을 얻는 기회들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 이때 부모로서 당신은 아이가 앎을 경험하고 표현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 줄 기회를 얻게 된다.
아주 어린 아이들은 종종 앎을 깊이 경험하지만, 환경에 적응하도록 강요받는다. 앎을 알아차리지도, 표현하지도 못하는 환경, 진정한 정직함을 소중히 여기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환경에 적응하도록 강요받는다. 그들은 감수성이 매우 풍부하고 민감하므로, 그들을 둘러싼 생각의 환경인 정신 환경의 온갖 강력한 영향력을 흡수한다. 그리고 그들은 힘이 없고, 자신의 인식을 분별하거나 경계를 결정할 힘이 아직 없으므로, 이러한 온갖 힘과 영향력에 노출되어 있다.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정신 환경, 격려하면서도 실용적인 지혜를 제공하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아이들이 세상에서 성공적으로 살아가고, 다른 아이들뿐만 아니라, 다른 어른들과도 잘 지내는 법을 배우려면, 실용적인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청소년이 신의 새 메시지를 배우는 것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새 메시지가 제공하는 기량을 익히는 데 참여하는 것은 중요하다. 다시 말해 앎을 경험하는 법을 배우고,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분별하는 법을 배우고, 남들의 기대보다 자신의 경험을 소중히 여기는 법을 배우고, 세상의 위험과 기회를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사람들과 어떻게 함께하는지에 대한 지혜를 기르는 것, 즉 언제 자신을 표현하고 언제 표현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지혜를 기르고, 다른 사람들이 실제로 전하는 것을 알아차리기 위해 그들에게 귀 기울이는 법이나 그들을 둘러싼 영향력을 해석하는 법에 대한 지혜를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이 모든 것은 수준이 매우 높아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만약 자신의 경험을 소중히 여기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기 내면이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해석하는 기량을 습득할 수 있다면, 사실 매우 단순하다.
여기서 어린아이에게 많은 것을 믿게 하는 것은 역효과를 낸다. 이렇게 하는 것은 인식 능력을 억제하고 마음을 틀 안에 가두기 시작한다. 그래서 어린 시절의 종교 교육은 청소년에게 매우 해로울 수 있다.
궁극적으로 사람들은 신을 찬양하거나 특정 종교의 교리나 원칙을 믿기보다는 자기 내면에 신이 심어놓은 것을 소중히 여기고 따르는 것이 필요하다.
새 메시지에서는 신이 심어놓은 것을 앎이라고 부른다. 앎은 개개인의 내면에 있는 깊은 마음이다. 당신은 이 깊은 마음을 지니고 태어났다. 당신 이성이 주변 세상이나 부모와 가족의 영향으로 형성되고 만들어지는 동안에도, 앎은 여전히 당신 내면에 살아 있다. 앎은 당신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심지어 아주 어린 시기에도 당신에게 조언한다.
어린아이를 양육하는 과정에서 당신은 그들 내면에 있는 앎을 파괴할 수는 없지만, 생각·믿음·기대로 앎을 덮어씌울 수는 있다. 또한 아이는 인간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므로, 인간의 성향도 지니게 된다. 그들은 분노를 느낄 것이고, 실망을 겪을 것이며, 질투를 느낄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좋지 않은 것들을 원할 것이며, 건강한 것과 건강하지 않은 것, 위험한 것과 유익한 것을 분별할 능력이 아직 없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지혜 훈련에 속하며, 이 훈련은 심지어 아주 어린 나이에서도 지혜를 쌓기 시작하는 데 그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아이는 완전히 온전한 앎을 지니고 태어나지만, 지혜를 배워야 한다. 지혜는 배워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이를 부양하는 초기에 가장 기본적인 수준의 지혜를 가르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과 해가 되는 것, 겉보기에 좋아 보이는 것과 실제로 좋은 것, 유익한 것과 위험한 것을 분별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안타깝게도 부모들 대부분이 스스로 이런 구분조차 효과적으로 할 수 없으므로, 자신이 아직 배우지 못한 것을 자녀에게 가르칠 수는 없다. 그래서 새 메시지에서는 자녀 교육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 왜냐하면 앎의 기반을 쌓아야 할 사람, 지금까지 쌓은 세상의 지혜가 어느 정도이든 상관없이 자신의 세상 지혜를 자신의 욕망·믿음·선호와 구분하는 법을 배워야 할 사람은 바로 부모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모를 준비시키는 것이 진정한 첫걸음이다. 왜냐하면 부모 자신이 아직 배우지 못한 것을 자기 자녀에게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만약 부모가 참된 분별력을 아직 배우지 못했고, 그 분별력의 가치를 아직 배우지 못했다면, 또 객관적으로 자기 내면에 귀 기울이는 법도,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마음을 절제하는 법도 아직 배우지 못했다면, 부모는 자녀에게 무엇을 줄 수 있겠는가? 자신의 편견과 기대, 그리고 어린 시절 자신이 어떤 짐을 짊어졌든 그 짐까지, 이런 것들뿐이지 않겠는가?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른들에게도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앎·지혜·관계·목적이다.
우리가 말했듯이, 모든 사람은 온전한 앎을 지니고 태어난다. 사실 갓난아이 내면에 있는 앎조차 완전히 온전하다. 앎은 그 사람의 목적과 방향을 담고 있다. 앎은 그 사람이 누구를 만나야 하고,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으며, 내재하는 지혜를 담고 있다. 이 지혜는 삶의 과정에서, 즉 그 사람이 삶에서 마주하거나 의도치 않게 맞닥뜨리는 많은 불확실한 사건 속에서 이 모든 것을 찾아내는 데 필요하다.
당신은 아이들에게 앎을 가르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앎을 가르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들 내면에 앎이 살아 있고, 앎으로 가는 길이 있으며, 그들이 밟을 수 있는 앎으로 가는 계단이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이 보고 느끼는 것을 소중히 여기게 하는 것이다. 매우 어린 나이에는 자신의 경험에 대한 분별력을 배우기가 너무 이르다. 먼저 당신은 자신의 경험에 주의를 기울이는 법과 자신의 경험을 소중히 여기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은 분별력보다 먼저 이루어져야 하고,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구별하는 법을 배우기 전에 이루어져야 한다.
만약 당신이 아이에게 꿈은 거짓이며, 느낌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아이는 자신의 경험을 소중히 여기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그들에게 그들의 경험은 가치 없고, 의미 없으며, 오직 문화와 종교의 지시만을 따르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가르치는 꼴이 된다.
이것은 극도로 위험하다.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 실제로 이것은 패배의 패턴을 만들어 내며, 그들은 이 패턴으로 평생을 함께 살아가야 할 것이고, 어쩌면 결코 극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아이가 자신의 경험에 귀 기울이기 시작하도록 해야 한다. 아이에게 무엇을 보았는지, 무엇을 느꼈는지 물어보라. 그리고 자신을 표현하게 하라. 비록 아이가 보고 느끼는 것이 터무니없거나 사실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아이가 자기 내면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점이다. 아이가 무엇을 듣는지는 아직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경험이 자신에게 말하는 것을 듣고, 귀 기울이고, 느끼려는 소망과 능력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평가는 나중 일이다. 자신의 경험을 분별하는 것도 나중 일이다. 만약 자신의 경험에 접근하지 못한다면, 무엇을 분별해야 하는지 알지 못할 것이며, 자신이 경험한 것과 생각한 것의 차이를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인류뿐만 아니라 다른 형태의 우주 지적 생명체 모두가 마주해야 하는 큰 문제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두 마음, 즉 생각하는 마음과 아는 마음을 지니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아는 마음은 당신의 영원한 부분이다. 이 마음은 창조주의 선물로 당신을 안내하고 보호하며, 삶의 큰 성취로 이끈다.
생각하는 마음은 사실상 삶의 세부 사항을 헤쳐나가고, 물질 현실을 다루며, 기술과 소통을 배우기 위한 것이다. 물론 이 마음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당신 삶의 안내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생각하는 마음은 앎을 섬기게 되어 있다. 이것은 마음이 영을 섬기게 되어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아주 어린 아이에게는 자신의 경험에 귀 기울이게 하라. “오늘 이것을 보면서 어떤 느낌이 들었어? 이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어떤 기분이었어? 지금 이 순간에는 무엇을 느끼고 있어?” 그리고 그냥 그 아이가 자신을 표현하게 놓아두라. 그 아이가 귀 기울이게 하라. 그 아이가 자신의 경험이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하게 하고, 그것을 표현해 보도록 격려하라.
만약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앎을 경험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정말 안다면, 당신은 아이가 나이가 들면, 그 아이를 가르치기 시작할 수 있다. 이때 그 차이는 매우 깊지만, 사람들 대부분은 아직 그 차이를 매우 확실하게 분별할 수 없다.
이미 아는 것은 당신 내면에 매우 깊이 스며들어 있다. 그것은 변하지도, 흔들리지도 않으며,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나 사회적 조건화에 좌우되지도, 사회에 만연한 믿음에 좌우되지도 않는다. 당신은 그것을 온몸으로 느낀다. 어쩌면 당신은 그것을 어떤 생각으로 느낄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떤 생각이나 감각으로 경험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과 관련된 이미지를 볼지도 모른다. 그것은 당신의 생각과는 완전히 구별된다. 그것은 영원하고, 스며들어 있으며, 온몸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마음은 끊임없이 생각하므로, 이러한 경험들이 드물다고 여겨질 수도 있으며, 당신의 생각·태도·신념, 그 밖의 주변 세상에 대한 반응 속에 묻혀 인식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린 사람이 자신의 경험에 귀 기울이는 것은 앎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우는 것의 시작이다. 다시 말해 귀 기울이고 느끼고 보고 살펴보는 것이며, 세상에 귀 기울이면서도 자기 내면에 귀 기울이기 시작하고, 세상을 경험하면서도 자기 내면에 귀 기울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린아이들에게 자연스럽지만, 그들은 아직 어떤 지혜도 기르지 못했다. 따라서 앎은 단지 그들 내면에 있는 잠재력에 불과하다.
아이들이 지혜롭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들에게는 아직 지혜가 없다. 당신이 그들을 내버려두면, 그들은 절벽에서 떨어질 것이다. 그들을 내버려두면, 그들은 불 속에 손을 넣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아직 지혜가 없다.
이제 지혜는 매우 중요하다. 물론 모든 부모는 위험을 피하기 위한 어떤 기본적인 것들을 자녀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안다. 이것이 바로 지혜 훈련의 맨 처음 시작이며, 이 훈련은 궁극적으로 세상에서 사는 법, 즉 앎의 안내를 받아 세상에서 사는 법이다.
하지만 당신은 이것들을 배워야 한다. 세상에서 사는 것은 고향에서 사는 것과는 아주 매우 다르다. 이것들을 배우는 데는 수십 년이 걸린다. 인간 문명, 인간사, 인간관계는 매우 복잡하고 갈등이 매우 많다. 자신을 잃지 않고, 중독이나 우울증이나 자기 파괴의 희생양이 되지 않으면서 이 모든 것을 효과적으로 헤쳐나갈 수 있으려면, 진정한 기량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아이를 집 밖의 세상으로 데리고 나갈 때, 당신은 아이에게 세상에 관한 것들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아이가 지켜보게 하라. 아이가 바라보는 것을 매우 객관적으로 말해주라.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지 말라. “이것은 좋다.”, “이것은 나쁘다.”라고 말하지 말라. 그저 바라보게 하라.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저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말해주라. 아이를 자연 속으로 데려가라. 동물과 식물을 관찰하게 하라. 왜냐하면 이것은 아이에게 매우 생기를 되찾게 하는 정신 환경이기 때문이다.
경계 안에서 아이가 마음껏 돌아다니게 놓아두라. 탐험하게 하라. 아이들은 탐험하는 것을 좋아한다. 지켜보되 지나치게 보호하려 들지 말라. 아이가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지 물어보라. 아이에게 어떤 것을 가리키라. 신선하고 열린 눈으로 아이가 바라보는 것처럼 바라보면서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라.
만약 당신이 다른 일에 너무 여념이 없어 아이들과 함께 이런 시간을 보낼 수 없다면, 아이를 가져서는 안 된다. 아이가 있다면,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아이가 당신에게 주는 선물의 일부이며, 동시에 당신이 아이에게 주는 선물의 일부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지혜 훈련은 아주 무서운 언어가 섞이지 않아야 한다. 당신은 아이들을 공포에 떨게 해서는 안 된다. 단지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이해할 수 있게 하되, 안전한 장소와 안전하지 않은 장소, 안전한 인간관계와 안전하지 않은 인간관계 등 몇 가지 지침을 주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거의 모든 가정에서 보편적으로 하지만, 대부분의 상황에서 그리 깊이 다루지는 않는다. 당신은 자녀가 성장하는 내내 이 과정을 꾸준히 해야 한다.
청소년기의 어느 시점이 되면, 아이에게 더는 지혜 훈련을 가르칠 수 없다. 아이는 부모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며, 다른 사람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그래서 아이가 삶에서 어떤 것을 배우고 경험하도록 도와줄 수 있는 다른 어른들, 즉 다른 가족 구성원이나 가까운 친구들이 있는 것이 좋다. 아이들이 단지 자기 부모만이 아니라 더 많은 어른과 교류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 번째는 분별력이다. 여기서 당신은 아이가 자신의 경험에 귀 기울일 수 있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경험에서 본질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그들이 마음속 깊이 느끼는 것과 단지 표면 마음에서만 맴도는 생각을 분별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해야 한다.
아이가 상대방 안에 있는 것을 정말 듣고 있는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예를 들어, 아이는 자기 부모나 자신이 접하는 다른 어른들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다. “이 사람에게서 무엇을 보았니? 이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어?”라고 물어보며 아이가 이것을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모두 아이 내면의 앎이 준 큰 선물 중 하나인 아주 자연스러운 분별력을 아이가 스스로 활용할 수 있게 이끌어 주는 일이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진실이 아닌 것을 말할 수는 있지만, 그들 내면에 있는 앎이 그것을 믿게 할 수는 없다. 자신을 허위로 포장할 수는 있지만, 다른 사람의 앎을 속일 수는 없다. 당신이 화가 나면, 그들은 그것을 느낄 것이다. 당신이 괴로워하면, 그들은 그것을 느낄 것이다. 당신이 두려워하면, 그들은 그것을 느낄 것이다. 당신이 부정직하면, 그들은 그것을 느낄 것이다.
당신이 자녀에게 바라는 것은 바로 이 분별력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삶의 근본적인 기량이기 때문이다. 이 기량은 많은 재난에서 그들을 구할 것이며, 그들이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거쳐 성장함에 따라 점점 더 큰 힘을 그들에게 부여할 것이다.
교사, 시인, 음악가, 위대한 사상가 등 다른 사람들의 지혜를 아이와 공유하라. 지혜를 접하게 하되, 그 의미를 설명해 주거나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려주려고 하지 말라. 아이가 스스로 그 지혜를 다루게 하라. 아이가 할 수 있을 때, 더 복잡한 사고나 깊은 통찰을 고려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 평가 능력이 점차 향상될 때를 기다리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이 삶에서 배운 지혜를 자녀와 공유하라. 잘되지 않은 일들, 정말로 실수한 일들, 실제로 큰 변화를 만들어 낸 일들, 매우 현명하고 효과적인 일들을 공유하라. 여기서 당신의 경험을 나누되, 과도한 평가는 덧붙이지 말라. 그냥 “나는 이것을 했고, 이런 일이 일어났으며, 그것은 실수였어.” 또는 “내가 이것을 했고,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정말 잘 풀렸어.”라고만 말하라.
옳다고 입증된 통찰이 당신에게 있다면, 이것들을 자녀와 공유하라. 자녀는 알고 싶어 하고, 이런 것들에 관심이 있다. 하지만 당신은 일찍 시작해야 한다. 자녀가 청소년일 때, 말하기 시작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때는 아이가 더는 당신에게 귀 기울이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귀 기울이려 할 것이다. 아이는 이미 당신과 자신을 구분하고 있다.
그다음으로 우리에게는 목적이 있지만, 목적은 만약 개개인의 기반이 앎 위에 세워지고, 삶 속에서 지혜를 차곡차곡 쌓았다면, 개개인의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진화하는 어떤 것이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자기 삶이 어떻게 될 것이고,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기대가 종종 있기도 하고, 혹은 전문 기술을 배워야 하거나 교육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기대가 있기도 한다. 이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목적에 관한 질문을 너무 일찍 강요하지 말라. 그들이 십사오 세를 넘긴 청소년이라면, 자신의 가장 큰 기량이 무엇인지, 세상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 보도록 점차 제안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이것은 답이 아닌 질문이며, 요구가 아닌 가능성이다. 당신이 바라는 것은 그들 스스로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들이 내린 결론 중 상당수는 가치가 없겠지만, 그것은 괜찮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질문을 열어둔 채 있다. 여기서 질문은 답보다 더 중요하다. 그들은 즉각적인 답이 없는 질문들을 숙고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이것은 답을 받아들이기보다 질문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 위한 지혜 훈련의 일부가 될 것이다.
답은 많지만, 지혜는 없는 어른이 많다. 그들은 질문과 함께 살아갈 능력이나 역량이 없다. 그들은 너무 불안하고, 자신의 관념과 믿음에 지나치게 집착하며, 자신의 믿음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기 생각이 본연의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코 자기 내면에 있는 깊은 마음에 대해 알지 못하고, 그곳에서의 기반을 세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목적에 관해 당신이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당신 스스로 진정한 목적에 맞게 삶을 사는 것, 목적을 몸소 실천하여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언급한 앎·지혜·분별력·목적, 이 네 가지는 모두 시범을 통해 가장 잘 배운다. 만약 부모가 진정한 목적이 있는 일에 몰두하는 환경에서 아이가 자란다면, 그것은 세상의 어떤 말보다도 더 큰 가치가 있다. 그것은 말로 전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새 메시지는 어린아이가 아닌 성인에게 초점을 맞춘다. 성인에게는 자녀가 있으며, 자신이 배우는 것을 실천하여 보여주고, 또 통찰력과 관찰을 장려하면서, 자녀를 가르치기 시작할 수 있을 때, 자신의 보살핌 아래 있는 이들, 즉 앎과 지혜를 배우기 위해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자신이 배우는 것을 전할 수 있다.
이제 당신의 자녀는 세상을 상대해야 하고, 세상의 교육을 감당해야 하며, 또래 아이들뿐만 아니라 다른 어른들도 얽혀 있는 사회 환경을 마주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문제도 많고, 위험도 많다.
먼저, 가능하다면 자녀가 장기간 이성과 마주해야 하는 환경에 놓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린 시절에는 여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끼리 배우고, 남자아이들은 남자아이들끼리 배우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젊은이들이 사회적으로 순응해야 하는 매우 강한 압박을 받는 상황에 빠지기 전에, 자신과 자신의 깊은 성향을 인식할 기회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
이 중 일부는 세상의 현실이므로 피할 수 없지만, 아이들이 성적인 요소에 노출되는 것을 거의 없게 하고, 이성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으려는 시도를 최소화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아주 어린 시절에는 놀면서 우정을 키울 것이며, 그것은 괜찮다. 하지만 아이들이 청소년기에 접어들면, 다른 아이들과 함께하는 실제 사회 환경에서 겪게 되는 복잡함과 타협에 어쩔 수 없이 맞추어야 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을 너무 이른 시기에 접하는 것은 해롭다. 이것은 다른 가능성을 차단하며, 한 개인이 자신을 인식하고 자기 삶의 방향을 인식하기 전에 초점을 다른 곳으로 옮긴다. 이런 방식의 사회적 노출이 많지 않은 어린 소년 소녀들이 훗날 삶에서 진정한 공헌자가 되고 자기 일에서 성공한 것은 사실이다.
소년은 업무에 필요한 기술을 연마해야 하며, 자신의 직업을 숙고해야 한다. 그리고 실용적인 능력을 길러야지 여자아이들을 쫓아다녀서는 안 된다. 이것은 소녀도 마찬가지이다. 소년 소녀 모두는 교육에 집중해야 하고, 삶에 필요한 기술을 익히는 데 집중해야 하며, 새 메시지가 삶의 네 기둥이라고 부르는 것을 구축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여기서 네 기둥은 관계의 기둥, 건강의 기둥, 일의 기둥, 영적 성장의 기둥이며, 영적 성장이란 이 방식, 이 맥락에서는 지혜를 기르고 앎을 경험하는 것이다.
당신은 자녀가 단순히 문화의 모방자가 아니라, 자유롭게 사고하는 사람이 되게 해야 하며, 자녀가 스스로 생각해서 결정을 내리게 해야 하지, 단순히 친구들이 알려주는 것이나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따르게 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이러한 타협의 압박에 맞서야 할 것이며, 많은 경우 그 압박은 극복할 수 없다. 하지만 아이가 스스로 생각하고 자기 생각과 믿음을 다시 숙고하는 힘이 클수록, 성장하면서 삶의 진정한 방향을 설정하는 데 앞으로 더 큰 이점을 갖게 될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가정 내 정신 환경이 어떠한지, 또 부모와 함께 배우고 보고 아는 데 얼마나 참여하느냐가 엄청난 차이를 낳는다. 만약 부모가 부재하거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관심을 주는 사람이 누구든 그 사람에게 끌리게 되며, 그것은 보통 친구들이나 사회 환경이 된다.
아이들은 문화적 가치와 기대를 흡수한다. 설령 이러한 것들에 반항하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받아들이고 있다. 왜냐하면 반항 그 자체가 순응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어떤 것에 더 강하게 반항할수록, 그것을 더 실재하는 것으로 여기게 되고, 자신이 더 깊이 받아들인 셈이 된다.
그러므로 아이들이 자유롭게 사고하려면, 자유로운 사고가 장려되는 환경에 있어야 하는데, 학교에서나 친구들 사이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어린 소년 소녀들은 쓸모 있는 기량을 배워야 한다. 앞에 놓인 어려운 시기에 이 기량들이 그들에게 필요할 것이다. 그들은 물건을 만들고, 고치는 법을 배워야 하며, 분별력과 관계, 즉 누구와 함께 있고, 누구와 함께 있지 않아야 하는지 등 실질적인 기량을 배워야 할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청소년기가 되면 자녀는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배우기 시작할 수 있지만, 이것은 그들이 진정으로 준비가 되어 있고, 이 배움을 스스로 원할 때만, 또 이 배움이 다른 사람들을 상대하거나 앞으로 마주하게 될 복잡한 사회 환경을 헤쳐나가는 데 보탬이 될 것을 알 때만 가능하다.
이때 부모는 자녀가 청소년기에 접어들면 점차 통제권을 내려놓아야 한다. 이때 부모는 좋은 본보기가 되는 것으로 봉사해야 한다. 이때 당신은 자제력과 관용을 발휘해야 한다. 이때 자녀에게 분명한 기대치를 설정해 주어야 하는데, 그 기대치는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하며 인간적이어야 한다. 이때 당신 삶과 가정은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이 허용되지 않는지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있는 방식으로 관리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경계가 없으면, 아무것도 중요해 보이지 않으며, 결과가 따르지 않으면, 아무것도 중요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들을 절망으로 이끈다.
가정에서의 경계는 부모가 삶의 기준으로 스스로 정한 것에 따라 설정된다. 아이는 이 기준 안에서 성장해야 하며, 그 기준은 아이들을 포용할 만큼 충분히 유연해야 한다. 하지만 부모가 분명하지 않으면, 아이들도 분명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경계가 없다면, 아이는 불안감을 느끼고 무모해질 것이다.
가정 내에서 일관된 기준을 더 많이 조성할 수 있고, 이 기준을 인간적이고 자비롭게 지켜나갈수록, 당신 자녀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기반이 더 튼튼해질 것이다. 아이는 진정한 안정감이 무엇인지 경험하게 될 것이다. 아이는 자신의 부모가 일관성·정직함·진실성을 가르치고 있음을 깨닫고, 이런 것들을 받아들일 것이다. 만약 이런 것들이 부족하다면, 당신의 자녀는 불안하고 지지받지 못한다고 느낄 것이다. 그들은 무모해지고, 자신에게 위험한 다른 것들에 몰두할 것이다.
여기서 부모에게 있는 앎의 힘, 부모의 부부 관계와 그 부부 안에서 공유되는 목적의 힘, 이 모든 것이 자녀에게 안전하고 집중된 환경을 조성하는 데 대단히 중요하다. 여기서 당신의 자녀가 청소년기에 접어들 때, 당신은 부모로서 당신이 마주하고 있는 것, 즉 생계를 꾸려가는 어려움, 지역 사회에 얽힌 문제들을 자녀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아이들은 이런 것들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지혜 훈련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학교에서는 삶의 네 기둥을 가르치지 않으므로, 젊은이들은 심지어 고등교육까지 전 과정을 마치고도 자기 삶에 힘이나 안정감이 거의 없다. 당신의 자녀가 네 기둥, 안정성, 분별력을 배울 수 있을 때, 또 무모하고 자멸적인 사람들과 어울릴 때 생기는 위험성에 대해 배울 수 있을 때, 그들을 가르치라. 능력이 닿는 데까지 최대한 매우 안정된 환경을 제공하라. 당신이 가르치는 것과 실제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에서 일관성을 유지하라.
당신의 자녀가 당신을 이끌어 줄 것으로 기대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들을 이끄는 것은 당신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자녀가 당신보다 더 현명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들에게 지혜를 가르치는 것은 당신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자녀를 친구처럼 여기지 말라. 왜냐하면 부모와 자녀는 교사와 학생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특히 어린 시절에 자녀가 표류하게 내버려두지 말라. 그들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그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주의를 기울이라.
그들에게 분별력과 지혜를 가르치라. 그들에게 그들 자신의 깊은 경험에 귀 기울이는 것을 가르치라. 시범을 통해 목적의 힘을 가르치라. 자기 삶과 미래를 소중히 여기고, 미래의 자기 삶에 투자하는 법을 가르치라. 돈에 관해 가르치라. 일에 관해 가르치라. 성에 관해 가르치라. 집중된 삶, 재앙 없는 삶을 살기 위해 알아야 하는 것을 가르치라.
이런 것들을 가르치려면, 당신 자신이 그것들을 알고 시범을 보여야 한다. 여기서 학생으로서 당신의 태도는 이제 더 큰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당신은 단지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녀를 위해서도 배운다. 이때 앎 안에 있는 당신의 힘은 단지 자기 계발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힘은 당신 자녀의 안녕과 미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당신 자신의 지혜 개발과 지혜 훈련은 당신 자녀가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의 일부가 된다.
그러므로 부모는 스스로 앎의 학생이 되어야 한다. 그들 자신이 지혜의 학생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분별력의 학생, 목적의 학생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새 메시지가 계시하는 것은 가장 중대한 의미를 지니며, 당신이 살고 있는 시대와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새 메시지는 당신이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가도록 당신을 준비시키고, 과거와는 다른 미래를 대비시키기 위해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당신은 자녀에게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가도록 가르치고, 과거와는 다른 미래를 대비하도록 가르친다.
이제 당신은 단지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배운다. 앎의 학생으로서 당신의 성공과 실패는 자녀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고, 당신이 영향을 미치는 다른 사람들과 당신을 아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자녀와 함께 있을 때, 당신은 교사가 되어야 한다. 훌륭한 교사, 강한 교사가 되려면, 당신은 강한 학생이 되어야 한다. 새 메시지는 당신에게 강한 학생이 되는 법을 가르쳐 줄 것이다. 그리고 강한 학생이 되면 당신은 훌륭한 교사가 되는 법을 배울 것이다.
당신의 자녀는 당신의 학생이다. 당신은 이것을 피할 수 없다. 어느 시점이 되면, 그들은 당신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청소년기에서 성년 초기까지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귀 기울이고 싶어 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그들의 주된 교사이다.
만약 자녀를 가질 계획이라면, 당신은 이 책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이 책임을 받아들이고 실제로 떠맡을 수 있다면, 그 가치는 헤아릴 수 없으며 당신 삶을 축복할 것이다.
새 메시지가 당신에게 계시하는 것은 당신이 자녀에게 줄 선물의 일부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선물은 그들이 믿는 대상이 아니라, 경험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경험은 영원하지만, 믿음은 바람과 같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