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4월 17일
이란 테헤란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가
받다
인류의 발전 가능성을 고려하고, 민족이나 국가 간의 평화로운 관계 수립 가능성을 고려할 때, 세상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무엇인지 더 깊이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전쟁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분쟁은 정치나 군사 지도자들이, 또 그 배후에서는 종교 지도자들이, 시작하고 용인할 수도 있기는 하지만, 이 분쟁은 그들 상황의 바탕에 있는 문제가 확대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지도자들은 자신의 선언이나 주장에서 거의 논의되거나 드러내지 않는 요구 사항이나 필요한 것들을 얻기 위해 실행에 옮기고 있다.
왜냐하면 전쟁의 원동력은 그 지도자들보다 더 거대하기 때문이다. 지도자들은 전쟁을 현실로 옮기는 전달 장치에 불과하다. 전쟁을 확대하고, 확정하고, 용인하고, 전쟁의 의미와 가치가 아무리 거짓일지라도 전쟁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등 전쟁을 현실로 옮기는 전달 장치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전쟁의 원동력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 지구 자원을 쓰는 방식, 자신을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믿는 것에서 비롯되며, 부와 권력과 획득에 대한 끝없는 추구, 즉 생활에서 꼭 필요한 것들이나 안정적이고 안전하게 유지하고 살아가는 데 실제로 필요한 것을 넘어 끝없이 추구하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전쟁의 원동력은 인간의 욕망, 인간의 강박 충동, 인간의 중독에서 나오는 힘이다. 이런 것들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과 타인에게 부자연스러운 일을 하고, 자신의 신성한 본성을 저버리며, 자신의 선한 의도를 발휘하지 못하고, 타인에 대한 자연스러운 자비심과 주변 삶에 대한 인식을 자신의 의식 속에서 없애려고 한다.
선언을 하고, 여론을 환기하고, 분쟁의 설계자인 것처럼 보이는 그들의 지도자들은 단지 이 과정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과정 자체는 사람들의 활동, 태도, 행동에서 생성된다.
역사적 인물이든, 현대인이든, 매우 야심에 찬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다. 그들은 정부의 권력 기관에서나 상업 무대에서나 종교 권세를 행사하는 영역에서 자신을 위해 큰 권력을 누리고 싶어 한다. 그러나 전 세계를 휩쓴 큰 분쟁, 즉 인류가 매우 극심하게 고통을 겪었고, 국가들을 철저히 파괴했고, 부족과 집단들을 완전히 짓눌렀고, 민족 전체를 멸종으로 이어지게 한 분쟁들에 대해 전적으로 그들만을 탓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그 분쟁들을 소수 야심가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지 전쟁의 원동력이 만들어내는 것을 수행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자신의 태도와 행동의 근간이 되는 과정에서 이익을 얻으려고 할 뿐이다.
당신이 삶이라는 우물에서 너무 많은 물을 퍼내면, 다른 사람들은 충분히 퍼낼 수 없다. 당신이 자신에게 필요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원하면, 당신은 자신이나 담당자나 정부 등 누군가에게 이 자원을 확보하여 끊임없이 커지는 당신의 야심과 욕망을 충족시켜 달라고 요구한다.
정부는 그 속성이 악하지는 않지만, 만약 자국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 공정한 무역과 상업이 제공할 수 없는 수준까지 제공해야 한다면, 정부는 자원 획득의 도구이자 공급 수단이 된다.
그러므로 세계 부유한 국가들의 국민은 전쟁의 원동력이 자국민을 내몰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세계 부유한 국가들의 국민은 자신의 호화로운 생활 방식이나 세상과 정부에 대한 자국민의 기대와 요구로 인해 다른 나라의 자원을 얻어야 하고, 다른 나라를 착취하고 지배해야 하며, 다른 나라 정부를 조종해야 하고, 자국민을 위해 자원을 확보해야 하는 힘과 영향력과 당위성이 생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자원이란 기본적으로 삶에 필요한 것을 훨씬 넘어서고, 심지어 민족 간의 진정한 즐거움과 친교를 제공하는 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을 훨씬 넘어선 것들을 의미한다.
한 국가의 국민이 많은 자원 제공을 원하고 기대하며 요구한다면, 그 정부는 국민의 욕구를 충족시켜야 한다. 그리고 국가가 더 민주적일수록, 그 정부는 점점 증가하는 이러한 요구 사항을 충족시켜야 할 의무가 더 커진다.
사람들은 자유란 소비할 자유, 더 많이 소유할 자유, 더 많이 획득할 자유, 한 사람이 안정되게 생활하며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삶이라는 우물에서 퍼내는 자유로 생각하는 것 같다.
더 많이 가지려는 이 욕망은 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개인적 마음에서 나온다. 개인적 마음은 불안정하므로 마음 자체의 불안과 삶의 두려움을 달래고 상쇄하려고 항상 더 많은 것을 원한다. 사실, 끊임없이 커지는 소유에 대한 욕망은 그 사람의 본질적인 불안정을 보여주며, 신이 창조한 그 사람 자신의 깊은 영적 본성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상은 당신 몸의 구성 성분을 창조했지만, 신은 당신의 혼을 창조했다. 그리고 혼에 필요한 것은 단순하고 본질적이며 필수적이다. 물질 삶에 필요한 것과 요구되는 것들, 즉 의식주, 물, 안보 등을 충족하는 것을 넘어, 혼에 필요한 것은 당신이 이곳에 온 큰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 목적에는 적은 양의 자원이 필요할 수도 있고, 상당량의 자원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혼에 필요한 것은 사람들이 행복하고 성취감을 느끼기 위해 반드시 갖춰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래서 부자들은 가장 하찮은 것들에 지구 자원을 낭비한다. 그들은 자신을 과시하려고 자신의 집과 몸을 사치스럽게 꾸미면서 자신이 얼마나 불안정한지, 또 자신에게 신의 선물이 얼마나 불충분한지를 세상에 보여준다. 심지어 종교 지도자들도 자신의 궁전을 짓기 위해 엄청난 재산을 축적한다.
이것은 신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신은 모든 사람이 가난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안정과 안보와 적절한 생필품 공급이 있기를 바라며, 더 나아가 삶을 즐길 수 있도록 소박한 것들이 있기를 바란다. 신이 바라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원하는 것, 즉 소유하고 싶어 하고 통제하고 싶어 하는 열망과는 전혀 다르다.
신이 세상에 지금까지 보낸 모든 위대한 메시지에서는 이 문제를 계속해서 다루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욕구는 끝이 없는 것 같다. 사람들의 소비를 촉진하는 것이 상업의 원동력이고, 부를 생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결과, 많은 사람이 부자들에게 장신구를 제공하기 위해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전쟁의 원동력이다.
만약 당신의 국가가 이 정도의 풍요를 누리는 데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려고 다른 국가를 조종하고 통제하고 군사력을 행사해야 한다면 그것이 바로 전쟁의 원동력이다.
당신은 자신이 상상하거나 원하는 화려한 생활 방식, 마땅히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생활 방식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평화의 옹호자이자 인간 화해의 옹호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의 행동 자체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당신의 생활 방식을 유지할 수 있도록 자원을 확보하라고 정부와 군대에 요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황에서 그럴 수는 없다. 평화의 옹호자라고 주장하지 말라. 만약 당신이 그러한 방식으로 산다면, 평화를 바라거나 지지한다고 주장하지 말라. 왜냐하면 당신이 전쟁의 원동력에 기름을 붓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가 자원을 빼앗기며, 짓눌리고 있을 때, 그 나라가 이것에 저항한다면, 전쟁이 일어난다. 그 땅의 민족이 자연 자산을 너무 많이 빼앗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그들은 저항할 것이다. 이것이 전쟁으로 이어진다. 제국이 건설되고 다른 국가가 착취당할 때, 이것이 전쟁으로 이어진다.
과거에는 당신이 개인의 부와 풍요를 얻을 수도 있었다. 당신에게 부와 풍요를 제공함으로써 인구의 상당수가 빈곤하게 되었지만, 항상 더 많은 자원이 있었다. 그 우물은 바닥이 없는 것처럼 보였고, 지구의 선물을 영원히 내어주고 제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신에게 기도하면, 마치 지구가 끝없이 제공하는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지구에서 더 많은 자원이 생겨난다는 믿음이 있다.
예전에는 언제나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었고, 당신 자녀들도 언제나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었으며, 부와 번영과 풍요를 향한 충동은 지구의 제약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당신은 지금 쇠퇴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다시 말해 이러한 자원을 생산할 수 없는 세상, 너무 과도하게 착취당하고 있는 세상, 인류가 현재의 큰 즐거움을 위해 자녀의 미래를 팔아넘기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 점에서 자제력이 거의 없고, 겸손함도 거의 없으며, 자비심도 거의 없다. 당신은 지금 당장의 혜택을 얻기 위해 미래를 약탈하고 있다.
인류는 지구의 필수 자원 공급 능력을 넘어섰다. 인류는 이제 식량과 물조차 국가들이 적절히 확보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도시 전체가 물 부족에 시달리며, 국가 전체에 식량이 적절하게 공급될 수 없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인류는 지구가 제공할 수 있는 것의 한계에 도달하고 있다. 전쟁의 원동력이 이전에는 예지자들과 위대한 교사들을 제외하고는 가려져 있었고, 인식되지 않았고,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제는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신의 풍요는 크지만, 세상에서 풍요는 무한하지 않다. 만약 당신이 지구가 제공할 수 있는 것에서 너무 많이 가져가면, 모든 생명의 창조주가 마법의 지팡이로 즉시 그것을 다시 채워주지 않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너무 많이 가져가면, 남은 것이 너무 적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면, 다른 사람들이 너무 적게 가질 것이다. 만약 이 자원을 놓고 경쟁하면, 분쟁과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 분쟁과 전쟁은 종교와 정치라는 위장과 베일 아래 숨겨질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것은 자원을 둘러싼 경쟁이고, 미래의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다.
전쟁의 원동력이 이 상황으로 몰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너무 많이 원하거나, 충분히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세계 가난한 나라들이 충분히 갖지 못한다면, 그들은 전쟁으로 내몰릴 것이다. 만약 부유한 나라들이 과도한 욕구를 충족하는 데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되면, 그것이 그들을 전쟁으로 내몰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즉 이 근본적인 공급 불평등을 바로잡지 않고, 문제의 근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시간이 지나도 효과적이거나 지속될 수 있는 평화 계획은 없을 것이다.
부유한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아, 식량은 충분해. 기술이 식량을 충분히 만들어낼 거야. 더 많이, 모두에게 충분할 만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이 이것을 어떻게 아는가? 그리고 기후 변화, 필수 자원 감소, 농경지 유실 등 세상에 다가오는 변화의 큰 물결에 직면하여, 그들은 어떻게 그런 터무니없고 무지한 주장을 할 수 있는가? 변화의 큰 물결에 직면하여 우물은 점점 더 작아지고 사람들에게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더욱 절실해지고 더욱더 심각해질 것이다.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어떤 평화 계획이나 핵심 협정이 국가들 사이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가? 그런 불평등과 절박함을 상쇄할 수 있는 외교란 과연 무엇인가?
만약 당신이 진정으로 평화를 옹호하는 사람이라면, 또 정말로 인류의 안녕을 염려한다면, 아니 최소한 자신의 가족과 그 미래, 자신이 사는 도시나 마을과 그 미래라도 염려한다면, 자신의 생활 방식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특히 자신이 부를 추구하거나 풍요로운 환경에서 살고 있다면, 더욱 그래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아, 당신은 금욕주의를 지지하는데. 사람들은 금욕주의를 원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금욕주의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전쟁의 원동력을 만들지 않는 건전한 삶, 진실한 삶, 진정한 삶을 지지한다.
미래에는 국가 전체가 쇠퇴하는 세상, 변하는 기후, 줄어드는 자원의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어떻게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자국민을 부양할 수 있을 것인가? 국가들은 자국민을 돌보는 가장 근본적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당신은 이제 이런 질문들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질문들은 근본적이고 진실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자신을 위해 원하는 것들은 당신에게 필요한 것인가? 아니면 당신이 원하는 것인가? 그것들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인가? 꿈이나 환상인가? 아니면 삶에 실제로 필요한 것들인가? 그것들이 신의 위대한 지혜의 선물인 앎이 당신에게 요구하는 것을 충족하는가?
당신은 지금 쇠퇴하는 세상을 마주하고 있다. 지금은, 탐험할 지역이 항상 더 많은 과거, 극복하고 개척하고 개발해야 할 새로운 개척지가 항상 있던 과거와는 다르다. 마지막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미개척지와 미개발 지역은 이제 인류의 요구를 충족하지 못할 것이다.
부자들은 사람들을 돌보아야 할 것이며, 이것이 그들 부의 목적이다. 그저 자기 가족, 자신의 온갖 욕망과 소망과 요구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돌보아야 한다. 당신이 부유하면, 당신은 수백 명을 먹여 살려야 할지도 모른다. 새로운 멋진 차나 더 큰 집보다는, 당신의 부는 사람들을 돌보는 데 쓰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할 때 당신의 진실성, 가치, 자존감이 회복될 것이다.
굶주린 사람들이 당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 당신이 어떻게 부를 과시하면서 행복할 수 있겠는가? 가난한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굶주리고 있는데, 당신이 멋진 차와 값비싼 옷과 액세서리로 자신을 뽐내면서 어떻게 기분이 좋을 수 있는가? 그것이 당신에게 위안이 되는가? 그것이 당신이 누구이고, 세상에 왜 왔는지를 입증하는가? 세상에 온 이유가 세상의 메뚜기가 되는 것인가? 세상을 철저히 파괴하는 것인가?
전 인류를 심각한 위험에 빠뜨리지 않고 소수 사람만 부유해지기에는 지금 세상에 인구가 너무 많다. 지구의 자원으로는 그런 상황을 감당할 수 없다. 국가들은 실패와 붕괴와 가장 심각한 상황에 직면할 것이다.
그래서 신의 새 메시지는 당신에게 근본적인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가르친다. 당신은 지금까지 항상 살려고 하던 대로 계속 살 것인가? 특히 부유한 나라 사람이라면, 주변 세상이 쇠퇴하고 있는데도, 끊임없이 더 많이 원하고, 더 많이 가지려고 할 것인가?
당신은 이 목적을 위해 세상에 파견된 것이 아니다. 당신은 땅 위의 메뚜기가 되려고 이곳에 파견된 것이 아니며, 전쟁의 원동력이 되려고 이곳에 파견된 것도 아니다. 당신은 자신의 본성을 배신하고 있으며, 자신을 위한 신의 뜻을 배신하고 있다. 신의 뜻은 부양자가 되는 것이지, 가장 하찮은 이유로 세상을 착취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큰 부자들은 사람들을 돌볼 준비를 해야 한다. 왜냐하면 미래에는 인류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 즉 당신이 알던 것보다 더 절실하고, 심지어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것보다 더 절실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은 수천 명의 사람들을 돌보고 먹이고 부양해야 한다. 당신은 이미 그들의 생계를 파괴했다. 이제 그들은 자기 땅을 경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들의 지역 자원은 고갈되고, 땅은 황폐해졌으므로 이제 그들을 먹이고 돌보는 것은 당신의 일이다. 그것이 바로 당신 일이 될 것이다. 당신이 더 많은 부를 창출한다면, 그것은 바로 이 목적을 위한 것이다.
만약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인류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규모의 전쟁과 분쟁에 직면할 것이며, 이 세상에서 전에 본 적이 없는 수준의 고통이 있을 것이다. 종교인들은 지금이 말세이고, 종말이며, 메시아의 재림으로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모두 그저 인류의 실패이고, 세상의 자연법칙을 위반한 것이며, 무지와 탐욕의 산물이고, 당신이 보고 알고 행동하도록 신이 당신 내면에 심어 놓은 것에 응답하지 못한 결과일 뿐이다.
이것이 인류의 위대한 평화의 시대, 정의의 황금기를 열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그보다는 이전에 여기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빈곤과 타락의 상태로 인류를 몰아넣을 것이다.
이 평가가 부정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이 평가는 정직하다. 이 평가가 관점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이 진실을 볼 수 없다면, 관점은 아무 의미가 없다. 당신이 지구의 한계를 피해 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이 새로운 우주선을 타고 지구 밖으로 나가 우주 큰 공동체에서 자원을 가져와 지구를 다시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이 자원은 이미 다른 이들이 소유하고 있다.
여기에는 가슴에서 큰 변화가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많은 나눔과 깊은 자비심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당신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약간의 푼돈이나 쓰다 남은 잔돈을 던져주는 것이 아니다. 국가들이 몰락하고, 농업이 붕괴하고, 사람들이 식량을 살 여유가 없고, 필수 에너지가 귀해서 많은 사람이 구입할 수 없게 될 때, 매우 심각한 빈곤이 발생할 것이다.
당신 재산의 20%를 사람들을 돌보는 데 사용하라. 만약 인류가 안정을 유지하려면, 또 전쟁과 궁핍, 기아와 굶주림의 폐해를 피하려면, 이것이 바로 미래에 필요할 것이다.
이것은 신의 새 메시지가 주는 경고의 일부이다. 신의 메시지는 인류가 과거와는 다른 미래를 대비하고, 인간 가족 전체가 집단적으로 한 번도 직면해 본 적이 없는 일련의 상황에 대비하도록 지금 세상에 전해졌다.
신이 인류에게 지구의 부를 주었지만, 그 부는 올바르게 사용되고 제대로 공유되어야 한다. 지구의 부도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고귀하고 윤리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아, 이것은 공산주의야!”라고 말하지 말라. 아니다. 이것은 정의이다. “이것은 정치 문제이다. 이것은 사회주의이다.”라고 말하지 말라. “이것은 자비로운 자본주의이다.”라고 말하지 말라.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말라.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메시지를 듣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의이고, 공정함이다. 이것이 바로 신의 메신저들이 전한 위대한 메시지들이 항상 강조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지구가 제공할 수 있는 것의 한계에 도달했으며, 상황이 바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지구를 착취할 여지가 거의 없는 시대, 인간의 고통, 인간의 분노, 인간의 불만을 제외하고 나면, 모든 것이 고갈되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인간의 고통과 분노와 불만은 넘쳐날 것이다.
여기서 자원 관리, 자원 분배, 국가 간의 협력은 단순히 이상적이거나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된다. 여기서 이것은 인류가 이 세상에서 자유와 주권을 유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우주에는 나약하고 분열된 인류를 이용할 기회를 엿보며 큰 관심을 가지고 지구를 지켜보고 있는 다른 국가들이 있기 때문이다.
신의 새 메시지가 이것을 계시한다. 이것은 이전 신의 어떤 메시지에서도 결코 계시된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전에는 이것이 필요하지 않았고, 큰 위협이 아니었으며, 세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고, 돌보고, 부양해야 한다. 국가들은 다른 국가들보다 더 우위를 점하려 하지 말고 자국민을 돌봐야 한다. 그것이 윤리이고, 근간이다. 국민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돌보라. 안정되고 안전한 환경에서 살게 하고, 행복과 소박한 즐거움을 누리는 데 필수적인 것들을 가지고 살게 하라. 이것을 넘어서면, 세상이 공급할 수 없게 되어 전쟁의 원동력이 형성되고 당신을 전쟁으로 내몰 것이다.
자신을 위해 원하는 모든 것을 갖고서도 세상에 평화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만약 이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은 자신의 행동 결과를 보지 못하고, 세상과 당신의 관계를 알지 못하며, 세상의 상태를 보지 못한다.
지금 전쟁의 원동력이 커지고 있다. 세계 강대국들이 자국을 위해 에너지와 식량 공급을 비롯해, 그 밖의 다른 생산품, 그 생산품이 아무리 불필요할지라도, 그 공급을 확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경쟁과 분쟁과 전쟁의 위험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국가들은 자국민을 부양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심지어 부유한 국가들조차 이전에 익숙하게 누리던 것들을 공급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어려움은 점점 많아지고,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에 더 큰 그림자를 드리울 것이다.
이제 인류는 자신이 선한 지구 관리자임을 증명해야 한다. 이제 인류는 생존과 안녕을 위해 통합해야 한다. 이제 국가들은 모든 사람이 기본 필수품을 확보할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한다. 이제 부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자신의 책임임을 깨달아야 한다.
사람들은 이 일을 할 수 있다. 이 일이 인간의 본성을 거스른다고 주장하지 말라. 당신은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지 모른다. 이 일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고, 가장 유익한 일이며, 가장 만족스러운 일이다.
여기서 당신은 자신의 종교가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거나, 전쟁이 실제로는 다른 것에서 비롯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정당화하는 데 자신의 종교를 이용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당신은 신의 위대한 메시지를 이용하여, 과거에 철저하게 자행했던 것처럼 다른 민족을 짓누르거나 정복하거나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이제 그런 방식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세계 국가들이 실패하면, 그것은 재앙을 초래할 것이다. 어느 국가도 여기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이것은 종말이 되겠지만, 훌륭하거나 정의로운 결과를 가져오는 종말이 아니다. 그것은 실패의 종말이 될 것이고, 선이 악을 이기는 종말이 아니라, 인간의 무지와 탐욕과 불의가 낳은 결과가 초래할 종말이 될 것이다.
신은 이 일이 일어나는 것을 허용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당신에게 실패할 자유를 주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자신의 진실성을 보여주기 위해 세상에 왔다. 마치 집에 있는 엄마 아빠에게 달려가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처럼, 신이 마지막 순간에 당신을 구원해 줄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당신은 자신의 행동에 따른 결과를 직시해야 한다. 이것은 벌이 아니고, 신의 노여움도 아니다. 신은 노여워하지 않는다. 복수하고 싶어 하고 타인을 증오하는, 하찮고 부적절한 당신의 태도를 신에게 투사하여 당신 자신을 더 확대한 존재로 신을 만들지 말라. 당신은 신의 뜻을 모른다. 설령 신의 위대한 메시지 중 하나가 당신을 안내한다 하더라도, 당신은 여전히 신의 뜻을 모른다. 신의 뜻은 당신의 뜻과 다르다. 이렇게 다르다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제는 불가피한 상황 때문에 인간의 행동과 태도와 이해가 변해야 할 것이다. 만약 지혜나 교훈이나 참된 통찰을 통해 배울 수 없다면, 당신은 불가피한 상황을 통해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배워야 한다. 그것은 가장 어려운 형태의 학습이지만, 매우 효과적일 수 있다. 그것은 현명한 사람들이 선택하는 방식이 아니다. 실패를 바로잡는 것은 성공을 확보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사람들을 궁핍에서 구한다는 것은 당신이 이미 너무 멀리 갔다는 뜻이다.
이제 당신은 지구의 한계, 인간의 탐욕과 획득에 대한 한계와 씨름해야 하고, 자기 가족 부양을 넘어 인간적인 정의와 연민의 필요성을 다루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모든 큰 종교에서 가르쳐온 자선, 겸손, 연민, 자비이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 행위이며, 정의이다. 이것은 단순히 이상이나 선택해야 하는 높은 길이 아니라, 이제는 필수이다.
통합하면 인류는 살아남아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할 수 있지만, 통합하지 않으면 인류는 쇠퇴할 것이다. 문명은 쇠퇴할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기술과 과학, 영리함과 독창성도 인류를 구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신의 경고이지만, 신은 축복과 대비책도 준다. 이것이 바로 신의 새 메시지이며, 경고와 축복과 대비책이다. 만약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거나 기본적으로 경고를 이해하지 못하면, 당신은 축복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대비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신은 인류를 사랑한다. 신은 인류에게 화내지 않는다. 신은 인류가 어려운 상황에서 무엇을 하려는 경향이 있는지 정확히 안다. 그래서 신은 한 개인이나 한 시민으로서 당신의 책임, 집단이나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당신의 책임까지는 떠맡지 않고 인간 가족을 안내하는 데 필요한 것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회복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당신의 능력이지, 단순히 신의 영광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신은 이미 영광스럽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당신의 노력과 인지, 당신의 일과 헌신과 자비를 바탕으로 한 당신의 성공이다.
세상은 당신 손에 달려 있다. 전쟁의 원동력은 당신 손에 달려 있다. 전쟁의 원동력이 크고 강력할지, 아니면 존재하지 않을지는 당신 손에 달려 있다. 결과는 신의 뜻이 아니라, 유한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류가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에 달려 있다. 자원이 한정된 세상, 풍요와 혜택이 있지만 한계가 있는 세상에서, 당신은 한계 안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그 한계를 존중하며 그 한계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활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신의 지혜이다. 이것을 당신의 이해로 삼으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