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정치

As received by
Marshall Vian Summers
on 10월 11, 2008

원본 음성 계시 듣기:

다운로드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클릭하여 다운로드)

2008년 10월 11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가
받다

정치는 사람들이 서로 효과적으로 소통하고,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조직하여, 문화와 문명에 안정과 진보를 가져오려는 시도이다. 물론 지도자들의 경우에는 정치가 종종 사적 이익이 깊이 동반한 시도이기도 하다. 순수한 의미에서 정치는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조직하기 위한 소통과 조직의 거대한 그물망이다.

정치는 본질적으로 매우 불완전하며, 종종 너무 부패해서 단지 극소수만이 여기에서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정치에는 속임수, 갈등, 경쟁, 권력 추구가 만연해 있다. 정치는 매우 불미스러운 영역이지만, 필요한 영역이기도 하다. 그곳에는 항상 부패한 세력들이 활동하며,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들과 경쟁한다. 여기서 성실한 사람들은 확립된 제도가 무엇이든 제대로 작동하게 하고, 효과적이게 하며,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게 하려고 노력한다.

종교는 신이 인간과 소통하려는 시도이며, 사람들이 이 소통을 서로 나누려는 시도, 즉 이해하고, 해석하고, 삶의 경험으로 가져가려는 시도이다. 하지만 종교 또한 조직에 의해 운영되며, 이 조직은 매우 이기적일 수 있고, 자신의 종교가 실제로 지닌 본질을 매우 편협하게 이해할 수 있다. 종교들은 서로 경쟁하고, 해치려 하고, 심지어 인류 역사 전반에 걸쳐 수없이 싸웠다.

제도적 차원에서 보면, 종교 역시 정치적이다. 왜냐하면 종교가 하는 일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인간의 활동을 체계화하며, 일련의 특정 관념이나 가정에 따라 사람들을 한 방향으로 맞추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종교는 정치 영역과 유사하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종교 영역은 더 높은 기준이 적용된다. 비록 많은 사람이 더 높은 기준을 회피하거나 우회한다 하더라도, 그러하다.

종교의 실제 본질은 신이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며, 삶과 사고와 행동에 대해 더 높은 기준을 설정하는 것이다. 이 기준은 정치 영역이 설정하려는 것보다 훨씬 더 높다. 종교는 정치보다 훨씬 더 큰 범위에서, 그리고 훨씬 더 깊은 개인 차원에서 개인의 양심과 행동에 호소한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사람이 종교와 정치를 결합하려고 시도했다. 심지어 오늘날 세상에서도 일부 국가에서 이런 시도가 있으며, 종교 기반 정부를 수립하려는 많은 선동 정치 집단 사이에서 이런 시도가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서로 간접적인 관계만 있는 둘을 혼합하는 것이다.

종교를 정치에 끌어들이는 것은 종교의 윤리와 기준을 훼손하는 것이고, 종교를 타락시키는 것이다. 종교와 정치는 모두 부패하기 쉽고 잘못 해석하기 쉽지만, 여전히 종교 전체는 훨씬 더 높은 기준이 적용된다. 하지만 종교와 정치가 섞이면 이 기준은 훼손된다.

따라서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 영역에서 운영되어야 한다. 이 둘이 결합해서는 안 된다. 만약 도덕이나 윤리를 강요하려고 한다면, 억압적인 정부, 주안점과 실행 방식에서 무분별한 정부가 탄생하게 된다. 양심이 진실하고 참되려면, 법으로 통제해서는 안 된다.

종교 지도자는 훌륭한 정치 지도자가 되지 못하며, 정치 지도자는 훌륭한 종교 지도자가 되지 못한다. 사회가 돌아가는 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넘어서 더 높은 기준을 사람들에게 강요하면,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억압이 따르며, 종종 잔인하고 무차별적이다.

궁극적으로 종교는 신이 당신 내면에 심어 놓은 깊은 영적 지성인 앎과 접촉하도록 개개인을 데려가는 것이다. 이 앎이 바로 당신 영성의 근원지이며, 당신의 참 존재의 기반이다. 앎은 당신을 위해 당신이 세상에 온 큰 목적을 간직하고 있으며, 외부 세계에 의해 결코 타락할 수 없는 깊은 양심과 자각을 제공한다.

만약 앎을 접하고 앎과의 관계를 구축하도록 사람들에게 장려한다면, 당신은 그들에게 힘과 자유를 준다. 문화나 사회가 기대하는 규범을 넘어서까지, 또 종교인이라면, 종교 지도자가 명령하거나 종교가 규정하는 것을 넘어서까지 힘과 자유를 준다.

앎은 전적으로 윤리적이며, 자신과 갈등하지 않으므로, 더 높고 더 완벽한 삶의 경험을 보여준다. 이 경험은 외부에서 법을 만들어 통제할 수 없다. 앎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앎의 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앎의 본질적인 선함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법을 만들어 통제할 수 없다.

만약 종교가 사람들을 모으고 믿음과 복종을 강조하는 것 이상이 되려면, 종교는 앎으로 이어져야 한다. 종교는 사회와 문화가 당신에게 주입하려는 양심이 아니라, 신이 당신 내면에 창조한 양심으로 이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이 둘 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신이 창조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낸 것이다.

종교가 정치와 결합하면, 종교는 정치 안에 있는 기만과 타협과 한계를 모두 지닌 정치가 된다. 종교는 앎으로 가는 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위해 사람들의 지성과 능력을 이용하는 멍에와 같은 것이 된다.

제도적 차원에서 보면, 종교는 너무 부패하여 이제는 사람들의 잘못을 처벌하며, 심지어 그 잘못에 대해 사형까지 집행한다. 종교는 국가처럼 행동하며, 본질적으로 정치적이 되었다. 어떤 종교들은 사형이나 잔인한 형벌로 처벌받아야 할 죄가 있다고 믿으며, 종교나 정치 지도자가 이것을 집행해야 한다고 믿는다.

신은 어떤 종교에도 결코 이런 계율을 만들어 지키게 한 적이 없다. 이것은 순전히 인간의 발명품이다, 이것은 억지로 끼워 맞춘 것이며, 종교를 정치에 끌어들이려는 시도이다. 신은 사형이나 고문이나 체형을 재가한 적이 없다. 그것은 타락이고 오해이다. 그것은 종교를 저급한 정치 수준으로 끌어내렸으며, 이곳에서 일어나는 혐오스러운 일이다.

신은 세상에서 사는 것이 매우 어려워 온갖 잘못된 행동이 생겨날 것임을 안다. 그래서 신은 사람들을 안내하고 보호하고 삶의 더 큰 성취로 이끌기 위해 개개인의 내면에 앎을 심어 놓았다.

신은 당신이 실수를 저질렀다고 해서 벌하지 않으며, 심지어 매우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더라도 벌하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신의 은총을 경험할 당신 능력이 신의 행동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 때문에 줄어들거나 심지어 거부된다는 뜻일 뿐이다.

여기에는 지옥도 없고 처벌도 없다. 앎이 없다고 해서 왜 신이 당신을 벌하겠는가? 그것은 마치 아이를 아이라는 이유로 벌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남자를 남자라는 이유로 벌하거나, 여자를 여자라는 이유로 벌하는 것이다. 국가는 제약을 가해야 하고, 특정 행동을 억제해야 하며, 심지어 투옥하기도 해야 하지만, 종교는 이렇게 하지 않으며 이렇게 해서도 안 된다.

신은 벌하지 않으며, 복원시킨다. 신은 악한 자들을 지옥으로 보내지 않으며, 그들을 돌보고 천국을 예비한다. 신은 창조물을 미워하지 않으며, 쉽게 나약해지고 무능해지고 무지에 빠지게 되는 이들, 분리 속에 사는 이런 이들을 벌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의 뜻과 종교의 의도를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

종교는 더 높은 기준에서 살라는 부름, 신이 당신 내면에 심어 놓은 깊은 양심에 따라 살라는 부름이다. 이 양심은 앎으로 표현된다. 만약 이처럼 더 높은 기준과 양심에 따라 살지 못하면, 당신은 앎의 힘과 현존을 부정하고 신과 당신의 관계를 부정한 결과로 고통을 겪는다. 신은 이것 이상으로 당신을 벌하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진실한 삶에 따라 살지 않으면, 그 결과로 고통을 겪는다. 만약 당신이 자신과 타인에게 정직하지 못하면, 그 결과로 고통을 겪는다. 만약 당신이 자신의 내적 삶을 부정하면, 그 결과로 고통을 겪는다.

당신은 신의 은총과 힘과 안내를 경험하지 못한다. 당신은 소외되며, 이는 신이 당신을 거부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신을 거부했기 때문이고, 신이 당신을 벌해서가 아니라, 당신 내면, 즉 앎 안에 신이 심어 놓은 은총과 힘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앎을 따르면, 당신은 매우 자유롭고 책임감 있게 된다. 또한 여기에는 더 높은 수준의 진실성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제 옳고 그름의 차이를 명확히 이해하는 깊은 양심의 안내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을 통해 당신은 정치 지도자들, 특히 억압적이거나, 지배자층을 대표하거나, 본질적으로 권위적인 지도자들이 두려워할 수도 있는 자유를 얻는다. 그들은 개인이 갖는 이 자유를 두려워할 것이다. 그들은 종교가 국가를 지지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종교가 정치와 결합할 때 일어나는 일이다. 즉, 종교가 국가에 종속되고, 정치 지도자들의 도구가 된다. 종교는 그 사명을 잃었고, 그 진실성을 잃었으며, 그 참된 기능을 잃었다.

종교는 영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있으며, 정치는 행동을 유도하고 특정 행동을 억제하기 위해 있다. 신은 종교의 원천이다. 비록 종교가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 되었지만, 종교의 원천과 영감은 신에게서 나온다.

종교가 내세운 그 원칙과 주안점은 처음에 시작된 것과는 매우 다르다. 종교의 이야기들, 화려한 의식들, 해석들은 아주 많은 경우에 초기의 의도와 목적에서 너무 멀어져서, 이제 당신은 다른 것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종교가 복원되고 고양되어 더 높은 윤리적·도덕적 기준을 유지하려면, 종교는 정치나 정치 지도자의 통제 아래 있어서는 안 된다.

종교가 사람들의 깊은 양심에 말하게 하고,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도록 사람들을 지원하게 하라. 정치가 문명의 체계를 운영하는 일을 다루게 하라.

의사는 배관공이 되려고 하지 않으며, 배관공은 의사가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다른 영역에서 활동한다. 그들 둘은 모두 고치는 일을 하지만, 그 규모와 환경은 매우 다르다. 종교 지도자들은 정부의 행동을 바로잡고 논평하기 위해 항상 존재해야 하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정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더 완벽한 의미에서 종교는 정치를 정직하고 윤리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있다. 종교가 어느 정도까지 이렇게 하고 이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대부분 이것은 유익하다. 그러나 종교도 정부 지도자들과 정책들을 병들게 하는 동일한 오류에 빠지기 쉬우므로, 종교가 종교 지도자들에게 잘못된 이해를 강요한다면 심각한 해악을 끼칠 수 있다.

종교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이 실제로 종교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종교가 신을 숭배하고, 신의 뜻을 수행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신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신의 뜻은 이제 정치적 차원, 행동 규범의 차원, 범죄와 처벌의 차원으로 격하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실제로 모든 종교는 그 종교가 어떤 형태로 존재하든 간에 당신의 생각하는 마음을 깊은 연합으로 이끌고 신이 당신 내면에 심어 놓은 깊은 마음을 섬기게 한다. 이 깊은 마음은 정부의 통제 너머에 있고, 큰 힘과 깊은 양심을 따른다.

정부는 이것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정부는 절대 권력이 되고 싶어 하며, 최종 결정권을 갖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세상의 다른 권력과 경쟁해야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종교는 수년, 수 세기에 걸쳐 강력한 정치 세력과 경쟁해야 했고, 종종 그 세력에 굴복했다.

따라서 종교 지도자는 세상의 유혹을 충분히 초월하여 더 높은 기준에 따라 살아갈 수 있어야 하고, 그 기준에서 정부를 논평하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하며, 정치 지도자들을 더 높은 기준으로 이끌려고 노력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때, 이 높은 기준은 자비와 사랑과 관용에 기반을 두어야 하고, 개개인이 자신의 깊은 본성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데 기반을 두어야 한다.

여기서 종교는 심지어 종교 기관조차 넘어선다. 만약 당신의 종교 기관과 당신의 양심이 서로 다른 것을 주장한다면, 당신은 선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단순히 자신의 이성에 주입된 믿음 체계가 아니라, 자신의 진정한 양심, 신이 당신 내면에 심어 놓은 양심과 연결되어 있다면, 당신은 양심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종교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은 종교가 이성적 이해이며, 종교를 단순히 인간 행동의 지침 정도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종교는 이보다 더 크다. 왜냐하면 이성은 영이 하는 일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 행동의 모범들이 개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야 하는 창의성을 항상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 권력은 항상 종교 권력을 장악하고 통제 속에 두려고 하며, 정치 체제에 봉사하게 하려고 한다. 이것은 인류의 깊은 양심을 침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의 주된 책임은 양심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양심의 영역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옳고 그름은 내재적으로 알고, 느끼고,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당신은 아이에게 다른 사람들에게도 해롭고 자신에게도 해로운 어떤 것을 하지 말라고 가르쳐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른에게 종교는 앎과 다시 연결되는 것이어야 한다. 만약 이 주된 목적에 부합한다면, 종교는 효과적이며 인류를 위해 봉사한다. 만약 종교가 단순히 이념적 입장과 인간 행동에 대한 일련의 지침만을 만들려고 한다면, 실제로 종교는 정치 수준으로 전락한 상태가 되고 만다.

옳고 그름은 내재적으로 이미 안다. 그것은 이미 정해져 있다. 살인은 옳지 않다. 절도는 옳지 않다. 거짓 증언은 옳지 않다.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은 옳지 않다. 계명은 이를 명시했으며, 이는 명백하다. 하지만 문제는 “양심이 정부 지도자들의 기대나 대중의 의지와 상충하더라도, 사람들이 양심에 따라 살 수 있는가?”이다.

이것은 당신의 세상 마음과 깊은 영적 마음 사이의 긴장이다. 당신은 깊은 영적 마음을 바꿀 수는 없다. 따르거나 아니면 피할 수 있고, 영적 마음과 관계를 맺거나 아니면 관계를 맺지 않을 수는 있지만, 바꿀 수는 없다. 왜곡된 이해를 만들어내지 않는다면, 영적 마음을 재프로그래밍할 수도, 다르게 생각하게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정치와 종교를 섞지 말라. 이 둘은 서로 긴장 관계에 있다. 왜냐하면 종교는 정치를 더 높은 기준으로 유지하기 위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이때 높은 기준은 종교 이념이 아니라, 앎의 현실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앎은 수치로 측정될 수 없으며, 정치 영역으로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 앎은 어떤 분명한 것을 제외하고는 정부가 실제로 법으로 규정할 수 없다. 앎은 여전히 신비로우며, 신비이다. 정치는 구체적이고 실용적이어야 한다. 종교는 신비로워야 하며, 이성의 영역 너머, 사회적 지배 영역 너머로 당신을 데려가야 한다.

영과 이성은 다른 영역에서 작동한다. 하나는 다른 하나를 섬겨야 한다. 그러나 이성이 영을 섬기지 않는다면, 영은 결코 이성을 섬길 수 없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앎의 현실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부정하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다. 설령 앎의 현실과 타협하려고 해도, 당신은 앎의 현실을 부정하는 셈이 된다. 설령 개인적 이익에 앎의 현실을 이용하려고 해도, 당신은 앎의 현실을 부정하는 셈이 된다.

위대한 성인들과 현자들은 앎을 따랐다. 그들은 정치 지도자도 아니었으며, 치안 판사도 아니었다. 그들은 정강 정책이나 경제 정책을 만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비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람들이 정부의 명령이나 마음의 야심을 따르도록 압력과 유혹을 끊임없이 받는 세상에서, 앎이 계속 살아 있게 한다.

신의 뜻을 이처럼 분명히 밝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신은 앎을 통해, 분리된 이들을 복원하기 때문이다. 신은 앎을 통해 당신을 복원한다. 당신은 높은 목적이 있어 세상에 파견되었지만, 지금 이 순간 높은 목적을 실현하며 살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당신의 영과 당신의 혼에 필요한 것들은 충족되지 않고 있다. 당신은 불편하고, 산만하며, 불안하고, 안절부절못하며, 긴장하고 있다. 당신은 세상의 유혹이나 공포 등 세상의 영향력에 취약하고 지배받는다. 당신은 자신 밖에서 안내와 진실을 찾고 있지만,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완벽한 내적 안내인 앎은 당신 내면에 산다.

앎은 국가를 전복하기 위해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며, 다른 사람들을 예속시키기 위해 이곳에 있는 것도 아니다. 앎은 사람들의 안녕과 세상 자체의 안녕에 공헌하기 위해 이곳에 있다. 앎은 특정 방식으로 이것을 이루도록 당신 내면에 설계되어 있다. 즉 특정 활동을 수행하고, 특정 상황에서 특정인들에게 봉사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당신은 바로 이것을 위해 설계되어 있다. 그래서 당신에게 독특한 성격이 있다. 그래서 당신에게 독특한 설계가 있다. 그래서 당신에게 세상에 줄 독특한 선물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며, 이성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이것은 표면 마음 아래, 당신 내면의 훨씬 더 깊은 곳에서 드러나는 어떤 것이다. 세상에 절실히 필요한 것과 관련하여, 일단 당신이 준비가 되고, 공헌해야 할 곳을 찾았다면, 세상은 당신에게서 이 선물을 불러낼 것이다.

이 부름이 없으면, 당신은 직접 삶을 꾸미려고 한다. 일단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이 충족되면, 당신은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것으로 여겨지는 것에 기반을 두고 직접 삶을 꾸미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보는 세상을 만들었다. 불행하고 안절부절못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 너무 불완전하고 부패와 불안정에 너무 취약하여 살기가 매우 힘들고 어려운 세상을 만들었다.

정치는 이성을 위한 것이다. 종교는 앎을 위한 것이다. 그렇지만 정치 지도자들도 깊은 양심의 안내를 받을 수 있으며, 이것이 진보와 개혁을 위한 진정한 동기를 일으킨다. 앎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사람들을 안내할 수 있다. 앎은 이것을 하도록 설계되었다.

그러므로 앎으로 가는 길은 누구에게나, 삶의 모든 측면, 모든 직업에서 절실히 필요하다. 앎으로 가는 길은 어떤 정부도, 어떤 대학교도 제공할 수 없는 가르침을 제공하며, 당신 내면 깊은 수준에서 일어나는 삶의 움직임이다. 이것은 자비, 봉사하고자 하는 열망, 개개인의 내면에 있는 더 높은 윤리 기준을 낳는다. 심지어 이 윤리 기준은 당신의 문화나 사회가 강조하는 유익한 기준을 넘어선다.

그러므로 종교 사상에 기반을 둔 정치 기반을 만들지 말라.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그 과정에서 종교를 잃고, 그저 수많은 투사들 속에 있는 또 다른 투사가 될 뿐이다. 당신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속일 것이고, 다른 사람들을 해치고 전복시키려 할 것이며, 권력 다툼의 온갖 계략에 휘둘릴 것이다.

앎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이런 행위를 할 수 없다. 정치적 역할을 맡은 사람이 앎으로 강해지면, 그들은 자기 일에 더 큰 조화를 가져오고, 더 높은 기준을 적용하려고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앎이 강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앎을 정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매우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종교는 안 된다. 종교는 신성하게 유지되어야 하며, 세속화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야 앎의 힘과 현존이 보존될 수 있고, 인류를 억누르고 사슬에 묶어두는 다른 모든 성향과 동기에 대항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필요한 것이다.

또한 여성이 권력과 종교 지도자의 직책을 맡을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 여성은 더 높은 기준을 보호하고 유지하는 자질이 있다. 여성이 종교 기관에서 권력 있는 자리를 맡을 수 있게 하라. 여성이 종교 지도자가 되게 하라. 이렇게 하면 종교 가르침의 온전함을 보존하고, 그 가르침이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되어 문화와 정치의 한계를 넘어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여성이 더 큰 정치권력도 맡아야 한다. 인류는 여성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여성은 더 큰 권력을 가져야 하고 인정을 받아야 한다. 위대한 과학자, 위대한 정치 지도자, 위대한 교육자, 위대한 의사, 위대한 사회 운동가, 위대한 철학자가 될 운명을 타고난 여성들이 드러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인류는 인구의 절반을 부정할 것이며, 여성에게 종속적인 역할이나 가정 내 역할만을 부여함으로써 인구의 절반이 지닌 재능과 지혜를 부정할 것이다. 이것은 인류 진보에 큰 걸림돌이 되었으며, 수많은 사람을 세상에 오게 한 큰 목적을 크게 저해하고 부정하는 것이 되었다.

종교가 온전함을 유지하려면, 여성에게 이 권력을 부여해야 한다. 종교는 전통에서 벗어나야 한다. 왜냐하면 종교에는 문화와 정치의 지배를 받는 전통이 있으며, 그 전통이 종교에 많은 해를 끼쳤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에 종교는 그 가르침이 더이상 신의 뜻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의 전통과 제약을 말할 정도로 문화와 정치에 압도되었다.

이로 인해 여성은 억압받았으며, 종속된 위치, 가사만을 도맡아 하는 위치에 갇히게 되었다. 이것은 과거에도 그렇고 오늘날에도 전 세계 수많은 여성의 운명이 아니다. 인류 인구의 절반을 억압하지 말라. 이들을 억압하면, 인간 가족이 지닌 창의성의 절반과 인류의 복지와 진보에 이바지할 수 있는 공헌의 절반을 잃을 것이다.

종교가 더 높은 기준을 유지하려면, 또 종교가 사람들이 자기 삶에서 더 깊은 양심을 발견하는 통로, 앎의 힘과 현존을 발견하는 통로가 되려면, 문화가 종교에 맞추어야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 점에서 종교는 지금까지 부분적으로만 성공했다. 종교 지도자들도 부분적으로만 성공했다.

만약 당신이 영의 자유를 가르치려 한다면, 그 자유는 자유로워야 하고, 공정해야 하며, 문화의 양식과 관습을 초월해야 한다. 모든 여성이 어머니나 가정주부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에게 큰 목적을 갖지 못하게 하고 세상에서 표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인류에게 제공된 선물의 혜택을 거부하고, 여성을 감금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신의 뜻과 의도가 아니다. 여성은 단순히 남성의 종이 되도록 창조되지 않았다. 여성은 그들만이 가진 세상에서의 목적과 운명이 있다.

이런 제약들이 제거될 때, 종교도 바뀔 것이다. 이제 인류는 어려운 시기, 즉 세상의 큰 변화와 격변이 일어나는 시기, 환경 파괴와 자원의 한계가 드러나는 시기에 접어들고 있다. 모든 사람의 재능이 인류 사회의 모든 수준에서 발휘되어야 한다. 인구의 절반을 억압하면서 인류가 발전하고 큰 도전에 맞서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여기에는 더 큰 개혁이 있어야 한다. 모든 종교에서 더 큰 개혁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필요하다. 정부와 상업과 종교에서의 개혁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래서 신은 세상에 새 메시지를 보냈다. 이 새 메시지는 세상에 다가오는 변화의 큰 물결을 인류에게 경고하고, 외계에서 온 우주 종족들의 개입과 경쟁을 인류에게 경고하기 위해 이곳에 왔으며, 앎의 차원에서 영성과 종교를 가르치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리고 자멸하지 않도록 인류를 구하고 인간 가족을 위한 새롭고 더 나은 미래 기반을 쌓는 데 지금 필요한 우주의 지혜를 가져오기 위해 이곳에 왔으며, 지적 생명체로 이루어진 우주 큰 공동체에서의 인류 운명을 계시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신의 새 메시지는 창조주가 준 선물이며, 인류에 대한 깊은 사랑과 존중의 선물이다. 그렇지만 인류를 제지하는 수많은 것, 원시적이고 분열한 상태에 머물게 하는 수많은 것에 대한 큰 도전과 큰 교정을 동반한 선물이기도 하다.

신의 새 메시지는 인류를 하나의 큰 공동체로 보는 우주 큰 공동체 인식, 우주 자체를 큰 공동체 삶으로 보는 큰 공동체 인식을 나타낸다. 신의 새 메시지는 더 높은 수준의 이해이지만, 본질적으로 종교가 이곳에서 항상 행한 것을 성취한다. 그리고 종교의 역할은 사람들을 앎의 현실과 현존으로 이끌고, 앎에 담긴 깊은 양심으로 이끄는 것이다.

사람들의 행동이 스스로 교정되고, 내면에서 교정되고, 내면에서 인도될수록, 정부의 필요성은 줄어들고, 감옥의 필요성도 줄어들며, 법의 필요성도 줄어들 것이다. 사람들이 앎의 수준에서 내면으로 향하면 향할수록, 모든 사람의 안녕을 위해 서로 더 많이 협력할 것이며, 인간 현실의 모든 영역에서 세상에 꼭 필요한 재능을 더 많이 공헌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정부는 결코 앎을 대체할 수 없다. 세상과 인간 가족에게 앎이 부족하므로, 정부는 단지 인간의 행동을 통제하고 제지하려는 일만 할 수 있다.

앎과 함께하면, 당신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알 것이며, 자신과 타인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제지를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앎은 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강조되는 것이어야 한다. 앎의 현실, 앎으로 가는 길, 앎을 경험하고 앎을 표현하는 것, 바로 이것들이 종교의 기반이 되어야 한다. 전해 내려온 이야기를 강조하거나, 과거 인물을 숭배하려고 하거나, 세상의 창조에 관한 환상적인 이야기를 유지하려는 것이 종교의 기반이 되어서는 안 된다.

종교는 그 근간이 앎으로 가는 길이다. 모든 종교는 앎으로 가는 길이다. 왜냐하면 앎이 바로 당신을 복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신은 분리된 이들을 복원한다. 이런 식으로 신은 당신 삶을 압도하지 않고 당신을 안내한다. 이런 식으로 신은 당신에게 방향과 교정과 지혜를 주며, 유혹과 매력을 꿰뚫어 보고 인류를 잘못된 길로 이끄는 모든 세력을 꿰뚫어 보는 능력을 준다.

따라서 신의 새 메시지는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는 것과 앎길을 인간 경험의 윤리적·도덕적 기반으로 강조한다. 왜냐하면 이 기반이 더 강해질수록, 사람들은 바르게 행동할 것이고, 정부가 고압적으로 강요하는 것이나 종교와 문화의 제약이 없더라도, 자기 생각과 상황을 바꿀 힘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의 강요나 문화의 제약은 매우 다양한 측면에서 인류를 억누르고, 지금 인류가 마주하는 큰 도전들을 대처하는 데 그 효율성을 저해하고 있다.

신의 새 메시지는 여성 시대를 지지하며, 여성이 권력의 자리에 오르는 것, 특히 종교 분야에서, 또 행정 분야에서 권력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지지한다. 이것은 신의 순수한 메시지이다. 이 메시지는 정부에 의해 변질하거나 이용되지 않았다. 이 메시지는 문화와 결합하지 않았다. 이 메시지는 순수한 형태로 왔다. 그리고 그 진정한 주안점과 참된 목적에서 세계 모든 종교와 공명한다. 이 점을 당신이 명확히 이해했다면, 이것이 인간 정신의 회복이자 권한 부여라는 것을 알 것이다.

앎이 당신의 안내자이고 위안이 되기를 빈다. 앎이 삶의 곤경과 끊임없이 변하는 상황들에서 당신을 인도하기를 빈다. 앎이 당신을 강하게 하고, 당신에게 용기와 헌신과 자비를 주기를 빈다. 그리고 고군분투하는 인류를 위해 앎이 당신에게 이곳에서의 큰 운명을 보여주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