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5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가
받다
분명히 세상 모든 사람은, 심지어 가장 어린아이조차도 육체적 고통, 정서적 고통, 심리적 고통, 분리의 고통, 물질 현실의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가는 고통 등, 고통을 익히 안다. 이 고통에는 다양한 요인이 있다. 이 고통은 분명히 결핍이나 두려움과 관련이 있으며, 점점 더 나빠지는 어떤 것과 관련이 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인류의 노력은 훌륭한 일로도 이끌었고, 매우 파괴적인 일로도 이끌었다. 의료 서비스, 의약품 생산, 자비, 봉사, 타인을 돌보는 일, 치유 활동 등, 훌륭한 일로 이끌었다. 하지만 또한 허영의 추구와 개인적 성취로도 이끌었으며, 이것은 그 자체로 고통의 원천이 되었고 고통을 지속시켰다.
이 노력은 심지어 사람들을 전쟁으로도 이끌었으며, 자신의 고통에 책임이 있다고 여겨지는 다른 사람들을 반대하여 다른 사람들, 다른 인종이나 종교, 소수자들 등을 향해 잔인한 행동을 하도록 이끌었다. 그러므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방법을 택했지만, 그중에는 전적으로 유익한 방법도 있었고, 유익하지 않은 방법도 있었다.
고통이 자신의 근원과 분리된 삶, 자신이 왔고 결국 되돌아갈 영원한 삶과 분리된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아는 데서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 고통은 물질 현실에서, 몸을 지니고 살아가는 조건이다. 몸은 먹을 것을 주어야 하고, 보살펴주어야 하며, 비바람에서 보호해 주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의 공격이나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 등에서 보호해 주어야 한다.
고통은 삶의 일부이며, 당신이 무엇을 하든 당신과 동행할 것이다. 삶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인식과 자비를 추구하는 사람조차도 어느 정도는 고통을 경험할 것이다. 모든 고통에서 멀어지려고 하거나 애착·열정·욕망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고통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당신은 고통받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로워져야 할 것이고, 그들의 고통을 느낄 것이다. 설사 이 고통이 이 높은 상태에서 느끼는 당신의 고통이 아니더라도, 세상을 지켜보는 우리가 당신의 고통을 느끼듯이, 당신도 그들의 고통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당신의 고통을 느끼지만, 그것은 우리의 고통이 아니다. 따라서 분리의 삶 속에 사는 누구나, 심지어 당신이 사는 이 삶을 지켜보는 이들, 확장하는 위대한 천사의 현존들 사이에서도 어느 정도 이 고통을 느낄 것이다.
따라서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날 길은 없다.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두려움의 일부는 해악에서 당신을 보호하고, 위험을 경고하며, 어떤 식으로든 당신이 방향을 바꾸거나 자제해야 한다는 것을 당신에게 알리기 위해 여기에 있다. 그리고 삶의 고난이나 긴장된 현실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 단언컨대 약간의 고통과 스트레스가 있을 것이다.
완벽하게 행복한 삶을 살 수는 없다. 당신이 자신에게 정직하다면, 분리 속에 살면서 완벽하게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사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자신에게 정직하지 않으며, 자신에게 정서적으로 정직하지 않다.
이 세상에서 깨달음의 정점에 도달할 수 있는 극소수 사람조차도 돌아와서 봉사하고, 세상의 고통을 직시하고,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방식으로 고통을 완화하려고 해야 한다.
따라서 당신의 고통은 근본적으로 분리 속에서 사는 데서 생겨난다. 하지만 이 고통 역시 당신이 물질 현실에서 살고 있으므로 당신 경험의 일부이다. 그리고 물질 현실에서는 자원을 찾아야 하고, 다른 이들과 경쟁해야 하며, 변하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살아가는 위험을 마주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당신이 이곳에 있으려면 마주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여기서 말할 높은 목적을 위해 당신이 이곳에 왔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그때에도 당신은 물질 현실에서 살아가는 어려움을 마주해야 하며, 지금 세상이 변하기 시작하므로 당신 주변의 고통이 점점 더 커지는 것을 마주해야 할 것이다. 인류는 지구의 기후를 변화시켰고, 지구 자원을 과도하게 사용했으며, 고의로 했든 모르고 했든 다양한 방식으로 많은 곳에서 지구를 망쳐 놓았다. 그래서 이것으로 인해 앞으로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더 큰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고통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여기서 고통을 완전히는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모든 고통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속이고 다른 사람을 속이려고 할 것이다.
위대한 메신저들도 하늘에서 온 가장 큰 선물을 이곳에 전하기 위해 그들의 내면에도 있고 그들 주변에도 있는 모든 고통을 마주해야 했다. 그리고 겸손한 자세로 목적을 가지고 진정으로 인류에게 봉사하려는 이들은 모두 그렇게 봉사함으로써 고통을 경험할 것이며, 자신이 파견되어 봉사하는 상대방들의 고통도 틀림없이 경험할 것이다.
그러므로 바꾸어야 하고, 명확하게 보아야 하고, 이해해야 하는 것은 바로 고통과 당신의 관계이다. 왜냐하면 타당한 고통이 있고, 부당한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진실하고 자비로운 활동조차도 실제로 피할 수 없는 고통이 있으며, 자신의 잘못된 생활이나 마구잡이 삶에서 오고 자신의 잘못된 생각에서 오는 온갖 다른 형태의 부당한 고통이 있다.
육체적 질병이나 정신적 질병에서 오는 고통이 있다. 이것은 대부분의 경우 현실적이고 타당한 고통이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삶에서 환상을 추구하고, 자신을 위해 사람이나 장소, 그 밖의 다른 것들을 가지려고 하는 데서 오는 끝없는 고통, 여기서 완전히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고통도 있다. 그래서 부당한 고통의 요소와 정도는 겹겹이 쌓여 있으며, 세상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처음에는 이것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가능한 한 객관적인 방식으로 고통을 평가해야 하는데, 사람들 대부분이 처음에 이렇게 하기가 꽤 어렵다. 하지만 끈질기게 계속하면, 이윽고 당신은 더 명확하게 볼 수 있으며, 자신의 고통이 타당하든 부당하든 고통에서 이로움도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어느 쪽의 고통이든 삶에서 매우 필요한 것을 당신에게 가르쳐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고통을 통해 당신은 인내심을 배울 것이고, 삶을 명확하게 평가하는 법을 배울 것이다. 이 고통을 통해 당신은 당신 삶의 방향을 바꾸는 법을 배울 수 있고, 당신에게 일어난 일의 결과로 삶을 개선하는 법을 배울 수 있으며, 삶에서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추구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지혜를 배울 수 있다. 그리고 당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필요성을 틀림없이 배울 것이다.
심지어 고통은 당신을 신에게 더 가까이 데려갈 수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세상에서 어떤 것을 얻으려는 노력으로는 자아를 실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당신은 자신이 왔고 되돌아갈 큰 현실로 눈을 돌릴 것이다. 물론 당신은 신에게 되돌아갈 것이다. 신의 계획은 결국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끝은 아주 먼 훗날일 수 있다. 그리고 이 큰 연결이 없다면, 당신은 고통을 겪을 것이고, 계속해서 고통을 겪을 것이며, 주변 세상의 온갖 오류와 조종에 취약할 수 있다.
오늘 우리는 당신이 자신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주며, 이 열쇠와 함께 고통의 현실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즉, 고통이 당신 내면과 다른 사람들 내면에 왜 있는지, 전 세계에 왜 그 정도까지 있는지, 또 시간이 흐르면서 고통이 당신 내면과 다른 사람들 내면, 전 세계에서 어떻게 완화될 수 있고, 어느 정도까지 완화될 수 있는지 명확히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왜냐하면 물질 현실에서는 결코 완전한 행복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근원에서 분리된 삶, 당신이 왔고 되돌아갈 영원한 삶에서 분리된 삶에는 결코 완전한 행복이 있을 수 없다.
육체적 고통은 대부분의 경우 원인을 안다. 심리적 고통은 더 복잡하고, 물질 현실에서 자아를 실현하고 행복해지려는 시도와 더 관련이 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영적 고통이 있다. 당신이 살아야 한다고 아는 삶을 살지 않는 데서 오는 고통, 이 깊은 고통은 그 경험과 표현이 독특하다. 이 고통은 자신이 정말로 이곳에 와서 하기로 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느낌, 개인적으로 자신이 파견된 높은 목적을 실제로 이행하지 못한다는 느낌이다. 이것은 약물, 심리 치료, 영양 보충제, 식이요법, 운동, 그 어떤 것으로도 완화할 수 없는 고통을 야기한다.
이 깊은 고통은 결국 인지해야 하고 완화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당신이 큰 목적을 위해 이곳에 왔고, 자신이 직접 이 목적을 창안해 내거나 규정할 수 없으며, 하늘이 부여한 이 목적을 단계적이고 점진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하면 진정으로 완화될 수 있는 그런 고통이다. 이처럼 인정하는 것이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고,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는 겪는 혼란의 안개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당신은 높은 목적을 위해 세상에 왔다. 바로 이 높은 목적이 당신의 고향, 당신을 파견한 이들, 시공간의 한계를 넘어 당신의 참된 삶과 당신을 연결한다. 이 높은 목적을 모르고, 이 목적에 따라 살지 않고, 이 목적을 찾지 않는 것은 물질 현실에서 목적 없이 방황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이 가진 것을 보호하려 하고, 일시적이고 종종 의미 없는 것에서 큰 성취를 추구하려고 하고, 고통을 전혀 직시하지 않고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나 고통을 명확하게 볼 수 있으면, 당신은 고통이 주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사람들 대부분은 과거에서 도망치고, 고통에서 도망친다. 그리고 다음 관계를 찾거나, 부를 추구하거나, 즐거움을 찾거나, 도피처를 찾거나, 세상에 대한 복수와 분노로 가득 찬 극심한 부정 속에서 산다. 여기에는 안도감이 없다. 단지 당신의 비참함을 연장할 뿐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고통은 직시해야 하는 것이 되고, 자비롭게 직시해야 하는 것이 된다. 신이 당신 내면에 심어 놓은 앎의 힘을 모른다면, 당신이 어떻게 고통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신이 당신 내면에 심어 놓은 앎의 안내가 없으면, 당신이 어떻게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겠는가? 당신 내면에서 이 큰 안내자와 나침반이 당신에게 길을 보여주지 않으면, 당신이 어떻게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으며, 목적이 없거나 파괴적인 삶을 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당신의 과거를 자비롭고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뜻이며, 신이 당신에게 준 이 큰 힘이 없다면 당신은 단지 방황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끌리고, 문화와 종교의 영향이나 가족에게 떠밀려 처음부터 당신에게 결코 진실하지 않은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뜻이다.
이것은 더 깊은 차원에서 겪는 고통이다. 비록 당신이 오늘날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이 그러하듯이 과거에 학대당하지 않고 따뜻한 보살핌을 받았다 하더라도, 목적과 의미가 없는 삶은 고통스러운 삶이다. 당신은 시간이 지나면서 낙담할 것이다. 당신은 점점 커지는 환멸과 실망을 안고 살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과 다른 사람들, 심지어 세상 전체에 크게 분노할 수 있으며, 심지어 신이 이 파괴적인 세상과 분리의 삶을 창조했다고 생각하면서 신에게조차 크게 분노할 수 있다. 그런데 분리 속에 사는 것이야말로 근원에서 고통을 낳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 근원 밖에서도 매우 다양한 수준에서 고통이 발현된다.
궁극적으로 만약 당신이 직접 규정하거나 창조할 수 없는 삶의 큰 부름에 응답하기 시작하고, 그 부름을 단계적으로 참을성 있고 겸손하면서도 아주 단호하게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그때 비로소 당신 삶이 진정한 질서를 잡을 수 있다. 당신이 부유하든 가난하든, 자유 국가에서 살든 자유가 없는 국가에서 살든, 세상 어디에서 살든, 그것은 상관없다. 물론 상황은 다르지만, 모든 상황에는 기회도 있고 불리한 점도 있다. 이처럼 당신 삶이 진정한 질서를 잡을 수 있을 때만 비로소 당신은 과거의 그림자와 후회에서 벗어나면서, 진정으로 건강한 삶, 균형 잡힌 삶, 봉사와 의미 있는 삶을 사는 법을 점차 배울 것이다.
고통의 완전한 끝은 없지만, 당신을 기다리는 큰 목적과 의미 있는 삶은 있다. 바로 이 삶이 대부분의 고통을 완화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이 취약한 세상의 많은 것에서 당신을 보호할 것이다. 즉 설득과 지배의 위협, 처벌의 위협, 중독의 위협, 잇따라 실패한 관계들의 위협, 건강하지도 않고 초점도 없는 삶을 사는 것의 위협에서 당신을 보호할 것이다.
이것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에게 도전하고 고통의 조건을 만들어내는 것 중 일부에 불과하다. 설사 당신이 기본적으로 신체에 필요한 것, 즉 의식주와 안전보장 등을 충족했더라도, 이제 분리 자체에서 살면서 생기는 고통을 마주한다. 설사 당신이 세상 대부분의 위험에서 보호를 받더라도―물론 당신이 이곳에 있는 한 결코 완전하게 보호받지는 않겠지만―당신은 더 성장하면서 세상에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경험한 것에서 심리적 손상과 정서적 손상을 볼 것이고, 목적과 진정한 의미와 방향 없이 사는 결과를 볼 것이다.
이것은 더 높은 수준의 고통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 고통을 명확하게 본다면, 여기에서 당신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무엇을 추구하지 말아야 하는지, 무엇을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지, 무엇을 선택하지 말아야 하는지, 자신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세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배울 것이다. 객관적으로 볼 수만 있다면, 고통은 이것들을 가르쳐주는 대단히 훌륭한 교사이다. 하지만 이렇게 할 수 있으려면, 당신은 삶의 목적에 대한 진정한 감각을 키우고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앎으로 가는 계단을 실제로 밟아야 할 것이다. 이 앎으로 가는 계단은 마침내 신이 지금 세상을 위한 큰 계시에 제공하고 있으며, 거의 모든 사람이 살고 있는 분리의 고립과 혼란의 안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늘에서 내려온 사다리이다.
다음으로 잠깐 고립에 대해 말해 보겠다. 분리 속에 사는 것은 모든 것과 연결되도록 설계된 당신에게는 정말로 어렵다. 고립은 그 분리의 가장 극단적인 경험이다. 고립은 그저 당신이 혼자이고 당신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뜻이 아니다. 당신은 대가족 속에 살고, 결혼해서 아이들이 있는데도, 당신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당신 주변에 사람들이 있고, 당신이 그들을 사랑하거나 그들이 당신을 사랑하더라도, 당신은 고립된 채, 이곳에 온 당신의 참된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방식으로 당신과 당신 삶을 규정하는 일련의 상황에 갇혀 있다. 분리의 가장 극단적인 사례인 고립은 군중 속에서도 경험할 수 있고, 가족 관계 안에서도 경험할 수 있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은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당신 삶을 지켜보고 보살피는 이들이 있다. 일단 당신이 삶의 큰 의미와 큰 목적과 큰 방향에 대한 필요성에 반응하기 시작하고 이것을 받아들이면, 그것은 큰 정직의 행위이고, 세상에 대해 실망하고 환멸을 느낀 결과인데, 여기에서 당신은 자신을 위한 또 다른 관계, 또 다른 소유물, 또 다른 획득이 실제로 변화를 일으키지 않을 것임을 알게 되고, 당신이 그러한 것들을 찾기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와 그것들을 찾지 못해 직면하게 될 실망이 매우 커서 더 높은 길을 찾게 된다.
더 높은 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당신은 안내를 위해 하늘에 기도한다. 단순히 상황이 좋지 않을 때 이런저런 단순한 요청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진지하고 단호하게 진실로 기도한다. 하늘이 바로 이 메시지에 응답한다. 이제 당신은 진지하다. 당신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삶이 흘러가지 않을 때만 구세주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의 응답은 단순히 현재 당신의 기분을 나아지게 하기 위해 주는 완화제가 아니다. 신은 당신이 고통을 마주하여, 당신 삶을 참된 방향으로 이끄는 데 그 고통이 당신에게 줄 수 있는 지혜와 도움을 보기를 원한다.
큰 길은 실망과 환멸로 시작되며, 당신이 이전에 했던 것, 심지어 이전에 생각하고 믿었던 것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렇게 벗어날 때, 당신은 엄청난 혼란과 불확실성의 위치로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 문이 열리기 시작한다.
물론 당신은 여전히 혼란의 안개 속에서 살면서, 무엇을 따라야 할지 모르고,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모르고, 어떤 실질적 확신도 없는 상태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것이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의 바람에 따라가고, 군중을 따라가고, 종교나 문화가 당신에게 알려주는 대로 따라가고, 다른 세력의 노예가 되고, 들판에 있는 양이 될 것이다. 하지만 신에게는 당신을 위한 다른 계획이 있다.
하지만 이것을 알려면, 당신은 삶에서 새로운 여행, 많은 계단이 있는 여행을 시작해야 한다. 이 여행은 당신이 통제할 수 없지만, 놀랍게도 이 여행을 하려면 자신을 통제해야 하며, 또한 당신이 창안한 것이 아니지만, 자신이 무엇을 하고 누구와 함께 있는지에 대한 신중함과 분별력이 훨씬 더 많이 필요할 것이다.
이 여행을 통해 당신은 세상의 고통에서 벗어날 것이다. 물론 당신은 그 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고통을 겪을 것이며, 여전히 여기저기서 환상을 추구하거나, 사람이나 장소, 그 밖의 다른 것들에서 로맨스를 추구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이 이 방향으로 계속 나아간다면, 여기에 쏟는 힘은 약해질 것이다. 그러면 이것들 너머를 볼 수 있으며, 여전히 그러한 추구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자비심을 갖게 될 것이다.
당신은 이제 자신의 과거를 앎 없는 삶의 표본으로 바라볼 것이며, 그 과거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 그 과거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삶으로 바라볼 것이다. 당신의 과거는 도망쳐야 하는 것이기보다는, 이제 당신에게 자원이 된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이 깊은 앎 없이 사는 것이 얼마나 절망적인지에 대한 증거가 되고, 큰 삶에 대한 필요성, 삶의 큰 목적에 대한 필요성, 욕망과 환상, 기분에 따라 변하는 마음에 기반을 두지 않는 큰 방향에 대한 필요성 등이 된다.
여기서 당신은 주변의 모든 사람이 알지 못하거나 너무 두려워 마주할 수 없는 자유를 얻기 시작한다. 여기서 당신은 자신을 이끌어야 하며, 당신 자신을 이끌 때 큰 힘이 당신을 이끌 것이다. 놀랍게도, 당신이 이 큰 힘에 내주기 시작하면, 당신 자신이 마침내 확신과 자비심을 가지고 건강한 방식으로 마음과 감정을 통제할 수 있다. 마침내 당신은 자신이 무엇을 생각할지, 당신 마음을 어디로 향하게 할지, 무엇을 선택할지 명확하게 결정할 수 있다. 이전에는 이것이 꼭 가능하지는 않았다.
당신은 타인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상실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며, 세상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자기 생각이나 다른 사람의 생각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실망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며, 심지어 상당 부분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서도 벗어난다.
여기에서 많은 고통과 잠재적인 고통이 완화된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에는 이것이 얼마나 큰 안도감인지 거의 이해할 수 없다. 영감은 아주 적고 혼란과 고통은 많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영감은 많고 혼란과 고통이 약간 있는 삶을 결국 살게 된다.
만약 당신이 오늘 여기서 우리가 당신에게 말하는 것을 듣고 이 방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당신은 평범한 삶 너머에 있는 삶의 큰 여행을 시작할 수 있다. 이 삶은 당신을 더 단순하고, 더 강력하고, 더 단도직입적이고, 당신 내면에서 더 통합하게 할 것이다.
이런 일은 한꺼번에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삶에서 큰 여행을 시작하면 항상 그렇듯이, 당신은 처음에 비틀거리고 방황할 것이다. 물론 당신에게는 좋은 날도 있고 나쁜 날도 있겠지만, 당신 가슴은 마침내 당신이 응답하고 있다는 것에 안도할 것이다.
이렇게 응답하고 나면 당신은 내면의 가장 깊은 고통을 다룬다. 그 고통은 당신이 이곳에 와서 하기로 한 것을 성취하지 않은 것, 거의 모든 사람이 삶에서 겪는 문제의 기반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고통을 도피, 즐거움, 환상, 다른 사람들의 주장을 통해 완화하고자 한다.
당신이 다른 모든 것에서 추구하지만 성공하지 못한 균형, 봉사, 의미를 당신 삶에 가져다주는 법을 신은 안다. 신은 신에게 가는 길을 안다. 종교는 실제로 신에게 가는 길을 모른다. 종교는 일반 대중을 위한 처방일 뿐이다. 그러나 더 깊은 부름은 개인의 수준에서 일어난 어떤 것이다. 사람들은 어떤 것을 믿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이 아직 깨닫지 못한 큰 진실인, 그들 내면에 있는 깊은 부름과 앎의 힘에 응답하기 때문에 구원받는다.
하지만 이 여행에는 큰 명확성, 큰 분별력, 큰 결단력이 필요하고, 자기 과거의 실수와 지금 이 순간에도 저지를 수 있는 실수를 직시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여기에는 자만심도 없고, 자신을 미화하는 것도 없다. 그리고 자신을 치유자나 교사나 화신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당신은 오늘날 사람들 대부분이 생각하는 수준 이상의 정직성에 도달해야 한다. 당신은 큰 진실을 기다려야 하고, 대부분의 경우 결론을 내리지 않고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마음을 조용히 하는 법, 고요히 있는 법, 귀 기울여 듣는 법을 배워야 하고, 이런 식으로 응답할 수 있는 법, 책임질 수 있는 법을 배워야 한다.
신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길인, 앎으로 가는 계단을 제공했다. 당신은 그저 이 앎 계단을 밟고, 도전을 받아들이고,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된다. 부유하든 가난하든, 동양인이든 서양인이든, 북반구에 살든 남반구에 살든, 이 앎으로 가는 계단은 응답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당신은 거의 모든 사람을 속박하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많은 경험을 통해 볼 수 있는 눈, 들을 수 있는 귀를 갖게 된다.
여기서 당신 삶은 참된 질서, 참된 목적, 참된 의미로 돌아온다. 이것이 바로 신이 당신을 회복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당신이 아름다운 어떤 것을 세상에 줄 수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줄 수 있으며, 당신 주변 삶에도 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