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05월 07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가
받다
사람들은 신을 신뢰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그리고 옛날 신, 심판하는 신, 비난하는 신이라는 관념에 기반을 두고 자신의 불신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보다 더 복잡하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내면에 있는 무엇을 신뢰해야 할지 모르므로, 그들의 불신이 모든 것에 스며 있다. 그리고 신이 그들을 안내하기 위해 그들 내면에 심어 놓은 깊은 앎의 안내가 없으면, 그들은 가장 신뢰할 수 없는 것, 가장 일시적이고 불확실한 것을 신뢰한다. 그들은 자신의 가슴을 사람, 장소, 그 밖의 다른 것들에 내주고, 이렇게 하는 것이 얼마나 큰 결과를 초래할지, 이런 방식으로 자신을 제한하고 나면 나중에 자신의 자유와 온전함을 되찾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지 못한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을 신뢰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파괴하거나 훼손할 수 있는, 물리적이고 변할 수 있는 것도 신뢰하기 어렵다. 이런 의미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신뢰할 만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파괴될 수도 없고, 비방받을 수도 없기 때문이며, 또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 속에서는 흔히 왜곡되기는 하지만, 그것 말고는 심지어 왜곡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을 신뢰한다는 것은 자기 내면에 있는 무엇을 신뢰해야 하는지, 신이 어떤 존재라고 믿는지, 신이 세상에서 어떻게 일하는지에 대한 물음이 되며, 이 물음들을 둘러싼 큰 문제들과 의문들이 된다. 이런 문제들은 오랫동안 인류를 괴롭혀 왔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들을 다룰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명확히 밝혀져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들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으면, 문제들은 존재할 것이고 신뢰는 가장 나약한 가정과 근거에 기반을 둘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당신은 삶에서 무엇을 신뢰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여기서 사람들은 자신의 확고한 신념, 자신의 주장과 개인적 의견을 신뢰하고, 다른 사람들이나 자기 자신이나 세상에 대한 불만을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 이제 그들은 너무 두려워 자신을 넘어서는 어떤 것을 신뢰하지 못하므로, 자기 생각만을 전적으로 신뢰한다. 그런데 그들의 생각은 현실에 기반을 둔 경우가 드물고, 일관성도 거의 없으며, 전혀 영속성도 없다.
여기서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에 묶여 있다. 그들은 삶을 진정으로 경험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서 동질감, 친밀감, 공명을 느낄 수 없으므로, 자기 생각에 얽매이게 된다. 콘크리트로 만든 요새의 작은 창문을 통해 살펴보면서, 그들은 자신을 당황스럽게 하는 세상, 자신을 놀라게 하고 혼란스럽게 하는 세상을 보고 이해하려고 한다.
자신의 관념에 집착하면 할수록 그들은 더 갇히게 된다. 다른 사람에 대한 비난이나 세상에 대한 불만에 더 얽매이면 얽매일수록, 그들은 삶의 기쁨을 더 경험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이 순간의 넓은 공간, 그들 주변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삶의 기적, 신이 그들 내면에 심어 놓은 축복받은 현존과 힘과 권한을 경험하지 못한다. 이것들은 이성의 영역과 범위 너머에 있다.
이것이 인류의 상태이다. 인류는 전 세계에 대단히 만연한 빈곤과 타락뿐만 아니라, 자신의 믿음·두려움·주장에 얽매여 있다. 그들은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으며, 진실을 알 수도 없다.
물론 신은 이것을 이해한다. 왜냐하면 당신이 물질 현실에 살면서 신과 분리되고 창조물과 분리될 때, 당신은 신이 당신 내면에 심어 놓은, 내적 힘, 강함, 온전함의 근원에서도 분리되기 때문이다. 그 근원은 항상 당신 내면에서 사는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따르기를 기다리고 있다. 오직 이 현실에서만 당신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고 자신의 생각과 태도에 스며 있는 엄청난 혼란, 정글, 미로에서 벗어날 길을 찾을 수 있다.
하늘은 당신 주변 어디에나 있지만, 당신은 하늘을 느낄 수도 없으며, 아직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다. 왜냐하면 당신 마음이 당신의 관념, 다른 사람들의 관념, 당신 주변의 영향, 당신의 조건화와 문화, 심지어 종교 자체까지 마음 자체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신을 믿지만, 신이 하는 말을 듣거나 신을 느끼거나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믿음을 굳건히 하고 자신의 관념을 방어하는 데 모든 역점을 둔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삶 전체가 신과 종교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자신의 근원에서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
신을 안다는 것은 신이 당신 내면에 심어 놓은 현존과 힘을 발견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만 당신은 당신 삶의 참된 방향과 참된 내용이 있는 목적과 힘과 공명을 경험하고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정말로 누구인지는 세상이 아니라 하늘이 결정한다. 당신이 이곳에 와서 실제로 무엇을 할 것인지는 하늘이 결정하고, 당신을 이곳에 파견한 이들이 결정한다. 세상이 결정하거나, 세상에서 규정하는 일들, 영향력, 통제 세력, 압력을 가하는 것들이 결정하지 않는다.
신은 이런 식으로 당신을 복원한다. 믿음이나 예배를 통해서, 혹은 고정 관념을 굳게 고수하는 것으로는 복원되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는 빛으로 가는 다리를 건너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을 하더라도, 당신은 여전히 낯선 해안가에 서 있다. 그리고 신이 당신을 부를지라도, 당신은 들을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 마음은 닫혀 있고, 고정되어 있으며, 마치 쇠고랑으로 벽에 묶여 있는 것처럼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내면에서 신뢰해야 하는 것을 알아야 하며, 그것이 당신의 관념만이어서는 안 된다. 앎 자체에 기반을 두지 않으면, 당신의 관념은 문화와 영향력의 산물, 자신의 두려움에서 비롯된 선호와 설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종교에 대한 개념이 없는 사람이 실제로 종교에 전 생애를 바친 사람보다 이 힘과 현존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도 있다. 왜냐하면 신은 신에게 가는 길을 알기 때문이다. 신은 당신을 안내하고 보호하기 위해, 또 세상에서 봉사하는 큰 삶에 당신을 준비시키기 위해 당신 내면에 힘과 현존을 심어 놓았다. 이 힘과 현존은 종교 안에서도 살고, 종교 밖에서도 살며,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
신은 당신의 종교적 믿음에 설득되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이 큰 하사품을 찾아 따를 수 없다면, 당신은 여전히 세상에서 헤매고, 분리 속에서 헤맨다. 깊은 본성에서 분리되고, 신이 당신에게 준 앎의 힘에서 분리되고, 다른 이들과 분리되고, 자기 자신과 분리되고, 심지어 다른 사람들 가운데 있으면서도 고립되어 살면서 분리 속에서 헤맨다.
오직 신만이 절망적으로 보이는 이 상황에서 당신을 해방하는 법을 안다. 신은 세상을 위한 새 계시에서 앎으로 가는 계단을 제공했다. 새 계시는 순수하고, 명확하며, 인간의 채택이나 조작으로 인해 바뀌지도, 희석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근원에서 온 모든 말은 신성하고 강력하며, 변하는 세상과 지적 생명으로 가득 찬 우주의 문턱에 서 있는 인류에게 또 다른 기회를 줄 수 있다.
종교의 본질은 이념과 제도를 중심으로 구축되면서 흐려지며, 사상이나 믿음이나 설득을 통해 사람들에게 순응하고 신봉하도록 강요하면서 흐려진다.
신을 신뢰할 수 있으려면, 당신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 내면에서 신뢰해야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때 당신 앞에 길이 열린다. 신을 신뢰하는 것은 단순히 올바른 관념만 갖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도움이 되고 처음에는 필요할 수도 있기는 하다. 당신은 올바른 방향이 있어야 하며, 문화와 종교의 사상이나 개념에 순응하기를 원하는 주변의 설득에 휘둘리지 않고 독립적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은 비난 없이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제대로 보지 못할 것이다. 판단하고 불평하면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당신이 판단하고 불평하는 것이 아무리 옳다고 생각하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은 당신이 보고, 알고, 이해하는 것을 방해할 것이다.
따라서 당신은 세상에서 안전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안전은 신이 당신에게 준 깊은 힘과 함께하면서 보고, 알고, 이해할 때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깊은 힘은 당신에게 무엇이 가치 있고 무엇이 가치 없는지, 당신 내면과 다른 사람들 내면에 있는 어떤 것에 귀 기울여야 하는지 가르쳐 줄 것이며, 당신 마음이 미친 동물처럼 날뛰지 않도록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알려주고, 당신이 스스로 생각하여 이성의 힘을 원래 목적대로 효과적으로 적절하게 사용하는 데 자유로울 수 있도록 독자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도록 알려줄 것이다.
그다음으로 당신은 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신이 세상에서 어떻게 일한다고 생각하는지, 또 심지어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기나 하는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이것은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심지어 생각의 수준에서도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는지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만약 당신이 자신을 그저 몸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면, 몸이 없는 존재(no body)처럼 보이는 신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신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nobody)이다. 당신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nobody)이기를 원하는가? 자신의 생각과 마음이 자신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신의 마음과 뜻과 현존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은 세상에서 소통하기 위한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당신의 참된 본성도 아니고, 진짜 본연의 당신도 아니다.
이 세상을 떠나면 당신에게는 어떤 믿음도 없을 것이다. 당신은 세상에 오기 전처럼 그저 존재할 것이다. 따라서 믿음을 통해서는 당신이 신에게 다가갈 수 없으며, 빛의 다리를 건널 수 없다.
그렇지만 어떤 형태로든 믿음이 없이는 실제로 살 수 없으므로, 당신은 세상에서 자신의 생각과 행동과 활동의 방향을 잡는 데 도움이 되도록 일시적인 체계로서 믿음을 사용하며, 그것은 적절하다. 그러나 더 큰 물음은 답하지 않은 상태로 남겨두어야 하며, 이는 단순히 생각하고 추측하는 것이 아닌 실제 경험의 영역으로 당신을 이끌어야 한다.
신을 느끼려면,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하며, 마음이나 몸과 당신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생각과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생각과 이해를 통해 이전에는 볼 수 없던 것을 볼 절호의 기회를 얻고, 삶에서 마음과 몸을 활용하는 법, 또 마음과 몸이 그저 당신을 방해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섬기는 법을 올바르게 이해할 절호의 기회를 얻기 때문이다.
앎이 없다면 마음은 가시 면류관과 같다. 마음을 통해 당신은 세상에서 인정받을 수는 있지만, 앎이 없는 마음은 내적으로 고통스럽고 불편하다. 그래서 온갖 쾌락과 중독과 집착에 빠져 있는 마음에서 벗어나려고 할 것이다.
만약 신이 단순히 형상이나 개념, 체계화된 개념이나 믿음 체계가 아니라, 영이라면, 당신은 접근할 때 이러한 것들을 넘어서야 한다. 신은 당신에게 앎으로 가는 계단을 제공했으며, 그리하여 당신이 사고의 한계를 넘어서고, 스스로 부과했거나 남들이 당신에게 부과하도록 당신이 허용한 제약에서 벗어나게 하여, 보고 알고 이해할 이 기회를 주었다.
그러므로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여기서 이해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모든 것의 관계를 올바르게 볼 수 없으면, 당신은 그것들을 몹시 혼동할 것이고, 당신의 접근 방식은 왜곡되고 불확실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 당신은 다시 혼란에 빠질 것이고, 이 깊은 혼란에서 모든 오류와 오해가 생겨날 것이다.
이것은 당신이 숙고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자신을 단지 몸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실제로 자신의 몸만큼이나 세상에서 연약하고 취약하다고 느낄 것이다. 만약 자신을 단지 마음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마음을 이용하여 마음 자체를 방어하고 마음의 관념을 방어하려 할 것이며, 심지어 당신의 관념을 방어하기 위해 다른 사람과 전쟁을 벌이고, 증오와 살인과 대혼란까지 일으킬 것이다. 당신은 두려움과 불확실성 속에서 살며, 자기 생각이나 논리의 자만과 오만으로 이 두려움과 불확실성을 상쇄하려고 하겠지만, 그것은 단지 불확실한 세상에 적응하려는 시도일 뿐이다.
당신은 이런 것들 너머에 존재하는 자신을 보아야 하며, 몸과 마음을 훌륭한 소통 수단으로 활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몸과 마음이 없다면, 당신은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수가 없으며, 세상에 자신의 선물을 줄 수가 없다. 몸과 마음이 없다면, 우주의 지혜를 지니고 있을지라도, 아무도 당신의 말을 들을 수도, 당신을 볼 수도, 당신의 실연을 이해할 수도 없다.
세 번째로 숙고해야 할 것은 신과의 관계, 세상에서의 당신 경험 및 세상 자체이다. 여기서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사람들은 신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일으키는 장본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신은 다정한 신이 될 수 없고, 지혜로운 신이 될 수 없으며, 자비로운 신이 될 수 없다.
아이들이 암으로 죽어가고, 국민이 기아로 목숨을 잃고, 내전과 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는데, 당신은 신이 이런 일들을 일으키는 장본인이라고 여기는가? 당신은 분명히 그런 신을 믿을 수 없을 것이고, 사랑할 수도 없을 것이며, 따를 수도 없을 것이다.
당신이 세상에서 보는 고통, 갈등, 타락은 부유한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모두 인간의 혼란과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을 안내하고, 축복하고, 다른 사람들과 올바르게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하는 앎의 힘과 현존 없이 사는 데서 비롯된 것이며, 또 분리되어 사는 것, 즉 자기 자신과 단절되고, 자신의 근원과 단절되고, 자신의 영적 힘, 성실성, 확실성, 방향의 중심과 단절되어 사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세상은 이렇게 보일 것이다. 세상이 더 나빠 보이지 않는 것이 기적이다.
사람은 선하면서 악하고, 고귀하면서 한심하며, 바람직하면서 바람직하지 않은 온갖 자질을 다 보여준다. 누가 이것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신이 그렇게 모순되는 생물체를 창조했는가? 신이 당신을 그렇게 어렵고 불확실한 환경 속에 처하도록 했는가? 신이 당신을 하늘에서 내던져 끊임없이 변하는 상황, 큰 위험과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게 했는가?
여기서 올바르게 이해하면, 당신은 모든 것과의 관계를 다르게 볼 기회를 얻는다. 여기서 이해는 중요하지만, 당신이 과거에 겪은 고통과 부유한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당신 주변 모든 곳에서 보는 고통을 넘어설 수 있게 해주는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신은 세상의 날씨를 관리하지 않는다. 신은 당신의 혈관을 통해 피를 돌게 하지 않는다. 신은 절벽 아래로 폭포수를 쏟지도 않는다. 신은 땅에서 씨앗을 싹 틔우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은 분리가 시작된 태초에 돌아가도록 설정되었다. 바로 그 분리가 당신을 세상에 오게 했으며, 신이 당신 내면에 심어 놓은 힘과 현존을 따르는 법을 당신이 배울 수 있을 때까지 당신을 계속 여기 있게 한다. 그리고 이 힘과 현존은 당신과 함께 분리된 삶 속에서 사는 모든 민족, 모든 종교, 인간 가족, 무수히 많은 우주 종족 등 모두가 이용할 수 있다. 분리를 만든 것은 분리 자체와 마찬가지로 당신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이지만, 당신은 매일 그 영향을 받으며 산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 신을 탓하지 말라. 질병이나 불행에 대해 신을 탓하지 말라. 마치 모든 사건이 당신에게 의미와 목적과 가치가 있기나 한 것처럼, 모든 것이 신의 계획에 따라 일어난다고 생각하지 말라.
세상은 혼란스럽고 불확실하다.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바뀔 수 있다. 보장된 것이 없다. 그래서 신은 앎이라는 큰 하사품을 당신에게 주었다. 왜냐하면 앎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확실하고 순수하고 효과적인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경험에서 앎을 인지하는 법을 배우라. 욕망과 두려움보다 앎을 소중히 여기는 법을 배우라. 당신이 앎 없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때 당신이 입은 끔찍한 손실은 무엇이고 오류와 오해를 통해 당신이 치른 엄청난 대가는 무엇인지 인지하는 법을 배우라. 당신은 마침내 앎을 소중히 여기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앎이 유일한 당신 삶의 참된 희망이고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신은 분리된 자를 앎을 통해 구원한다. 온 우주의 주인, 우주 모든 차원의 주인은 당신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관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은 슬기롭기 때문이다. 신은 당신에게 분리 속에서 살 자유를 준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의 초기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환경에서 사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그러므로 신은 당신에게 큰 하사품을 주었다. 그 하사품은 결국 무엇보다 가장 큰 선물이지만, 당신이 이 선물을 보고 알기 위해서는 이 선물을 인지하고 소중히 여기며,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으면서 따르는 법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복귀의 시작이며,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큰 삶을 가져오는 것이다. 당신이 살기로 되어 있는 삶, 당신이 아직 살고 있지 않는 삶, 당신이 이곳에서 참된 행복과 성취를 찾기 위해 살아야 할 삶을 가져오는 것이다.
신은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기도 전에, 형성되기까지 대단히 긴 시간이 걸린 지질학적·생물학적 힘들이 저절로 돌아가게 했다. 그러나 시간이 당신에게는 모든 것일망정 신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니 삶에서 일어나는 상황들을 보고 신을 탓하지 말라. 심지어 당신과 당신의 안녕을 전혀 고려하지 않아 보이는 자연의 가혹함에 대해서도 신을 탓하지 말라. 태풍이나 지진, 전염병이나 기아에 대해서도 신을 탓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자연이 그 고유의 법칙과 원리에 따라 돌아가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신은 한 걸음 떨어져 신이 준 큰 힘에 누가 응답할 수 있는지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신의 천사의 회중은 삶의 큰 전환점에 있는 개개인들이 복원의 근원을 찾을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그들을 돕기 위해 세상을 지켜보고 있다. 이 복원의 근원은 매 순간 개개인들의 내면에 산다. 당신의 영적 가족은 비록 그들이 전하려는 것을 당신이 대부분 듣지 못하더라도 당신을 돕기 위해 당신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영적 가족의 메시지를 받는 일은 때가 되면, 올 것이다. 당신 마음이 진정되고, 스스로 만든 가시 면류관을 내려놓을 때, 또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자연계를 자비심으로 바라보는 법을 배우고, 일어나는 모든 일, 심지어 가장 고통스러운 사건들조차도 당신 삶과 세상 전체에서 앎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것임을 인지하는 법을 배울 때, 올 것이다.
신은 순수하며 이러한 것들 너머에 있지만, 순수하고 이러한 것들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을 당신 내면에 심어 놓았다. 그것은 변질할 수 없고, 더럽혀지지 않으며, 심지어 오용될 수도 없다. 그것은 오해할 수만 있으며, 여기에서 사람들은 많은 오류를 범할 것이다. 그러나 그 힘과 순수함은 그들 내면에 존재하며, 그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것을 조작하려고 해도 할 수 없다.
신은 결국 당신이 앎으로 복귀할 것임을 안다. 이승에서나 저승에서나, 당신은 앎으로 복귀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결코 앎을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의 복원이 아무리 먼 미래에 있다 하더라도, 앎은 당신의 복원을 보장한다. 삶에서 궁극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앎이다. 다시 말해 당신 내면에 있는 앎, 다른 사람 내면에 있는 앎, 앎과 높은 목적에 기반을 둔 관계이다. 이것들이 삶에서 가장 확실한 것들이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것은 변할 수 있으며, 당신이 아직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불안과 불확실성에서 마침내 벗어나고, 고정 관념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자유로 가는 당신의 여행일 것이다. 다시 말해 당신이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절망적으로 추구하던 자유, 정서적으로나 이성적으로 자유롭고 상황에서 자유로운 진정한 자유를 향한 여행이 될 것이다. 신의 새 계시는 이것을 매우 명확하게 밝히고, 계속해서 반복하여 당신이 이것을 듣고, 마침내 보고, 당신 삶에서 이것이 가장 중요함을 인지할 기회를 얻을 수 있게 할 것이다.
여기서 당신은 신이 당신을 사랑하고 돌본다는 것을 알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럽든, 후회가 얼마나 깊든, 당신의 복원을 보장하는 것이 당신 내면에 심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세상에서 폭력을 휘둘렀다면, 당신은 자기 내면에 있는 힘과 현존에 다가가는 데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부끄러움이 더 깊고, 당신 후회도 더 깊고, 당신의 고통도 더 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직 당신 내면에 있는 앎만이 결국에는 이런 것들을 떨쳐 낼 수 있으며, 진실하고 효과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 이런 것들을 보상할 힘을 당신에게 줄 수 있다.
사람들은 종교적 쟁점을 가지고 논쟁할 수 있다. 신의 의미나 신의 현실을 놓고 끝없이 논쟁할 수도 있고, 끝없이 논쟁해 왔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계시는 순수한 경험의 영역에 있다. 관념은 방향을 알려줄 수 있을 뿐이지, 당신을 산에 오르게 할 수는 없다. 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단순히 관념이나 확고한 믿음이 아니라, 내면의 힘과 결단력이 필요하다.
학자들은 산 아래에서 자신의 사상과 전통이 갖는 의미에 대해 논쟁하고 토론하는 반면, 진정으로 용기 있는 사람들은 높은 산비탈을 오르기 시작할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당신이 이 산의 높은 전망점에 도달할 때만 땅의 지형을 실제로 제대로 볼 수 있고, 삶에서 자신이 하는 참된 여행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여행이 당신을 어디로 데려가기로 되어 있는지, 누가 이 여행에 당신을 파견했는지, 누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고 지켜보았는지, 당신이 실제로 이곳에 와서 무엇을 하고, 보고, 알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무엇을 신뢰해야 하는지 배워야 한다. 당신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며, 매우 자비로운 방식으로 몸과 마음과 당신의 참된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신의 본질을 이해해야 하고, 심지어 자연계까지 포함하여 물질계에서 보이는 것과 신의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자연을 신이라고 부르지 말라. 그렇게 부르는 것은 부적절할 것이다. 비록 자연이 웅장하고, 또 깊이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 감동할 수 있더라도, 신은 이보다 훨씬 위대하다. 신은 당신을 당신의 생각 너머, 당신의 새로운 생각 너머, 당신의 기존 생각 너머에 있는 인지의 영역, 즉 깨끗하고 순수한 영역, 당신이 세상에 살면서 경험한 것에 의해 섞이지 않고 오염되지 않은 인지의 영역으로 데려간다.
그러므로 신은 불확실한 세상, 당신 주변 사람들이 여전히 두려움에 빠져 있고, 희망에 빠져 있고, 타락과 자신의 상황에 빠져 있는 세상에서, 당신이 살아가기에 충분할 만큼, 신뢰가 분명하고 깊고 심오하고 강력하게 느껴지는 곳으로 당신을 데려간다.
그들을 비난하지 말라. 그들은 당신이 지금 벗어나려고 하는 상태를 당신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오직 신만이 당신에게 벗어날 수 있는 수단을 주었다. 이제 분명한 형태로 그 수단을 주었으며, 당신이 이곳에 와서 진정으로 해야 할 것을 찾을 수 있도록 당신에게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