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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shall Vian Summers
on 1월 21,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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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월 21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가
받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매우 깊이 스며 있는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은 미래에 대한 불안, 미래에 상실할 가능성에 대한 불안을 낳는다. 그리하여 개인의 안전과 안전보장을 지나치게 강조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사람들의 인식에 영향을 미치고, 그들이 삶과 미래와 전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두려움은 의식을 가지는 것에 따른 큰 대가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면 평화와 평정심을 잃는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미래를 의식하고 삶과 죽음의 과정을 인식할 때 치르는 큰 대가이다. 동물들은 분명히 본능적인 경계심을 가지고 있으며, 당장 눈앞에 위협이 닥치면 피하는 행동을 취한다. 하지만 미래의 죽음이나 자신에게 일어날 무수한 가능성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삶과 죽음을 인식할 때 지게 되는 부담이고, 변하는 세상에서 더 큰 의식이 있을 때 치르는 대가이다. 그리고 영원한 존재가 일시적인 현실에서 살아가면서 겪어야 하는 어려움이다.

종교가 강조하는 것은 대부분 죽음의 현실, 사후 세계의 의미에 관한 것이고, 자기 내면에 있는 영적 삶의 현실과 세상에서 피할 수 없는 죽음 사이에 존재하는 이 근본적인 갈등, 이 근본적인 역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종교와 철학, 사회 과학, 인간의 사고, 인간의 집착 등 이런 것들의 초점이었고, 엄청난 고통의 근원이었다. 이것은 사람들이 그 순간을 살지 못하게 막았고, 그 순간에 현존하지 못하게 막았으며, 깊은 음성을 찾지 못하게 막았다. 이 깊은 음성은 신이 그들을 안내하고, 보호하고, 삶의 큰 성취로 이끌기 위해 그들 내면에 심어 놓은 것이다.

세상에서 생겨나고 세상에 조건화되고 세상의 교육을 받은 당신의 일부는 끊임없이 이것을 두려워한다. 당신의 물리적 그릇인 육체를 잃는 것만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까지 상실할까 봐 두려워한다. 다시 말해 부의 상실, 특권의 상실, 권력의 상실, 자결권의 상실, 관계의 상실, 사는 집의 상실, 소유물의 상실 등을 두려워한다. 이 두려움은 대단히 지배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 것인지, 세상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지를 좌우하고 결정한다.

당신 주변 어디에서나 죽음을 강조한다. 당신이 접하는 미디어, 전 세계의 끔찍한 사건을 보도하는 뉴스, 부유한 사람들이 자신의 건강 및 신체적 생존에 집착하는 것, 전 세계에서 점점 늘어나는 가난한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고 필수 자원을 공급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마주해야 하는 큰 위험 등에서 죽음을 강조한다.

사람들이 삶보다 죽음에 더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살아 있다기보다 이미 죽어 있는 상태에 가깝다. 그래서 세상 마음은 끊임없이 점점 더 많이, 심지어 합리적인 관점에서 필요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것에 내몰리며, 이는 일시적인 현실을 살아가는 데 매우 본질적인 불안과 근심을 잠재우려고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죽음을 몹시 두려워하는 것은 종교적 믿음이나 안심시켜 주는 말과 관계없이 모든 것을 잃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죽음 이후에는 아무것도 없거나, 있다 하더라도 지금 자신이 가진 것에 비해 매우 실망스럽거나 매우 하찮을 것처럼 여기며 모든 것을 걸고 도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죽음의 현실은 심지어 무의식적인 수준에서도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므로 그들이 삶을 제대로 경험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들은 걱정과 불안, 우려, 공포, 부정, 회피, 강박적 소비를 통해 수천 번, 수만 번 죽어가고 있다. 마치 삶이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완화하려는 시도에 불과한 것처럼 그들은 반복해서 죽어가고 있다.

하지만 당신은 큰 목적이 있어 세상에 파견되었고, 이 큰 목적은 당신 삶을 밝게 비추는 것,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목적과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당신을 이곳에 파견한 이들은 이 삶이 임시 파견 근무처럼 일시적임을 안다. 그리고 물질적 삶이 일시적이라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삶은 본질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인간의 고통과 죽음의 증거를 전혀 보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터무니없는 삶일 터인데, 설령 당신이 그리할 만큼 부를 쌓더라도, 또 설령 죽음과 상실에서 오는 불안이 자신에게 아주 적은 영향만 미치는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당신이 마음을 길들인다 하더라도, 당신은 여전히 매우 절충적인 환경에서 살 것이다. 다시 말해 끊임없이 변하고, 끊임없이 적응하고, 끊임없이 문제를 해결하는 환경에서 살며, 당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사람들과 어떻게 함께하고, 상황과 어떻게 함께하고, 자신과 어떻게 함께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재조정하는 환경에서 살 것이다.

혼에게 이 삶은 파견 근무와 같고, 사명과 같다. 그리고 공헌하기 위해 멋진 곳에서 어려운 곳으로 가는 것과 같다. 그것이 바로 당신 혼에게는 이 세상에서 사는 의미이다.

당신 마음은 세상에서 생겨났고, 세상에 조건화되었고, 세상과 동일시되었다. 당신은 그런 마음에서 살고 있으므로, 변화나 상실에 대한 망령을 비롯하여 이곳에서 매우 증폭될 수 있는 삶의 모든 현실이 이제 완전히 당신을 지배한다. 그리고 슬픔과 상실과 비탄은 여기서 피할 수 없다.

만약 당신이 정말로 두려움 없이 살려고 한다면, 어떤 사람, 어떤 장소, 자연, 어떤 소유물, 어떤 경험 등 그것이 무엇이든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이것들은 모두 일시적이다. 어느 시점이 되면 당신은 더이상 이것들을 갖지 못할 것이다. 적어도 이곳에서는 그렇다. 그리고 당신의 관계에 관해서는 당신은 확실히 그들을 다시 만나겠지만, 매우 다른 상황에서 만날 것이고, 그 상황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당신을 삶으로 복귀하게 하는 것은 창조주가 당신에게 준 큰 마음인 당신 내면의 앎이고, 당신이 이곳에 온 목적이다. 이 목적은 당신 내면에 있는 앎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으며, 당신이 삶에서 참된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할 때 서서히 드러날 것이다.

여기서 죽음에 대한 인식이나 불안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훨씬 더 중요하고 훨씬 더 의미 있는 것에 가려질 뿐이다. 왜냐하면 이 큰 목적이 없고, 당신 내면에 이 큰 지성이 없다면, 삶은 생존을 위한 투쟁, 일시적인 쾌락을 얻고 유지하기 위한 필사적인 시도가 되며, 권력 추구와 투쟁과 경쟁이 되기 때문이다.

당신이 이런 삶을 어떻게 보든, 그 삶은 희망이 없고, 본질적으로 비참하며, 본질적으로 불안정하고, 본질적으로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 당신은 이 모든 것이 없는 척 외면하려고 애쓰며, 자신이 원하는 것과 가진 것, 더 많이 가질 가능성 등을 믿고 탐닉한다. 하지만 당신 내면에서는 두려움에 쫓기며, 당신은 내면의 진실과 현실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마구잡이로 뛰어다닌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요히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는 자극이 필요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상태를 느끼지 않으려고 깨어 있는 모든 순간에 무엇인가에 몰두해야 한다. 그들은 이제 자기 자신과 함께 있을 수도 없고, 사실상 그 어떤 것과도 함께할 수 없게 되었으며, 끊임없이 이 일 저 일로 뛰어다녀야 한다. 끊임없이 대화에 참여해야 하고, 끊임없는 자극을 받아야 한다.

이것은 부유하든 가난하든 상관없이 정말로 절박함의 신호이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자신에게서 도망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것, 자신에게 봉사하고, 힘을 주고, 두려움을 극복할 훌륭한 해독제를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에서 도망치고 있다.

진실하고 불변하는 현실인 앎, 당신 내면에 있는 깊은 마음인 앎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려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당신이 앎을 따르지 않을까 하는 점이고, 앎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까, 앎을 인식하여 앎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계단을 밟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앎은 당신에게 다가갈 수 없는 것만 우려한다. 이 우려는 두려움과는 다르며, 실제로 삶에서 엄청난 기회를 낭비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만약 당신이 이번 생에서 자신의 내면에 있는 앎을 발견하지 못해 따르지 못한다면, 당신은 선물을 내주지 못하고, 풀어보지도 못한 채, 고향에 있는 영적 가족, 자신에게 배정된 학습 단체로 돌아간다. 당신은 그때 깨닫는다. “오, 맙소사! 나는 그 일을 하지 못했어. 내가 주고 싶은 것을 주지 못했고,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했어. 나는 잊어버렸어. 나는 다시 돌아가고 싶어. 나는 언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때 당신은 적절한 시기, 적절한 기회, 적절한 참여를 위해 기다려야 한다. 당신은 이 지구에 배정되지 않을 수도 있고, 다른 행성으로 가야 할 수도 있다. 당신은 오랜 시간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당신은 일시적인 현실에 살고 있으면서도, 주고 싶은 것을 주고, 영원한 현실인 자신의 현실을 자신의 자각 속에서 확립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당신은 이것을 깨닫고, 안다. 이것은 대낮처럼 분명하다. 당신은 이것이 진실임을 안다.

이제 상실, 생존, 획득, 쾌락, 부 등에 대한 모든 불안과 걱정에서 벗어나, 당신의 진정한 목적이 태양처럼 빛난다. 그러나 지금 이곳 지구에서는 태양이 많은 구름에 가려져 있다. 이 구름은 큰 혼란과 큰 불안과 큰 고통을 낳고, 당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잘못 쓰게 하며, 당신 관계의 목적을 오해하게 하고, 자원을 낭비하게 한다.

신은 당신에게 두려움을 극복하는 해독제를 주었다. 앎은 당신을 사로잡고 두렵게 하는 모든 것, 절박하게 몰아세우고 도망치게 하고 도피하게 하는 모든 것, 중독에 빠지게 하고 다른 세력의 노예가 되게 하는 모든 것에 대한 해독제이다. 하지만 이 해독제를 찾으려면, 당신은 자기 자신에게로 복귀해야 한다.

당신은 자신의 필사적인 시도를 멈춰야 하고, 속도를 늦춰야 한다. 그리고 당신 삶에 공간을 만들어야 하고, 그것을 계속해서 실천해야 한다. 그리하여 시간을 두고 당신 자신과의 근본적인 관계인, 앎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이 관계를 통해 신과 당신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

두려움과 불안, 분노와 분개와 편견에 사로잡혀 절박하고 혼란에 빠진 사람으로는 신에게 다가갈 수 없다. 당신은 이런 태도, 이런 상태에 있는 다른 신에게 갈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당신이 신에게 갈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자신의 삶에서 신의 현존을 경험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신의 현존은 당신에게 필요한 모든 확신을 줄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 당신이 잠시만 있다는 것, 또 당신의 상황과 상관없이 세상에서의 당신 삶은 정말 엄청난 희생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줄 것이다.

이곳의 삶은 당신의 고향과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신이 신의 현존을 경험할 때,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의 현실을 경험할 때, 당신은 이러한 것들을 상기하게 되고, 경험한다. 당신은 “내 삶은 정말로 다른 어떤 것에 관한 것이고,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하며, 시간을 두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나에게 주어진 것을 따라야 한다.”라는 느낌이 들게 된다. 왜냐하면 단순한 정의로는 여기에 답할 수 없고, 설명으로도 답할 수 없으며, 이름표를 붙이는 것으로도 답할 수 없고, 자신을 이런 사람 혹은 저런 사람이라고 선언하는 것으로도 답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삶으로 복귀하는 것이며, 당신 내면에 있는 진정한 삶과 세상에 있는 진정한 삶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이곳에서 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인간은 제 역할을 하는 데 정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자신의 죽음과 자신의 일시적 삶을 자각하고서 여기에서 발생하는 온갖 강박 충동, 온갖 분노, 온갖 노여움 등 온갖 정신적·육체적 질병을 겪으면서, 인류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세상, 개개인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세상, 당신이 아직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세상이 생겨났다.

삶으로 복귀하는 것은 마치 자기 자신을 피하며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삶에서 자기 자신과 마주하며 목적이 있는 삶으로 바뀌는 것과 같다. 그것은 마치 당신이 360도 회전한 것처럼 완전한 혁명을 일으킨다. 당신은 완전히 바뀌었다.

이렇게 바뀌는 동안 당신의 가치관, 우선순위, 자신의 관계에서 추구하는 것, 내면에서 경험하고 싶은 자질 등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한다. 그리고 당신이 이 변화를 받아들이고, 이 전환을 거치면서, 당신은 힘과 목적과 역량에 대한 감각을 회복하기 시작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죽음과 관련된 모든 것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점점 약해지고, 이제는 그다지 지배적이지 않다. 당신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걱정을 덜 하게 된다. 이 걱정은 결국 자신의 생존, 특권과 권리의 상실, 자신이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잃는 것에 대한 걱정일 뿐이다.

삶 전체에 퍼져 있는 이런 불안에서 벗어나 목적의식을 느끼는 것으로 바뀐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나는 어떤 일을 하기 위해 이곳에 왔고, 그 일을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어디로 가고,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나에게 알려주는 음성을 따라야 한다. 그리고 신호를 살펴보아야 하며, 내면에서 일어나는 충동을 느끼고 이것을 나 자신의 강박 충동이나 생각과 구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람들은 복원에 대해 매우 잘못된 개념이 있다. 그들은 복원을 착하게 행동하면 천국에서 상을 받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정말 터무니없다. 당신은 천국에 갈 준비가 되지 않았다. 설령 당신의 행동이 매우 칭찬받을 만하더라도, 당신은 여전히 분노와 불안, 비난과 판단과 갈등으로 가득 차 있다. 당신은 여전히 자기 자신과도 함께 있을 수 없는데, 어떻게 신과 함께 있을 수 있겠는가? 잠시도 고요히 있을 수 없는데, 어떻게 영원한 고요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당신은 실제로 매우 효과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내줄 수 없는데, 어떻게 모든 창조물에 자신을 내줄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천국을 착한 사람이 되거나, 종교적 명령을 따르거나, 믿으라고 하는 것을 믿은 것에 대한 보상처럼 생각한다. 그것에 중점을 둔다면, 당신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영원히 문 앞에서 기다릴 것인가?

당신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 와야 한다. 당신을 복원하는 것은 바로 그 목적이다. 당신에게 고향에 대한 기억과 감각을 회복시켜 주는 것은 바로 그 봉사이다. 당신을 짓누르는 세상의 짐을 떨쳐내고 가볍게 해주는 것이 바로 이 목적과 이 자각이다.

만약 당신이 성공한다면, 죽음은 매우 다르게 보인다. 물론 죽음은 여전히 불안하게 하는 사건이다. “오, 맙소사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맙소사, 나는 더이상 이곳에 있지 않을 것이다. 오, 맙소사, 무엇이 남을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다음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지만 당신 가슴에서는 마쳤다는 안도감이 있다. “괜찮아. 나는 이제 앞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었어. 나는 최선을 다해 이곳에 와서 하기로 한 것을 다 했어. 내가 행한 것을 확신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를 했고, 그것이 옳다고 느껴져. 나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준비가 된 것 같아.” 이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이곳에서 자기 일을 완수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또 다른 불안을 낳으며, 내면에 있는 더 절실히 필요한 것을 드러낸다. 당신이 이곳에서 목표를 이루었느냐 이루지 못했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당신 삶의 질과 의미, 결국 죽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그리하여 죽음은 자연스럽고 예상되는 전환이 될 수도 있고, 엄청난 실패와 낙담의 느낌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삶에 복귀하는 것은 앎에 복귀하는 것이자, 당신을 세상에 오게 한 목적에 복귀하는 것이다. 이것은 많은 단계를 통해 점진적으로 일어난다. 왜냐하면 세상의 산물인 사람에서 신이 세상에 파견한 사람으로 엄청난 전환을 거치는 것은 단순히 외모를 단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은 단순히 옷장을 다시 정리하지 않는다.

당신은 자신의 내면에서 큰 전환을 거쳐야 한다. 당신은 자신의 관계, 결정, 일, 건강, 자신이 있는 곳, 하고 있는 것, 함께 있는 사람 등 모든 것에 앎의 힘을 적용해야 한다. 이 적용은 어디에나 할 수 있다. 당신은 단순히 어리석은 사람으로 살면서 몇 가지 미묘한 생각이나 멋진 아이디어만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앎에는 책임과 헌신이 따른다. 여기서 진짜 불안은 당신이 여기 와서 성취하려는 것을 성취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이다. 당신이 성취하지 못하면 실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고향에 있는 영적 가족에게 돌아가면 실망할 것이다. 당신은 세상 여행에서 성공하지 못했고, 유혹에 빠졌고, 압도당했고 설득당했고 길을 잃었다고 느낄 것이다. 그 시점에서 당신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당신 삶에서 얼마나 큰 기회를 잃어버렸는지 분명히 알 것이다.

이제 당신의 이성이 당신의 목적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성은 당신의 목적을 온전히 이해할 수도 없다. 이성은 목적이 있다는 단서만 볼 수 있고, 단지 신호만 볼 수 있다. 당신은 앉아서 자신의 목적을 알아낼 수 없다.

만약 당신이 설명이나 철학을 만들려고 하면, 당신은 여전히 표면에 머물러 있다. 당신은 충분히 깊이 들어가지 못했다. 당신은 자신의 현실을 만들려고 하기보다는 당신을 창조했고 지금도 이끄는 현실, 당신을 위한 계획이 있으므로 당신을 그 방향으로 데려가는 현실을 찾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일종의 수동적인 태도로 이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저 가만히 앉아서 신이 그들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기만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전혀 옳지 않다. 당신은 당신 배의 선장이 되어야 한다. 신은 당신에게 어디로 항해할지, 화물이 무엇인지 알려주겠지만, 당신은 자기 마음을 관리해야 하고, 자기 행동을 관리해야 하며, 자기 일을 관리해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고, 삶의 상황에 맞게 대처해야 하며, 힘·평정·집중력을 되찾아야 한다.

사람들은 당신이 그저 어린아이 같고, 신이 당신의 삶을 이리저리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책임지고 싶지 않은 마음일 뿐이다. “나는 해야 할 모든 것을 신에게 맡기고, 그냥 어디 가서 놀 것이다.”

여기에는 복지가 없다. 영적 복지가 없다. 당신은 단순히 매달 천국에서 월급을 받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특정인들과 함께 특정 일을 성취하도록 이곳에 파견되었다. 당신은 빈둥거려서는 안 되고, 책임을 회피하고 어딘가에 주저앉아 남은 생애를 보내서도 안 되며, 바보가 되어서도 안 된다.

당신은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신의 에너지를 어디에 쏟는지, 어디에서 에너지를 잃는지, 지금 이 순간에도 에너지를 빼앗아 가는 관계들, 당신을 어디에도 이끌지 못하는 여행, 시간의 오용, 자원의 오용, 사랑과 관심을 오용하거나 낭비하지는 않는지 등에 대해 진지해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이고, 왜 이곳에 왔는지, 이런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온갖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그들은 미래에 다가올 변화의 큰 물결에 대비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하찮은 장식품들을 좋아한다. 매우 하찮은 것을 좋아하고, 그래서 자신을 하찮게 여긴다. 그들은 고유의 의미가 없는 것들에 헌신한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도 고유의 의미가 없다고 느낀다.

시간이 지나면, 당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앎을 경험하고, 타인과의 공명이나 공동 목적을 경험하는 것이 될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은 그다음이 될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은 실제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당신이 이곳에 와서 특별히 하기로 한 어떤 일일 때만 중요할 것이다. 그 일이 세상의 안녕과 인류의 안녕을 위한 것이거나, 당신이 봉사하도록 정해진 사람들의 안녕을 위한 것이거나, 혹은 당신에게 발견되기만을 기다리는, 당신이 이곳에 와서 하기로 한 일일 때만 중요할 것이다.

예전에 의미 있었던 것이 이제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 예전에 중요했던 것이 이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당신은 내면에 있는 더 크고 더 근본적이고 더 진짜이고 더 진실한 어떤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신은 당신이 이곳에 있는 동안 당신에게 중요한 어떤 일을 주어 하게 함으로써 당신을 구원한다. 그것은 이미 당신에게 제공되었다. 사람들은 온갖 것을 달라고 신에게 기도하지만, 신에게서 받은 진짜 선물인 진짜 하사품은 무시한다. 그 선물은 그들의 생각과 신념을 초월하는 어떤 것, 그들 존재의 본성과 현실에 근본적인 어떤 것이다.

세상에 오는 모든 사람은 세상에서 길을 잃는다. 당신의 첫 번째 임무는 단순히 이리저리 바람에 밀려다니는 키 없는 배처럼 기반을 잃은 상태에서 빠져나와 길을 찾는 것이다. 당신은 방향을 잡아야 한다. 당신은 다시 돌아와서 더 깊은 경험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으면서, 당신이 가장 먼저 배우는 것 중 하나는 고요히 지켜보는 것이다. 그래야 당신은 깊은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그 경험은 정신 나간 생각과 행동, 사랑, 열정, 취미, 집착, 갈등, 불만, 그 밖의 다양한 활동 등으로 완전히 덮여 버린다. 이때는 당신 삶의 깊은 흐름을 경험할 시간이 없다.

따라서 신의 새 메시지는 당신의 태곳적 앎과 당신의 관계를 회복하는 법을 제공했고, 더불어 당신을 이곳에 오게 한 목적과 당신이 실제로 따라야 할 방향을 되찾는 길을 제공했다. 왜냐하면 복원의 가능성은 복원을 성취할 수단이 제공되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수단은 이미 제공되었다. 그 수단은 수 세기 동안 종교를 통해서도 제공되었지만, 사람들은 여기에 담긴 깊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종교는 일종의 피난처이자, 위안이 되었다. 종교는 필요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고, 책임으로도 여겨지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종교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종교는 그저 세상에서 사람들이 소비하는 것의 일부일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위로받고 안심하기 위해 종교를 이용하지만, 실제로 종교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여기서 책임은 근본적으로 앎에 진다. 앎을 나타내지 않는 법이나 명령이나 규칙에 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신을 기쁘게 하려고 하고, 신에게 기도하며, 신을 숭배한다. 그들은 무릎을 꿇고 엎드리며, 자신을 질책한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이 심판하고 분노하는 신을 달래거나, 기쁘게 해야 하는 신, 숭배받아야 하는 신을 기쁘게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그들이 만들어 낸 신이다.

진정한 신을 인정하는 것은 당신 내면에 신이 심어 놓은 것에 당신이 응답하기 시작할 때이고, 신이 당신에게 이 삶에서 이행하라고 준 것을 당신이 이행할 때이다. 그것이 종교의 진정한 의미이고, 진정한 영성이다. 그리고 당신이 신과 가까워지는 법이며, 신을 기쁘게 하는 법이다.

이 모든 종소리와 북소리와 예배 활동이 신에 대한 기억과 책임감을 되살린다면, 그것은 매우 훌륭한 일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에게 그것은 그저 시끄럽고 분주한 행위에 불과하다.

신과의 근본적인 연결은 앎으로 복귀하는 것이고, 세상에서 길을 잃은 상태에서 빠져나와 되돌아가는 길을 찾는 것이고, 고요히 지켜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내주는 법, 겸손해지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야심이나 목표, 자신을 몰아세우는 강한 욕구, 의무를 잠시라도 내려놓고 더 깊이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신에게 숭배는 필요하지 않지만, 당신이 이곳에 와서 하기로 한 것을 수행하는 것, 시간을 두고 이것을 수행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필요하며, 직접 여행을 창안하지 않는 것, 당신이 이해하지 못할 때 이해하는 척하지 않는 것, 무책임하거나 수동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준비, 즉 당신의 근원과 힘, 목적과 방향으로 복귀하는 것은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삶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만약 이곳, 이 세상에서 삶으로 복귀할 수 없다면, 당신은 진보하지 못했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당신은 고향에 있는 영적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지만, 다시 돌아오고 싶을 것이다. 당신은 그 필요성을 알 것이다. 그 필요성은 당신에게 분명할 것이다. 당신은 세상에 속지 않을 것이고,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며, 겁먹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단지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 알 것이고, 다시 게임으로 돌아가고 싶을 것이다. 돌아가서, 이곳에 와서 하기로 한 것을 하고, 세상에 있는 동안 고향을 다시 경험하며, 당신 내면에 살고 있는 진실인, 앎의 큰 현실에 가까이 머물고 싶을 것이다.

앎의 현존은 당신 내면에 살며, 마침내 당신 마음이 가라앉을 때, 당신이 경험하는 고요 뒤에 있다. 앎의 현존은 당신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어둠에서 열 걸음 뒤로 물러나 있다. 그리고 그 어둠은 그저 당신의 혼란스러운 생각과 확고한 신념의 아래에 있는 공허함일 뿐이다.

앎은 그저 존재하는 강력한 현존이다. 그 현존은 세상에 오염되지 않고, 속지 않으며,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곳에 왔는지 알며, 방향을 설정하고 필요한 특정의 것들을 충족하는 데 집중할 것이다.

당신은 두 가지 수준의 삶을 살고 있다. 하나는 생각하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아는 삶이다. 복원이란 바로 당신이 아는 삶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신에게 복귀하는 것, 당신 내면에 있는 완전함과 온전함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죽음은 단지 하나의 전환일 뿐이다. 죽음은 여전히 당신을 긴장하게 할 것이고, 여전히 당신이 피하고 싶은 것일 수도 있지만, 이제 그렇게 큰 무게를 지니지 않는다. 죽음은 당신 삶을 지배하지 않으며, 매 순간 당신을 압도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당신이 하는 모든 일에 드리워진 먹구름 같은 것도 아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우울한 것은 앎과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의 성공과 획득이 본질적으로 피상적이고 일시적이라는 것을 보았지만, 그것을 대신할 것이 아무것도 없으므로 공허함을 느낀다. 그들은 자기 삶에서 진정한 방향이 없다고 느낀다. 그들은 공허하다.

만약 당신이 자기 삶에 진정으로 참여한다면, 당신은 어떤 개인적 탐닉에 허비할 시간이 없을 것이다. 당신은 끊임없이 자신에 대해 걱정하고, 자신의 행복에 대해 걱정하고, 자신이 생각한 것에 대해 걱정하고, 이 모든 것을 걱정하는 데 허비할 시간이 없을 것이다. 시간이 없을 것이다. 당신은 다른 곳에 참여할 것이다.

신은 당신에게 해야 할 더 중요한 일을 주었고, 당신은 그 일을 할 것이며, 여기에는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든다. 당신은 예전의 어두운 곳으로 돌아갈 시간이 없으며, 집에 들어가 틀어박혀 있을 시간이 없다. 왜냐하면 당신 삶이 움직이고, 당신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내면에 이렇게 물어보라. “내 내면에 있는 앎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내면에 있는 앎을 찾으려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신에게서 온 확실성, 내 내면에 살고 있는 진짜 확실성으로 어떻게 돌아갈 수 있는가? 지금 바로 내 삶에서 무엇을 해야 내가 자유롭게 이 일을 하고 이것들을 알아낼 수 있는가?”

“내가 다른 사람이나 다른 활동과 관련하여 어디에서 에너지를 낭비하는가?”라고 자문해 보라. “나는 누구에게 의무가 있으며, 그 의무가 올바르고 정말 적절한가?”라고 자문해 보라.

고요히 있을 수 있는 장소를 찾으라. 신이 제공한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배우라. 앎으로 가는 계단을 활용하고, 적용하고, 꾸준히 따르라. 당신 삶이 하루나 일주일, 혹은 한 달 만에 바뀌지는 않겠지만, 당신이 계속 나아가면, 크게 바뀔 것이다.

앎의 경험은 단순히 완전히 새로운 생각, 삶에 대해 다른 이론을 갖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마음 안에 열린 공간을 갖는 것과 같다. 그 공간을 통해 큰 메시지가 당신에게 다가올 수 있고, 당신은 세상의 신호를 보고 해석할 수 있으며, 자신의 경험에 귀 기울일 수 있다.

마음이 창문 없는 방과 같다면, 아무것도 들어올 수 없다. 당신은 그 안에 갇힌 죄수가 되며, 자기 생각과 신념의 노예가 된다.

그러나 앎을 경험하는 것은 열린 창문이 많은 마음과 같아서, 그 창문들을 통해 삶이 지나갈 수 있고, 당신 밖에 있는 삶의 신호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으며, 당신을 재결합시키고, 새롭게 할 수 있다. 당신은 필요할 때 그 창문들을 여닫을 수 있지만, 그 창문들은 항상 있어 당신이 밖을 볼 수 있게 해준다. 그 창문들을 통해 당신은 자신 너머에 있는 삶과 세상을 볼 수 있다.

모든 고통은 자기 집착에서 비롯된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당신의 세상 마음보다 더 큰 어떤 것을 섬기고, 당신의 하찮고 작은 개인적 현실보다 더 큰 것의 일부가 되고, 당신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즐거움과 로맨스를 추구하려는 절박한 시도를 넘어 다른 사람들과의 큰 관계를 찾는 데 있다.

이제 삶으로 복귀할 때이다. 세상은 당신이 필요하다. 신도 당신이 필요하다. 당신은 자신의 방향과 참된 기반을 찾아야 하고, 이 참된 기반 위에 자기 삶을 구축해야 하며,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아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과거와는 다른 미래를 대비할 수 있고, 세상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즉 당신의 마음, 경험, 정서, 환경 등에 미치는 영향을 약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되돌아가는 여행이다. 이것이 바로 당신을 세상에 오기 전의 당신, 세상을 떠난 후의 당신으로 회복시키고, 지금 이곳에서 당신이 되어야 하는 존재와 상태로 회복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