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종교


1986년 6월 6일
미국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에게
계시되었다

이 본문에 관하여


What you are reading in this text is the transcription of the original voice of the Angelic Assembly as it spoke through the Messenger Marshall Vian Summers.

Here, the original communication of God, which exists beyond words, is translated into human language and understanding by the Angelic Assembly who watch over the world. The Assembly then delivers God’s Message through the Messenger, whereafter it is transcribed and made available to you and to all people.

In this remarkable process, the Voice of Revelation is speaking anew. The Word and the Sound are in the world. May you be the recipient of this gift of Revelation and may you be open to receive its unique Message for you and for your life.


Wisdom from the Greater community, volume 1
제5편 > 큰공동체 지혜 1 > 제1장

먼저,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인 큰 종교를 논할 것이다. 앎을 계발하는 것이 우리가 논하는 모든 것에서 주요 주제이다. 모든 참된 활동, 참된 성장, 참된 진보에는 앎·관계·소통이 스며 있다. 앎·관계·소통, 이것들이 당신의 영적 본성과 운명을 불러내며, 신과 당신의 관계를 불러낸다. 하지만 물론 여기에는 이것들이 끊임없이 삶에 적용되어야 하는 현실적인 면들이 많다.

당신은 이곳에 단순히 자신의 개인 성장만이 아닌, 목적이 있어 파견되었으므로, 세상에 공헌하는 일이 파견의 주요인이다. 당신은 받으면 주어야 하며, 이것은 이세상과 저세상 모두에서 계속된다. 이러한 절차는 지구뿐만이 아니라 우주 모든 행성에 동일하다. 그러므로 신의 계획은 매우 다양한 환경에서 매우 다른 존재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다루어야 한다. 인간사나 이곳 지구에만 골몰하는 당신이 큰 종교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당신은 다음 세 가지 이유로 큰 종교와 직접 관련되어 있다.

첫째, 당신은 전적으로 인간만은 아니다. 당신은 이곳 지구에서만 주로 성장한 것이 아니다. 당신 앎에 축적된 것에는 인간의 삶뿐만 아니라, 다른 행성에서 산 비인간의 삶도 담겨 있다. 그러므로 앎을 회복하는 것은 이런 중요한 기억들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겪은 트라우마나 과거 사건들의 기억이 아니라, 진실 속에 확립된 관계들의 기억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자신의 실제 앎을 회복하고 싶다면, 자신의 이런 면을 체험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당신이 체험하는 것을 인간의 삶에 통합할 수 없을 것이며, 우리가 앎의 회복이라고 말하는 앎의 습득은 당신에게서 점점 더 멀어질 것이다. 당신은 세상과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을 느낄 것이며, 이것은 우리가 뜻하는 바가 아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자신의 인간성을 받아들여야 하고, 또한 큰 질서 속에 있는 자신의 자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오직 이렇게 할 때만, 당신은 어려움 속에 있는 세상을 돕는 것과 동시에 세상에 없는 큰 안목을 유지하면서, 이곳에서 자신을 온전히 통합할 수 있다.

큰 종교가 당신과 관련된 두 번째 이유는 지구가 다세계 큰공동체 안으로 진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처럼 자주 이야기한 큰 전환이다. 이것은 당신이 그 결과는 물론, 그것이 당신의 생각이나 세상 활동에 얼마나 큰 영향을 줄지 상상할 수 없는 그런 큰 전환이다.

세 번째 이유는 당신이 신의 일을 이해하려면, 훨씬 더 폭넓은 안목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신은 인간이 아니다. 신은 인간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신은 인간이 그린 형상이 아니다. 신은 형상이 없다. 모든 생명의 창조주는 모든 생명이 존재하는 이유가 된다. 신이 다른 지적 생명체를 배제하고 인류에게만 몰두할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신의 앎인 신의 지혜, 인류가 작지만 매우 중요한 한 부분을 보전하는 신의 지혜에 접근해 나가려면, 당신은 삶 자체를 점점 더 큰 안목으로 보아야 한다.

인류의 진화는 삶 자체의 한 면에 불과하다. 당신은 한 면만 보고 전체를 알 수 없다. 인간의 삶이 모든 삶을 반영하지는 않지만, 모든 삶을 반영한 것이 인간의 내면에 있다. 그러므로 신의 현존과 신과의 관계를 체험하는 종교는 삶의 더 큰 면들을 설명해야 한다.

이것은 당신이 인간으로 있는 데에도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당신이 진정 인간으로 있기 위해서는 이러한 관점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으로 있는 것이 현재 당신의 전부라면, 당신은 이런 관점을 가질 수 없으며, 인간으로 있는 것은 많은 면에서 대단히 모순된다. 그저 자기 생각에만 골몰한 청소년 같은 상태가 된다. 신이 인류를 돕기 위해 파견한 이들의 특성을 당신이 이해하고 제대로 인식하고자 한다면, 당신은 이윽고 그들의 관점을 점차 공유하게 될 것이고, 더 큰 규모로 진화의 의미를 알 것이다. 이때 당신은 자신의 의무를 차츰 이해하게 될 것이고, 이곳 지구에서 성장의 의미를 알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정한 영적 성장에 궁극적인 목표를 두고 그에 따라 살아가려고 한다. 이것은 대단히 주제넘고 해로운 생각이다. 왜냐하면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삶에서 진정한 목표를 터무니없이 잡는 것으로 실패하는 것은 계획에 들어 있지 않다.

당신들 대부분은 큰 목적에 봉사하고 싶은 소망뿐만 아니라 신성과 결합하고 싶은 소망을 느꼈다. 물론 이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지만, 큰 목적에 봉사하고 큰 근원을 체험하고 싶다면, 당신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배워야 한다. 당신이 그 길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실수하리라는 것을 확신하므로 완벽을 추구하지만, 무엇이 완벽인지 모른다. 당신은 실수에서 완벽을 알 수 없다. 당신은 실수만 알 수 있다. 완벽은 실수를 지우는 것이 아니다. 완벽은 지혜·자비·능력·역량·사랑을 얻는 것이다. 실수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완벽을 낳지 않는다. 진화를 아주 멀리까지 볼 수 있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자신에 대한 기대치를 조정할 것이다.

완벽한 것처럼 보이는 것을 이룬 소수의 사람은 이생을 마치자마자 자신이 새로운 시작점에 있음을 깨닫는다. 물론 그들은 세상에 다시 내려오지 않아도 된다. 그들은 자신의 인간성을 초월한다기보다는 이제 우주의 정체성과 마주쳐야 한다. 이것을 위해 그들은 많은 도움과 노출이 필요할 것이다.

그들의 운명과 그들이 가는 길은 당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당신이 신경 써야 할 곳은 당신 눈앞에 있는 삶,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에 따라 행동하는 당신의 능력, 분별하는 당신의 능력, 목적과 정체성에 대한 당신의 감각이다.

사람들은 종종 “나에게 왜 스승이 필요한가?”라고 묻는다. 그 대답은 매우 간단하다. 그것은 당신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당신은 아주 많은 것을 믿고 있다. 하지만 당신의 앎은 그저 작은 빛에 불과하다. 당신은 자신의 성격이나 몸을 완벽하게 하는 것으로 높은 단계에 이를 것으로 믿지만, 우리가 단언하건대, 오히려 큰 좌절에 이를 것이다. 완벽한 성격을 가진 사람도 앎이 없는 것은 불완전한 성격을 가진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을 수 있다. 실제로 세상에서 당신의 위대한 스승들은 완벽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라 대단히 악명 높았다. 당신의 행동이나 생각에는 당연히 수정해야 할 것이 있지만, 완벽한 성격을 만드는 것이 그 목적이 아니다.

당신의 기준에 따라 행동을 완벽하게 하는 것은 앎의 길이 아니다. 앎은 관념이 아니다. 앎은 체험이고, 관계이며, 신이다. 신은 관계이고, 비슷한 것 사이의 끌림이며, 같은 것끼리의 끌림이다. 이것이 현실적인 정의에서 신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가 큰 종교라는 개념을 갖게 된다. 왜 크다고 하는가? 여기서 크다는 것은 더 낫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더 큰 현실을 설명하므로 상대적으로 더 클 뿐이다. 당신은 단지 사람들의 진화만이 아닌, 삶의 진화를 이해해야 한다. 삶의 진화는 너무 광범위하고 포괄적이므로 이성적으로는 당신이 이것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당신은 체험할 수는 있으며, 당신의 일상생활에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는 있다.

인간은 궁극적인 현실을 성취하기 위해 세상에 파견되지 않는다. 이것은 당신의 목적이 아니다. 이곳에 온 당신의 목적은 이곳에 있는 것을 끝마치는 것이다. 당신은 중간에 있는 단계를 모두 생략하고 땅에서 하늘까지 바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일이 잘되어 당신의 진척이 예상한 대로 이루어진다면, 당신은 자신의 역량을 확장할 것이고, 더 많은 삶의 체험, 인간으로 있는 것이 너무 제한적일 만큼 대단히 많은 체험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신이 대단히 많은 관계에 포함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구는 이제 막 자아도취에서 빠져나오고 있으며, 이는 성숙에 꼭 필요한 단계이다. 그러므로 많은 행성의 종교라고 말할 수 있는 큰 종교를 체험하는 것이 적절하다. 큰 종교의 체험은 큰 관점을 갖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앞으로 만날 큰공동체에서 오는 이들을 이해하는 데에도 적절하다. 그들은 꼭 당신처럼 생각하지만은 않는다. 그들 모두가 우호적인 것은 아니다. 그들이 당신에게 낯선 만큼 당신도 그들에게 낯설다. 당신은 앎으로 그들을 보아야 한다. 이것이 균형 잡힌 관점이다.

나는 좀 전에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므로 스승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스승이 필요함에도 스승의 현존이 드러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그들의 스승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 될 것이다. 그런데도 스승은 모두에게 있다. 당신은 삶 속에서 자신을 끌어올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생존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조차 거의 만들어낼 수 없다. 당신은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며, 그럼으로써 당신이 도움받는다는 느낌, 은총과 감사의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이 사실은 또한 당신에게 중요한 목적이 있다는 것, 그리고 당신이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앎은 체험을 통해 얻어야 하는 것이 맞다. 앎은 이성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이성은 우주를 이해하도록 창조되지 않았다. 이성은 당신의 물질적 삶에서 세부적인 것들을 다루도록 창조되었다. 물질적 삶 속에서 이성은 꽤 정교해졌지만, 체험과 앎을 바르게 인식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성의 역량을 부적절하게 사용하지 말라. 이성은 이성에 맞는 적용이 있으며, 그 경우에 유용한 적용이 된다. 하지만 당신은 다른 접근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은 신을 다루므로 본질적으로 종교적이다. 우리는 더 큰 삶을 다룬다. 이 세상에서는 당신이 가장 큰 삶에 접근할 수 없으며, 단지 상대적으로 더 큰 삶에만 접근할 수 있다. 당신은 진화의 단계들을 거쳐야 한다. 당신은 이 모두를 한꺼번에 도약할 수는 없다. 도저히 그럴 수는 없다.

이제 이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당신은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그리고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지지 않고서, 자신에게 진실로 관련된 것과 진실로 필요한 것을 볼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지면, 당신은 본질적인 것을 알아보지도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실패를 낳을 것이고, 이 실패로 당신은 더욱 고통받을 것이다. 우리는 완벽한 행동을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이 아주 터무니없는 성취를 이루어야 한다고 고집 피운다면, 우리는 당신을 효과적으로 도와줄 수 없다. 우주를 당신보다 더 잘 경영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므로 당신이 하게 될 일은 이곳이나 외국 양쪽 모두의 현재 종교 안에서 신의 일을 체험하는 것을 다룰 것이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이것이 중요한 것은 단순히 마음의 현혹 때문만이 아니라, 이곳이나 외국 양쪽 모두에서 당신의 영적 가족과 접촉하도록 격려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신이 삶에서 영속·일체·포함을 체험하는 데 대단히 필수적인 옛 기억을 되살려준다.

사람들은 항상 자신의 영적 가족을 찾고 있다. 개인적 관계들에서 찾고, 정치 활동이나 종교 활동에서 찾으며, 평화 속에서도 찾고 전쟁 속에서도 찾는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모르지만, 이 세상에서 혼자 있는 것은 가혹한 운명이다.

하지만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당신이 이 세상에 오기 전에 당신은 혼자가 아니었으며, 그때 당신과 함께 있었던 이들이 지금 당신과 함께 있다. 이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가시 영역의 삶과 불가시 영역의 삶을 다시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환상의 장벽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이때 당신은 영적 현존을 단순히 느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시작할 수 있다. 이때 당신의 인식이 맑아진다. 만약 당신이 이 세상에 있지 않다면, 적절한 결정을 하기가 훨씬 더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세상에 있다. 당신은 육체 안으로 들어와 이 세상의 자연 거처를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바르게 인식할 수 있다.

향후 백오십 년간 일어나는 사건들을 준비하고, 또 향후 천 년에서 삼천 년에 이르기까지 생겨나는 종교들을 준비함에 있어, 당신의 성장을 위해 큰공동체 의례儀禮들이 공유될 것이다. 이 의례들은 철학적으로 공유되는 것이 아니라, 실행에 옮기는 연습들로 주어진다. 이 의례들은 단순히 이성적 추측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당신이 앎을 체험하고 영적 현존과 접촉을 체험하도록 하는 입문이다. 이 의례들은 그 기원이 아주 오래됐다. 그 목적은 당신이 태곳적 기억을 되살릴 수 있고, 이곳 지구에 있는 진정한 친구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 있는 진정한 친구들을 다시 의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서 훨씬 더 큰 목적의식이 솟아날 것이며, 이 의례들이 공유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이다.

이것이 종교적 체험이다. 종교적 체험은 진화하며, 관점의 성장이 필요하다. 지구 종교 역사나 알려진 역사를 읽어보면, 비록 그 역사가 간단하기는 하지만, 당신은 성장을 볼 것이며, 확실히 발전하는 것을 보기 시작할 것이다. 발전은 이처럼 계속된다.

이것의 목적은 앎이다. 여기에는 숭배해야 할 사람도 없고, 영웅도 없다. 우리는 불가시 영역에 남아 있다. 당신은 우리를 숭배할 수 없다. 때가 되면, 당신은 우리가 효과적으로 일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는 것이 왜 그처럼 중요한지, 그 지혜를 이해할 것이다. 지구에서 상당히 진보하여 자신의 앎을 공헌한, 그런 위대한 이들조차 숭배의 대상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앎은 계속 무시당했다. 사람들은 앎을 두려워하지만, 앎이 목적이다.

당신이 앎을 갈망한다면, 앎을 구하라. 당신이 앎을 규정해서는 안 되며, 그 결과를 예측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앎을 구하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에 앎을 구한다. 왜냐하면 당신 앎은 당신의 창조주에 대한 기억을 담고 있고, 당신 도움에 대한 기억과 세상에서 당신의 의미에 대한 기억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