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Freedom

1987년 6월 6일에
미국 텍사스 댈러스에서
신의 메신저 마샬 비안 서머즈에게
계시되다

이 본문에 관하여


What you are reading in this text is the transcription of the original voice of the Angelic Assembly as it spoke through the Messenger Marshall Vian Summers.

Here, the original communication of God, which exists beyond words, is translated into human language and understanding by the Angelic Assembly who watch over the world. The Assembly then delivers God’s Message through the Messenger, whereafter it is transcribed and made available to you and to all people.

In this remarkable process, the Voice of Revelation is speaking anew. The Word and the Sound are in the world. May you be the recipient of this gift of Revelation and may you be open to receive its unique Message for you and for your life.


Wisdom from the Greater community, volume 1
제5편 > 큰공동체 지혜 1 > 제7장

우리는 자유에 관해 말하고자 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주제이며, 특히 어떤 사회에서는 아주 많은 관심을 받는 주제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더 큰 맥락에서 자유에 관해 말해야 하고, 당신이 깊이 생각해 보도록 자극하는 몇 가지 개념을 제공해야 한다. 아마도 그것들은 깊이 뿌리내린 어떤 개념들에 이의를 제기할 것이며, 동시에 더 깊은 어떤 성향들도 확인해 줄 것이다.

자유, 개인의 자유에 대해 많은 과잉 반응이 있다. 특히 이 나라(미국)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곳에서는 많은 노력으로 자유를 얻었다. 사실 자유는 삶에서 당신이 추구하는 것 중 매우 중요한 측면이다. 그러나 자유는 매우 혼란스럽게 한다. 왜냐하면 자유에는 어떤 역경이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명백한 것도 있지만, 결코 설명이 불가능할 수 있는 것도 있다.

이 지구에서나 다른 세계에서 지혜를 얻은 이들, 그리고 앎이라는 선물을 발견하고 강한 의지로 이 선물을 키운 이들은 문화나 환경, 종교, 언어 등과 상관없이 어디에서나 공통으로 적용되는 어떤 기본 깨달음에 도달했다. 그들이 한결같이 발견한 것 중 하나는 앎이 커질수록 힘은 더 커지고 개인적 자유는 더 줄어든다는 것이다. 다시 반복하겠다. 앎이 커질수록, 힘은 더 커지고 개인적 자유는 더 줄어든다.

물론 여기서 사람들은 둘 다 원한다. 더 큰 힘을 원하고, 삶에서의 확실성과 방향성을 더욱 가질 수 있도록 앎을 키우기를 원한다. 그리고 여기에 더 많은 개인적 자유도 원한다. 그렇지만 앎의 회복으로 가는 진정한 단계가 진행 중일 때, 더 많은 개인적 자유에 대한 욕구가 어떻게든 영향받거나 방해받는다는 것을 현자들은 발견하였다.

현자들이 발견한 또 다른 것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정의로 보면, 자유와 목적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목적을 원하는 것은 목적이 방향을 제공하고, 의미 있는 미래의 가능성, 의미 있는 현재 관계의 가능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많은 개인적 자유도 원한다. 그렇지만 자신이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목적을 발견할 기회가 오면,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무언가를 포기해야 할지도 몰라 두려워한다. 그래서 자유의 문제가 논쟁의 쟁점이 된다.

자유는 남이 방해하거나 가로막는 일 없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어떤 방식으로든 행동하고 참여할 수 있는 것으로 종종 여겨진다. 물론 내면의 교사들은 여기서 매우 위협적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항상 그들은 당신이 가질 수 없는 온갖 것을 말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접촉이 의미 있으므로 접촉을 원하지만, 그만큼 자유를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어떤 식으로든 당신이 해야 할 일을 지시받고, 스스로 모든 결정을 내릴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다.

사람들은 의미 있는 결정을 많이 내리고 싶어 하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이 결정을 내리도록 놓아두지는 않을 것이므로, 모든 것이 매우 혼란스러워진다. 교사들은 가치 있는 모든 것을 제공하도록 요청받고, 그 대가로 아무것도 요청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 순간의 만족, 그 순간의 목적, 그 순간의 앎을 원하지만, 아무것도 내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것을 조금 탐구해 보자. 왜냐하면 당신이 제대로 인식한다면, 목적과 자유 사이에는 실제로 아무 모순이 없기 때문이다. 당신의 운명이자 헤리티지인, 앎을 회복하는 능력 말고 무엇이 자유인가? 그것이 자유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앎과 함께하지 않으면, 당신은 자기 생각에 속박되고, 이 세상의 힘에 속박된다. 이때 당신 개인적 자유는 쓸모없고 고통스럽다. 자유가 당신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시행착오를 통해 배우는 것은 매우 형편없는 방식이다. 그것은 매우 느리고 어려우며, 어느 지점까지만 필요하다.

지금 당신의 자유는 앎을 추구하는 자유이며, 이 앎이 존재하는 유일한 자유를 제공한다. 왜냐하면 앎은 당신에게 영적 가족을 떠올리게 하고, 당신이 세상에 오기 위해 한 헌신을 떠올리게 하며, 당신의 운명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당신은 자신의 삶을 계속되는 것으로, 단지 개념적으로가 아니라 정말로 계속되는 것으로 보기 시작한다. 그렇게 힘들고 위협적이던 세상이 갑자기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게 된다. 이제 세상은 그다지 무섭지 않다.

여기서 당신은 오직 삶에 참여하는 데만 자신이 자유롭다는 것을 깨닫는다. 만약 개인적 자유가 실제 삶에 온전히 참여하도록 이끌지 못한다면 개인적 자유란 무엇인가? 이 나라에서 사람들은 자기 개인적 자유를 매우 탐하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더 큰 고립과 좌절 말고 무엇을 주었는가? 그들은 고대 부족 문화에 있던 통일성을 잃었다. 그 통일성은 필요해서 나오는 목적을 당신에게 제공한다. 그러면 아무도 당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 신경 쓰지 않으니, 당신은 어느 정도 자유롭다.

그렇지만 당신의 놀라운 사회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사회는 앎을 발견하여 가능한 한 방해받지 않고 표현하는 가장 큰 기회를 당신에게 주기 때문이다. 당신이 이런 큰 자유를 누리는 것은 전에 없던 성과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자유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고, 이 자유가 주는 큰 혜택을 받을 수 있는가?

당신의 목적에 따라 사는 자유만이 진정한 자유이다. 목적 없는 자유는 혼란이다. 그것은 방향 없이 오직 생존에 대한 두려움, 당신을 자극하는 욕구와 욕망만을 가지고 목적 없이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매우 절박한 상황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속박을 찾는다. 여기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개인적 관계에서 속박을 찾았는가? “나는 또다시 자유롭게 있기보다는 차라리 가망 없고 고통스러운 관계 안에 있겠다. 내 자유는 더 끔찍한 짐이다.”

개인적 자유를 지나치게 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을 내줄 수 없게 된다. 실제로도, 어떤 것에 자신을 내주면 당신이 엄청나게 가치 있는 어떤 것을 잃는 것으로 여겨진다. “어떤 것에도 자신을 완전히 내주지 말라! 어떤 것에도 당신이 가진 것을 남김없이 쓰지 말라! 자신을 아끼라!” 그래도 조화를 이루고 자율권이 있는 사람들만 유일하게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뒤에 남겨두지 않고 완전히 자신을 내준다. 하지만 개인적 자유는 “아니다. 속지 말라. 당신을 내주지 말라. 당신의 개인적 자율권을 포기하지 말라. 당신이 당신 삶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라고 속삭인다. 이것은 관계를 완전하게 맺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된다. 그래서 당신이 결혼하여 함께하려고 노력하지만, 완전히는 함께하지 못한다. 당신은 주려고 노력하지만, 어느 정도까지만 줄 뿐이다. 당신은 개인적 동기를 보호하고 싶지만, 그것은 당신에게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당신은 상대방과 관계를 완전하게 맺을 수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자유는 앎을 발견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당신이 이 세상에 왔다. 당신은 어떤 것을 성취하기 위해 안락한 곳에서 더 힘든 곳으로 왔다. 만약 당신이 문젯거리가 많은 곳에 파견된다면, 그곳에서 휴가를 보내려고 가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은 그곳에 일하러 갈 것이다. 만약 도시 북쪽에 난 산불이 걷잡을 수 없다면, 당신은 캠핑카나 수영복을 가지고 그곳에 가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무언가를 하려고 삽을 들고 그곳에 갈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곳에 갔는데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면, 당신은 큰 상실감을 느낄 것이다. “나는 이곳에 왔어. 드디어 왔어. 하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공헌하고 싶은 그 욕구를 달래려고 자신을 아무리 위로해도 소용없다.

앎은 자유의 문제를 자연스럽게 해결한다. 왜냐하면 앎은 당신을 삶에 완전히 참여하게 하고, 이렇게 할 수 있는 자유를 당신에게 주기 때문이다. 삶에 완전히 내주는 자유야말로 진정한 자유이다. 왜냐하면 유일하게 자유로운 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당신 혼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관계들을 끊고 나서 동시에 그 관계들을 모두 갈망하면서 삶을 보낼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관계들을 털어내고, 또 끌어당기고, 다시 밀어낼 것이다. 그렇게 당신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필사적으로 오고 갈 것이다.

개인적 관계들이 더 큰 개인적 자유를 줄 것으로 여겨지므로, 개인적 관계를 매우 갈망한다. “나와 내 개인적 자유를 공유하는 이가 있다면 나는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 자유를 공유하기는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상대방은 항상 그 자유의 일부를 가져가고 싶어 하고, 당신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 타협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결혼했다면, 자유롭게 밖에 나가서 자신이 원하는 누군가와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 그 자유는 희생된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결혼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누군가와 의미 있게 결합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현자들이, “힘이 커질수록 자유는 줄어든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이 통찰의 한 측면이다. 또 다른 측면은 당신이 앎과 관계를 맺을 때, 심지어 앎에 가까이 다가갈 때도, 앎과 관련이 없는 대부분에 흥미를 잃을 것이라는 점이다. 당신은 그렇게 많이 어울리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마치 큰 끌림이 당신을 당신 한 가운데로 끌어당기는 것처럼 점점 더 내면으로 끌리게 될 것이다. 이제 당신은 그다지 많은 자극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당신은 조용함과 평화로움을 점점 더 소중히 여기고, 시끄럽고 짜증나게 하는 것을 점점 더 가치 있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전에 가진 자신의 야망에 점점 더 관심을 잃을 것이고,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들에 더 관심을 가질 것이다. 당신 친구들에게는 당신에게 자유가 더 없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춤추러 가자!” 그러면 당신은 “갈 수 없어. 그냥 가서는 안 될 것 같아.”라고 말할 것이고, 그들은 당신을 보고 “무슨 일이야? 항상 춤추러 다녔잖아! 그런데 지금은 맥빠진 사람이 됐어. 전혀 재미가 없어!”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자연스럽다. 삶에 의미 있게 참여하는 사람들은 개인적인 오락거리에 빠지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시간이 없다. 너무 많은 것에 그들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현자는 “힘이 커질수록 자유는 줄어든다.”라고 말한다.

당신은 모든 것을 마음대로 또는 충동적으로 추구해서도 안 되고, 추구할 수도 없을 것이다. 당신은 훨씬 더 한결같고 어떤 면에서는 고립된 삶을 살 것이다. 관계에서 당신의 분별력은 엄청나게 커질 것이다. 왜냐하면 관계의 기준은 앎을 장려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끌림들은 매우 일시적인 것으로, 진심으로 추구하면 위험한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이것 역시 자연스럽다.

앎을 따르는 사람들은 관계 맺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들과 함께 있기를 항상 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문제는 분별력이다. 앎을 따르는 사람은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어딘가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감동을 주는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들을 끌 것이다. 그래서 바로 현자들이 종종 삶에서 은둔한다. 그들이 대중 앞에 나가면 모든 사람이 큰 소란을 피우기 때문이다. 그들이 특별히 훌륭하거나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그들의 삶이 온전히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며, 바로 그 포함이 그토록 강한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앎을 추구할 때 당신은 앎을 추구하기 위해 자유를 소중히 여길 것이다. 이때 당신은 부모에게 감사할 것이고, 사회에 감사할 것이며, 과거의 고통스러운 경험들에 감사할 것이다. 그 경험들로 인해 당신은 이 자유를 소중히 여기며, 다른 자유들이 어디로도 이끌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른 자유들은 무의미하다.

아마도 어느 시점이 되면, 당신은 내면의 교사들을 환영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들의 도움이 필요하고, 자신이 무엇을 잃을지 걱정하지 않으며, 꼭 받아들여야 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상실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받아들이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들에게는 그 대가가 항상 너무 크다. 만약 당신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삶에 온전히 참여한다면, 그 대가로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이 들 것이다. 당신은 텅 빈 큰 그릇처럼 완전히 다 써 버리고 삶을 마칠 것이다. 그렇게 완전히 활용했을 때, 당신은 이 세상에서 성취하고, 다시 돌아올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당신은 자신이 가져온 모든 것을 주었으며, 남은 것이 하나도 없다. 당신은 파괴되거나 기진맥진하지 않으며, 만족한다.

그러니 여기에 드는 대가는 걱정하지 말라. 그 대가는 당신이 볼 수 없는 모든 것을 위해 당신이 보는 모든 것을 내주는 것이며, 당신이 보는 것은 삶의 아주 작은 부분이고, 당신이 볼 수 없는 것은 매우 크다. 당신은 자신이 온 곳이나 갈 곳을 볼 수 없고, 자신의 교사들을 볼 수 없으며,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영적 가족을 볼 수 없다. 당신은 가시 세계에 내려왔으며, 그래서 어떤 일을 하려고 하고, 가치 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 영원한 의미가 있는 것과 일시적인 자극일 뿐인 것을 분별하는 법을 배우려고 한다.

당신이 영원한 것을 소중히 여길 때, 일시적인 것이 더는 구속이나 저주가 아니므로 일시적인 것을 즐길 수 있다. 그것은 일시적인 즐거움이다. 당신은 쿠키를 먹으면서 “맛있는 쿠키야.”라고 말하지, 쿠키를 보고 “너는 내 주인이다. 나는 너를 먹을 수 없어.”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 몸을 보고 “너는 내 감옥이야. 나는 밤낮으로 너를 돌봐야 해. 너는 절대 철들지 않고, 영원히 어린애 같아서, 내 삶에서 매일매일 나를 해칠 거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너는 내 매개체이다. 나는 너를 최대한으로 쓸 것이고, 너를 완전히 활용하는 것으로 닳게 하겠지만, 남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나에게 선물이며, 나는 너를 통해 말할 수 있고 이곳에서 가장 의미 있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현자들이 “힘이 커질수록 자유는 줄어든다.”라고 말할 때, 이 말이, 당신에게 힘이 더 커질수록 더 큰 책임이 당신 어깨 위에 놓이고 위험도 더 커진다는 뜻도 된다. 그래서 현자들은 매번 새로운 영화를 보러 다니거나, 매번 새로운 화젯거리를 찾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너무 많은 책임이 있다. 부모가 된 이들은 책임과 대가를 깨닫지만, 자녀들은 부모에게 부모가 아니라면 결코 얻지 못했을 것을 준다.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나면 쉴 시간이 충분히 많을 것이다. 그럼, 그때 당신은 산불을 끄느라 온통 더러워졌으니, 휴가를 떠나 매우 기쁘게 휴식을 취할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심각한 두려움을 상쇄할 만큼 앎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앎이 당신 내면에서 강력해지면, 당신은 이 세상을 몹시 떠나고 싶어 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임무를 꼭 완수하고 싶어 할 것이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모든 기회에 감사할 것이며, “정말 감사하다!”라고 말하면서 감사히 떠날 것이다.

나와 같은 이의 말을 듣는 것이 왜 중요한가? 왜냐하면 나는 저승에 있는 당신 삶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저승의 삶을 조금이라도 상기하면, 당신의 두려움은 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고립되지 않았고 이 세상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이곳에 머무는 것은 일시적이며, 당신이 생각한 것만큼 당신에게 기대하는 것이 많지 않음을 알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우주에서 신이 될 필요가 없다. 당신에게 우주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우주 안에 있다. 당신에게는 진정한 힘이 있으니, 개인적 힘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

개인적 힘이란 무엇인가? 일시적인 어떤 것에 행사하는 힘이다. 당신은 개인적 힘을 지니고 한평생 살다가, 개인적인 것을 포기한다. 그러면 당신이 얻으려고 노력한 모든 것이 사라진다. 당신은 빈손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내 개인적 힘은 어떻게 된 거지?” 하고 말한다. 그 힘은 당신의 개인적 측면과 함께 두고 가며, 당신 옷과 함께 버렸다. 왕과 왕비가 세상을 떠날 때, 그들의 왕관과 보석, 무덤은 두고 가게 된다. 당신이 세상을 떠날 때, 당신의 업적은 두고 가게 된다. 여기서 유일하게 당신의 앎은 제외이다. 그 앎이 당신 내면의 삶이고, 지금 그러하듯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때도 당신 내면의 삶일 것이다.

사람들이 앎길에 참여하는 학생이 될 때, 자유와 관련하여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누가 책임자인가를 놓고 많은 우려가 있다. “나는 책임자인가, 아니면 단순히 명령만 따르는가? 나에게 일어난 일에 어떤 결정권이 있는가? 내가 조종당하거나 이용당하고 있는가?”

이것들은 매우 진지한 물음이다. 하지만 앎은 그 물음들을 즉시 해결한다. 개인적 자유를 포기하는 것은 신을 회복하고 당신의 모든 진정한 힘을 회복하는 것이다. 당신의 개인적 자유는 당신을 무분별하게 몰아갈 것이다.

우리가 당신에게 무엇을 제공해야 하는가? 우리는 당신이 앎을 회복하도록 상기시키고 도움을 제공한다. 이것은 당신에게 주는 자율권이다. 하지만 이것은 당신을 조금 변화시키는 자율권이다. 왜냐하면 전에는 당신이 단지 부분적으로만 당신 자신이었고, 이제는 완전히 당신 자신이 되어가고 있으며, 모든 것을 다르게 느끼는 것이 생소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미래도 과거도 없고 자신을 염려하지도 않는 멋진 순간에, 더 당신 자신처럼 느낀다. 당신은 세상을 염려하고, 자신이 아니라 세상을 감지한다.

개인적 자유는 앎을 발견하는 이 기회를 당신에게 제공한다는 점에서만 가치가 있다. 이것은 교환이다. 큰 지혜를 받아들이기 위해 당신 삶에서 쥐는 지배권을 일정 부분 포기하는 것이다. 어린이는 청소년기에 들어가려면 유년기를 포기해야 한다. 이것은 포기와 수용이 동시에 일어난다. 당신이 유년기의 유치함을 버리지 않으면, 그 유치함을 지닌 채 다음 선물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앎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것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다.

우리는 자유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왜냐하면 자유가 앎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 자유는 물건을 취하는 자유가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의 목록이 있다. 사람들은 살면서 관계나 직업, 그 밖에 다른 온갖 것을 구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당연히, 그들이 그것들을 구하면, 계속 유지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그 관계들은 항상 무너지고 온갖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오래되면 당신은 새 차를 사야 한다. 이러한 것들이 나쁘지는 않지만, 당신이 자신과 모두에게 훨씬 더 본질적인 어떤 것을 추구할 때 이러한 것들은 자연스럽게 찾아온다.

세상에 앎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차이는 성장의 수준, 조율의 수준, 깨달음의 수준에서 차이가 있다. 모든 사람의 유일한 공통 요소는 앎이다. 앎의 수준에서는 불일치가 없다. 그래서 당신이 만약 삶과 완전히 일치하고 싶다면, 당신의 개인적 측면이 당신의 주의를 방해하지 않을 만큼 충분히 투명해야 한다. 그러면 당신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통해 움직이는 삶을 감지하기 시작할 수 있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볼 수 있으며, 현명한 이들을 알아볼 수 있고, 무지한 이들을 연민으로 바라볼 수 있다. 이제는 비난이 없으며, 인내심이 있다. 그것도 엄청난 인내심이 있다!

당신이 잠시 동안 자신의 교사라고 상상해 보라. 삶을 헤쳐 나가는 자신을 지켜보면서 개인적으로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고 상상해 보라. 이때 교사인 당신이 지녀야 하는 인내심을 상상해 보라. 당신이 여기저기에 소소한 이 온갖 것들을 심어 놓으면, 이 사람은 아마 이곳에 와서 이것을 볼 것이다. 이 사람은 당신이 심어 놓은 것의 90퍼센트는 놓치고, 10퍼센트는 놓치지 않으며, 어쨌든 보통은 전체를 잘못 해석한다. 그래서 당신은 항상 이 사람을 이 사람 자신에게 데려오려고 일을 꾸미며, 이 사람은 항상 더 멀리 달아나려고 일을 꾸민다. 대단한 인내심이 필요하지만, 그 결과는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 세상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앎뿐이다. 앎은 사상이나 철학이 아니다. 앎은 심오한 체험이다. 앎은 보편적이고 시대를 초월하며 모든 차원에 유효하다. 하지만 앎은 무섭다. 당신은 한결같고 목적이 있는 자유를 위해 자신에게 익숙한 자유, 혼란 상태에 있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 당신에게 방향이 있을 때, 당신의 선택권은 제한된다. 실제로 앎이 강해지면, 얼마 후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것이 자유이다. 자유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태이다. 이제 당신은 명백한 것,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것을 다루고 있으며, 평범한 선택을 다루고 있지 않다. 삶은 매 순간 활력이 넘친다. 만약 무엇을 선택할까 생각하고 있다면, 당신은 자신이 그 상황에서 앎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확신할 수 있다.

앎의 강렬한 힘은 세상에서 고집하는 어떤 것도 누르고 올라설 정도로 강하다. 이 수준에서 하는 헌신은 신을 가장 잘 실연한다. 이 헌신은 강력하고 끝이 없으며 자비롭다. 이 헌신에는 활력이 있다. 이 헌신은 이 세상 너머에 있는 어떤 것에서 추진된다. 그것은 비범하고도 가차없는 힘이다. 그것은 비용이나 장애물에 마음을 쓰지 않으며, 실무적으로 일하는 데 마음을 쓴다. 앎과 함께하는 사람들은 비범하고 강력할 것이다. 그들은 자진해서 혼자 있는 경우가 아니면 혼자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선택은 회피하는 어떤 것이라고 현자들이 말하지만, 이 세상에서는 그 선택을 매우 소중히 여긴다. 사람들은 “모든 일에 선택권이 나에게 있어야 한다. 정부는 나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할 수 없다. 내 아내도 말할 수 없고, 내 친구도 말할 수 없다. 내 몸도 말할 수 없고, 날씨도 말할 수 없다. 내 마음대로 해야 한다. 모든 것은 내 선택권이다!”라고 말한다. 어린아이처럼. “내 것!” 그것이 자신에게 좋은지 나쁜지는 중요하지 않으며, “내 것”인지만 중요하다.

하지만 앎이 드러나면서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이기 시작한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그다지 많지 않다.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 매우 강한 끌림, 얼이 빠질 정도로 강한 끌림을 느끼면, “오, 얼마나 멋진 끌림인가!”라고 말하면서 휩쓸려 가다가 나중에야 거기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아보기보다는, 당신은 먼저 멈추어 이것이 앎인지 아닌지를 확인한다. 당신은 자신을 제지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당신은 자신의 성취에 필수적이고 타인에게 하는 공헌에 필수적인 것으로 계속 되돌아갈 수 있다.

그러고 나면 당신은 “어디에 나를 완전히 내줄까?”라고 묻고, 주위를 둘러봐도 자신을 내줄 만큼 매우 영감을 주는 것이 별로 없으므로, 당신의 준비에 자신을 내주어야 한다. 당신은 세상이 당신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제 자기 삶이 짧은 시간 동안 어떤 것들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이렇게 애쓰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세상은 당신이 공헌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온 곳이다.

세상은 왜 이렇게 힘든 곳일까? 지금 세상을 전혀 힘들지 않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역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이것의 모순이 보이는가? 모순이 있다. 문제는 삶이 어렵냐 편하냐가 아니라, 활력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매우 편한 삶을 살고 있으나, 내면은 죽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오래전에 활력을 잃었다. 그들이 지금 바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죽음을 늦추고 계속 즐거운 자극을 유지하는 것뿐이다.

삶이 어려울 때 가끔 활력이 생기기 시작한다. 만약 삶을 너무 편하게 해 놓으면, 당신은 안락하고 편안한 상태에서 잠들어 있을 것이다. 해야 할 것도 없고, 활력도 없다. 당신이 한평생 일하여 많은 돈을 벌면, 당신 자녀들은 전혀 활력 없이 자랄 것이다. 이것은 매우 명백하다. 당신은 당신 주변에서 그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삶은 수동적이지 않다. 삶은 활기차고 강력한 힘이며, 가벼운 참여가 아니라, 진지하고 완전한 참여이다. 삶에는 그 무엇도 가볍지 않다. 삶이 조용하든 활동적이든, 삶은 지극히 포함되어 있다.

일이 생기는 것은 원해서가 아니라, 필요해서이다. 구름은 지나가고 싶어서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여기로 끌려오며, 와야 하므로 온다. 구름은 재미로 비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비를 내려야 하므로 내린다. 당신은 주어야 하므로, 주려고 세상에 온다. 그것이 당신 본성이다. 만약 주지 않으면, 당신은 불행할 것이고, 주지 않은 것에 대해 심지어 자신까지 포함하여 모든 사람을 탓하겠지만, 당신은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주려면, 당신은 준비해야 한다. 앎은 책임이다. 당신은 앎을 지닐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어린아이 같아서는 책임을 질 수 없다. 당신은 준비해야 한다. 삶은 당신을 위해 준비할 것이고, 당신은 자진해서 준비해야 한다. 만약 당신이 이곳에서의 당신 삶의 신비를 밝히고 싶다면, 당신 삶에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게 하면 개인적으로는 아마 당신이 자유롭지 않겠지만, 이것이 더 중요하므로 그것은 괜찮다.

이제 우리는 다른 세계의 역사에 대해 짤막한 이야기 하나 들려주겠다. 그 세계에서는 가장 현명한 이들에게 개인적 자유가 거의 없다. 사실, 그들은 전혀 돌아다니지 않는다. 그들은 휴가를 가지 않으며, 갈 필요도 없다. 통찰이 가장 적은 이들에게 가장 많은 자유가 있다. 통찰이 적은 이들은 어떤 지침 안에서 온갖 일을 할 수 있으며,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을 구별할 필요가 없다. 그렇지만 현명한 이들은 매 순간 차이를 구별해야 하지만, 모든 순간이 그들에게는 끝이므로 이렇게 할 수 있는 힘과 동기가 있다. 그들은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외에는 거의 할 수 없는 상태에 도달했으며, 필요한 것은 비범한 능력으로 한다. 사실 이것은 지구와 인류 사회에 비교하면 뚜렷이 다를 만큼 매우 비범하여 인류가 그 세계에 비해 놀랍도록 게으르고 나태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인류는 이 종족이 아니며, 그들은 인류와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앎은 모든 세계에서 동일하다. 앎은 모든 지적 생명체의 공통 요소이다.

다른 세계들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새로운 기계를 가졌다고 해서 상황의 본질이 그렇게 달라진다는 뜻은 아니다. 당신이 이것을 아는 것이 왜 중요한가? 그것은 저 밖에 있는 것이 한 종족으로서 인류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당신의 미래를 보고 있다. 인류의 기술이 바로 이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다. 당신은 바로 이것을 정서적으로 준비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당신 삶의 모든 측면을 바꾼다. 바로 이것이 빠른 속도로 부족 사회를 파괴하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지구가 통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현명한 자와 현명하지 못한 자의 차이점은 여전히 동일할 것이다. 비록 당신에게 당신 조상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가 있고, 훌륭한 장치들과 훌륭한 기계들이 있을지라도, 당신은 앎을 발견했든 못했든 여전히 당신의 앎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물질 우주에는 문화와는 관계없이 현자들이 많지 않다는 내 말을 믿으라. 왜 그런지 아는가? 왜냐하면 현자들은 숨어 지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선물은 오직 특정인에게만 가도록 되어 있으므로, 그들은 숨어 지내야 하며, 베풀 자유를 유지하기 위해 숨어 지내야 한다.

이 시기에 당신 앎에는 성취해야 할 구체적인 일이 있다. 왜냐하면 영적 가족을 떠나 세상에 들어올 때, 당신은 역사의 한 시기에 들어오고, 당신의 공헌은 역사 속 그 시기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신에게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도착한 그 시대와 관련되어 있어야 한다. 당신은 돌도끼를 들고 산불을 끄러 갈 수는 없다. 필요한 것은 소방차이므로, 당신은 소방차를 타고 가야 한다.

어떤 사회에 있는 사람들은 많은 자유와 많은 호사를 누리지만, 의무는 거의 없어서, 그 때문에 매우 외롭다. 그렇게 분리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의무를 싫어한다. 의무는 엄청난 자유의 상실이라고 그들은 생각하지만, 의무의 진정한 본질은 구속이 아니라, 의미 있는 참여이다. 여기 말고 내가 어디 있어야 하는가? 나는 어디든 갈 수 있어도 여전히 여기에 있어야 하므로 나에게 선택은 의미가 없다. 끝없는 선택, 끝없는 논쟁, 나는 이제 그것에서 자유롭다. 그것이 자유이다. 한없이 깊이 생각하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나는 이렇게 물으며 한없이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앎이 나를 앞질렀기 때문이다.

자유는 사람들이 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큰 이유이지만, 신은 당신이 자신에게 의미 있게 줄 수 없을 정도의 큰 자유와 힘을 당신에게 준다. 신은 당신이 스스로 자신의 능력과 가치를 되찾을 수 있도록 책임을 준다. 당신에게 이 가치가 없다면, 당신은 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 작은 부스러기가 되어서는 당신이 신에게 갈 수 없다. 신은 당신을 작은 부스러기로는 알지 못하며, 장엄한 창조물로 안다. 당신은 “나는 장엄한 창조물이다!”라고 적힌 큰 이름표를 달고 자신을 부풀리는 것으로 신에게 가서는 안 되며, 당신 내면에서도 작은 부스러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당신은 자신이 당신을 만든 대로가 아니라, 신이 당신을 만든 대로 신에게 가야 한다.

그래서 신은 당신의 인식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당신을 끌어당긴다. 모든 것을 신에게 끌어당기는 엄청난 진공 장치와 같다. 그래서 영적 가족들이 있다. 그래서 모든 수준에서 교사와 학생들이 있다. 나에게도 교사들이 있다. 그들이 나를 끌어당긴다. 나는 당신을 끌어당긴다. 당신은 다른 사람을 끌어당긴다. 그것은 큰 끌어당김이다. 그렇게 해서 모든 것이 고향으로 다시 끌어당겨지게 된다. 앎이 당신 내면에서 활성화되는 만큼, 당신은 자연스럽게 이 일에 공헌할 것이다. 당신이 달리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