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풂 II

1987년 12월 12일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서
신의 메신저 마샬 비안 서머즈에게
계시되다

이 본문에 관하여


What you are reading in this text is the transcription of the original voice of the Angelic Assembly as it spoke through the Messenger Marshall Vian Summers.

Here, the original communication of God, which exists beyond words, is translated into human language and understanding by the Angelic Assembly who watch over the world. The Assembly then delivers God’s Message through the Messenger, whereafter it is transcribed and made available to you and to all people.

In this remarkable process, the Voice of Revelation is speaking anew. The Word and the Sound are in the world. May you be the recipient of this gift of Revelation and may you be open to receive its unique Message for you and for your life.


Wisdom from the Greater community, volume 1
제5편 > 큰공동체 지혜 1 > 제16장

매년 이맘때가 되면, 베풀어야 한다는 엄청난 의무감, 베풂에 대한 기대감이 있고, 베풂 자체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되므로, 베풂은 특히 이 시기에 적절한 주제이다. 이 시기는 또한 사람들이 자신의 베풀 능력과 베풀고 싶은 욕구, 여기에서 발생하는 문제와 기회를 살펴볼 수 있는 때이기도 하다.

이제 공휴일을 축제일로 기념할 기회가 있다. 어느 날을 축제일, 기념일로 만드는 것은 단순히 신비롭거나 기적적인 사건이 아니라, 과거에 일어난 베풂이 미래로 이어진 것이다.

축제일에 당신은 큰 공헌을 한 이들을 기억하는데, 그 공헌이 그 사건을 성스럽게 하며, 축제일이 되게 한다. 축제일이 되는 것은 단순히 비범한 어떤 큰 사건이 일어났거나, 사람들이 전에 본 적이 없는 어떤 기적적인 사건을 보아서가 아니다. 이것들은 축제일의 의미를 보여주지 못한다. 축제일은 큰 공헌을 한 사람들의 삶을 기념한다.

축제일에 우리가 기념하는 베풂은 의도적인 베풂이 아니다. 그 베풂은 동기가 있어서 베푸는 것이 아니고, 결과를 얻기 위해 베푸는 것도 아니며, 보답하려고 베푸는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베풂의 본질이 아니다. 베풂의 본질은 동기가 확실하지 않고 결과도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을 내주는 것이다. 당신은 어떤 것에 자신을 내준다. 그렇게 할 때, 지속적으로 영향을 준다.

당신은 자신이 무엇을 베풀고 싶은지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당신은 정말로 모른다. 당신이 베풀고 싶은 것은 당신의 가장 큰 선물이 아니다. 당신의 가장 큰 선물은 삶이 당신에게서 끌어낸다. 당신이 이것을 준비하려면, 매우 정직해야 하고,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삶이 당신에게서 끌어내는 환경에 당신이 있으면, 이때 당신 앎이 활성화된다. 이때 당신 내면에 있는 매우 강력한 어떤 것이 베풀며, 당신은 자신이 계획하지 않은 어떤 것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고, 그 결과는 알지 못한다. 바로 그때 당신이 살아난다. 그것이 축제일을 만들어 낸다. 바로 그날 어떤 사람이 완전히 살아나며, 그 사람의 앎이 활성화되어 그 사람이 자기 삶을 특정한 영역에 완전히 주었다. 그것이 축제일이다.

이 세상을 졸업하려면, 이 체험을 해야 한다. 물질계에 참여자가 되는 것을 넘어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면, 영계에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 이때 당신은 베푸는 것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으니, 이것이 완전한 베풂의 위치이다. 당신은 음식, 주거지, 칭찬, 안전, 생존, 로맨스 같은 일상적인 것들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흥정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 시점이 되면, 당신은 할 수 있는 것이 베푸는 것뿐이므로 베푼다. 그것이 바로 삶 자체를 표현하는 삶이다.

다음 단계에서는 받는 것이 당신의 관심사가 아니다. 이때 당신의 관심사는 당신의 선물을 받을 이들이 받을 것인지이다. 그것이 관심사이다. 당신은 당신 선물을 받는 이들의 안녕에 관심이 있다. 만약 그들이 당신이 준 것과 당신이 주려고 준비한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계속 비참할 것이고, 혼자 힘으로 온갖 것들을 굳게 지키려고 하지만, 삶이 그들에게 영적 가족을 줄 수 없으므로 매우 속았다고 느낄 것이다. 삶은 그들이 그렇게 갈망하는 포함된 느낌을 줄 수 없다.

그러므로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성스러운 체험인, 이승을 졸업하려면, 당신은 자신을 온전히 내주어야 한다. 그러면 당신이 이승을 떠나 영적 가족에게 돌아갈 때, 관계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는다. 뒤에 남은, 당신이 가져온 관계들은 당신의 가슴속에 영원히 있다. 당신은 그 관계들을 자신의 일부로 회복했다.

당신의 모든 베풂은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베풂은 우리가 가리키는 이 큰 전환점, 앎이 당신 삶을 주는 곳인 이 큰 전환점을 향해 가는 길을 닦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삶을 내주었다. 우리가 삶을 내준 것은 어떤 동기 때문도 아니었고, 그 일이 좋은 것이거나 우리를 어딘가로 데려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적절한 곳에 자신을 내줄 때, 큰 전환점에 도달했다. 그날은 축제일이다. 그 일이 일어난 날은 잊혀지겠지만, 베풂의 결과는 계속될 것이다.

크리스마스 시기는 예수의 탄생을 기념한다. 지금 매우 널리 퍼져 있고 소중히 여겨지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 이야기들은 실제로 그의 공헌을 알아보기 어렵게 한다. 그는 영적 가족의 선구자였다. 그는 “왕국”을 말했고, 그 왕국과 자신의 관계를 말했으며, 자신이 왕국을 경험한 것에 다른 이들도 포함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무엇을 베풀지 결정했는가? 그는 자신이 얼마만큼 베풀지 결정했는가? 그는 베풂에 완전히 넘겨주었다. 그의 실연은 매우 비범한 행동이었지만, 그의 본보기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베풂의 전형적인 예이기 때문이다. 그가 어떤 특정한 날에 그처럼 느꼈는지가 중요한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소망보다 더 큰 힘에 의해 움직였고, 그 결과 그의 소망이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그의 소망이 그의 특성과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베풂은 불가사의하고 경이롭다. 당신은 베풂의 증인이 된다. 당신 삶은 고립된 불쌍한 사건이라기보다는, 당신이 경탄하는 어떤 것, 신성한 사건이 된다. 당신 삶은 당신이 무언가를 주고 무언가를 되돌려받고 나서, 하루가 끝날 때 저울이 어느 쪽으로 기우는지 보려고 무게를 재는 것과는 다르다. 당신은 이제 중요한 삶을 살게 되어 매우 행복하다. 그 삶은 모두가 원하는 것이다. 즉 중요한 삶, 당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삶이나 정당화할 수 있는 삶이 아니라, 중요한 삶이다. 그때가 바로 당신이 삶의 방향을 바꾸고, 건강을 잘 돌보고, 매개체로서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때이다. 이것들은 모두 중요하다. 이제 당신 삶은 당신 만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당신은 목적이 있어 이곳에 왔고, 이제 그 목적을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 목적이 실행되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이전에 행해진 베풂을 생각하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이다. 당신이 이처럼 살아갈 수 있게 한 베풂이 많았으며, 심지어 매우 물질적인 의미에서도 베풂이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바쳐 당신이 주변에서 보는 편리한 것들을 발명했으며, 이것들을 만들어 내고 이용할 수 있게 하였다.

종교에 잘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종교가 살아 있게 하는 데는 엄청난 베풂이 필요했다. 종교는 생기자마자 사라진다. 종교는 매우 빠르게 훼손되어서 매 순간 다시 태어나야 하는 어떤 것이다. 만약 종교가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면, 종교는 단지 또 다른 사고 체계가 되며, 자유를 위한 조직이 아니라, 속박이 될 뿐이다. 종교는 새로워져야 한다. 세상에서 종교를 새롭게 하는 것은 앎이며, 이러한 베풂의 특성이다. 이러한 베풂에서는 개인들이 자신의 삶을 자연스럽게 내준다. 그들이 신이 살아 있게 할 만큼 많은 삶을 신에 대한 관념에 불어넣는다. 이처럼 불어넣지 않으면, 신은 죽는다. 사람들이 “신은 죽었다.”라고 말할 때는 신이 단지 관념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신의 삶은 희미해진다. 그때 누군가가 나타나서 자신의 삶을 내주는데, 그것이 바로 신이다. 그리고 당신은 “오, 세상에. 저것이 신이야!”라고 말한다.

이런 베풂을 어떻게 성취할 수 있는가? 이런 베풂이 일어날 때 당신이 세상에 있는 동안 당신의 영적 가족이 당신에게 드러나며, 당신이 제때 자아를 성취하고 당신의 목적을 완수한다. 이 베풂을 가능하게 하는 것 중 하나는 이곳에 온 다른 모든 이유가 마침내 사라지는 것이다. 이것은 이해하기가 매우 혼란스럽다. 왜냐하면 종종 어떤 것들이 당신을 떠나거나, 당신이 그것들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확신이 없어지고, 생각한 것이 맞지 않으며, 흥미를 잃는다. 모든 것이 멈추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 삶이 어떠해야 한다고 당신이 생각한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처럼 보이고, 당신은 혼란스러워진다. 이 혼란에서 진정한 열림이 시작된다.

철학적으로는 이것을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앎의 학생들은 확신이 없어지면서 동시에 더 강해지는 이러한 이중적 경험을 한다. 그들은 자기 삶의 세부 사항에 대한 통제력은 떨어지지만, 삶의 방향에 대한 통제력은 더 커진다. 무엇이 오늘 일어나는지보다 무엇을 위해 오늘을 써야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그러나 이전에 그들은 자기 삶의 세부 사항들과 자신의 욕구 충족에 매우 관심이 있었다. 기본적인 생존을 넘어 그들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이루고 싶었다. 왜냐하면 이것이 행복을 가져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앎의 학생들은 이러한 형태의 자극에 흥미를 잃기 시작한다. 그들에게는 더 신비롭고 더 강렬한 다른 관심사가 있다. 세상에 있기 위한 다른 모든 동기가 사라지기 시작하고, 그 자리에 어떤 것이 생기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그것이 불분명하다. 그것은 단지 확신뿐인 것으로 자신에게 삶의 목적과 방향이 있고, 자신이 그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일어나는 일을 설명할 수도 없고, 옳다고 증명할 수도 없다. 누가 그들에게 “삶에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그들은 “나도 더는 모르겠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이전에 몰랐던 매우 중요한 일을 할 것임을 안다.

그래서 이것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당신이 얻는 것은 훨씬 더 크다. 당신은 목적, 의미, 방향을 얻는다. 여기서 당신 삶은 점점 더 설명할 수 없게 된다. 당신이 이것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면, 이것은 매우 흥미롭다. 그런데 이것을 두려운 시각으로 보면, 이것은 비참해 보인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되려는 당신의 이전 동기가 무너지고 있는데도 진정한 당신은 아직 온전히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당신이 준비되면, 진정한 당신이 당신 삶을 줄 것이다. 당신은 추종자이자 동시에 지도자가 될 것이다. 이것은 당신이 주로 자기 생각에만 관심을 가지던 이전의 당신 상태와는 완전히 다르다. 이제 당신은 삶 그 자체와 함께 움직이고, 당신이 느끼는 삶은 당신 생각보다 더 크며, 당신은 자기 생각을 훨씬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당신 생각들이 당신을 그렇게 많이는 구속하지 않을 것이며, 당신 삶은 당신 주변에 있는 이들이 기념하기 시작할 성스러운 일이 된다.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이 출현하면, 당신은 같은 것을 경험하는 다른 사람들을 끌어당기기 시작하고, 당신의 관계는 그 질이 훨씬 더 깊어지기 시작한다. 당신과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 사람들은 떨어져 나가기 시작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온다. 왜냐하면 당신의 관계는 이제 새로운 기반을 갖기 때문이다.

방향이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영향력과 사건을 만들어 낼 힘이 있다. 여기서 방향은 힘이다. 왜냐하면 사람들 대부분은 방향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자신의 상황에 지배받을 뿐, 자신의 삶이 자신이 진정으로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을 위한 것임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래서 방향이 있는 사람은 그 방향이 좋든 나쁘든 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진정으로 베푸는 사람들은 자신이 왜 베푸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이유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다. 그것은 너무 강력하다. 신은 그들의 삶을 이용하여 세상에 신의 족적을 남긴다.

당신은 베푸는 삶을 위해 개인적으로 당신 몸과 마음을 준비해야 한다. 그저 기존의 것들만 떨어져 나가면 되는 것이 아니며, 당신이 안정되어야 하고, 당신의 비전을 잃지 않고 자신의 내적 폭풍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한다. 앎은 지니기에 매우 큰 것이므로 당신은 앎을 지닐 수 있게 안정되어야 한다. 이것이 역량이다. 은총을 경험하려면 당신 내면에 매우 큰 빈 공간이 있어야 한다.

지금 사람들은 항상 자신을 넘치도록 가득 채우려고 애쓴다. 큰 화젯거리와 걱정, 행복과 슬픔 말고는 당신 자신을 채울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그래서 당신은 항상 자신의 삶을 계속해서 가득가득 채우려고만 한다. 만약 자극이 없어지기 시작하면, 그때는 매우 무서워진다. “오, 맙소사! 내 삶이 공허해지고 있어. 빨리! 나는 무언가를 해야 해! 관계를 찾아야 해! 새 직장을 구해야 해! 새집을 지어야 해! 여행을 해야 해! 나는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해.”라며 당신 삶을 항상 가득 채우고 있다.

그러나 앎의 학생들은 자극이 멈추게 놓아두기 시작하여, 자극이 숨기는 것이 드러날 수 있게 한다. 이것이 바로 신이 진정으로 당신을 파견했다는 큰 믿음이다. 자극이 멈추게 놓아두는 것은 단순히 당신이 다른 것에 흥미를 잃고 있으므로 당신 앎이 지시하는 어떤 것이다. 이제 당신은 자극 대신 고요함을 추구한다. 당신은 완전히 가득 찬 느낌 대신 자신의 마음이 열리게 놓아두고 싶어 한다.

삶에서 이런 주안점의 변화는 매우 자연스럽고 영적 출현을 의미한다. 그것을 분석하는 것은 탁상공론이다. 그 변화는 전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만약 그 변화가 아직 당신 내면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면, 당신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그 변화가 심리적 과정이나 영적 과정, 다른 종류의 과정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당신이 그 변화를 직접 겪지 않았고, 당신 삶에서 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당신이 정말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당신의 삶은 선물이다. 만약 그 선물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당신은 반송 우편물처럼, 미개봉 소포처럼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다. 당신은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적 가족에게 돌아가면, 당신은 자신이 미개봉 소포라는 것을 알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오, 세상에! 지금 여기 나와 함께 있는 당신들을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었을까? 나는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돌아가고 싶어! 제발, 돌아가도 돼? 이제 너무나 분명하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다시 오고 싶을 것이고, 다시 돌아와야 한다.

당신 주변 환경에서 동물과 식물들을 보면, 당신은 그들이 생을 마감할 때 아무것도 남지 않도록 모든 것을 주는 것을 볼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특성과 역할에 따라 그들의 기를 소진한다. 당신에게도 특성과 역할이 있으며, 단지 그들보다 더 클 뿐이다.

당신이 삶에서 하는 공헌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당신이 실제로 하는 공헌은 다음 세대를 위한 것이고, 당신은 그것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나는 내 삶에서 공헌하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는 그 결과가 보이지 않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당신의 진정한 공헌은 미래 삶의 가능성을 위해,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복원의 가능성을 위해,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다.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축하한다. 왜냐하면 복원의 가능성을 위해 삶을 내주었기 때문이다. 앎은 세상에 살아 유지되었다. 종교에는 영이 불어넣어졌다. 매우 독특한 삶을 완전히 내주었고, 그 당시 죽어 있던 종교에 삶을 불어넣어 종교가 다시 숨쉬기 시작했다. 신은 항상 삶에 삶을 불어넣고, 형태에 본질을 불어넣는다. 모든 것이 죽기 시작하면, 새 삶을 가져오기 위해 세상에 사람들이 파견된다. 이것이 삶을 계속 유지하고, 당신 복원을 가능하게 한다.

당신의 공헌은 오랜 세월 동안 충분히 느껴지지 않을 것이며, 심지어 당신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럴 것이다. 당신이 이곳에 있는 동안 당신의 공헌을 정당화하기는 매우 어렵다. 어떻게 그리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건물을 짓고 제국을 건설할 수도 있으며, 메달과 기념품들을 소유할 수도 있다. 당신이 멋지다고 모든 사람이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당신을 잊을 것이다. 건물들은 무너질 것이다. 베풂에 대한 정당성은 그런 식으로 찾을 수 없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은 자신이 삶에서 결혼하여 자신을 완전히 내줄 수 있는 어떤 것을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당신은 베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현명하게 베풀어야 한다. 당신이 동기를 가지고 베풀면, 잘못된 곳에 베풀 가능성이 클 것이다. 당신은 자신의 베풂으로 무언가를 증명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의 베풂은 당신의 존재를 필사적으로 정당화하려고 시도할 것이고, 당신은 돌려줄 수 없는 사람들에게 베풀 것이다. 당신은 가능성이 없는 상황에 베풀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용당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쓰라리고 혼란스러울 것이다.

당신이 삶을 내주어야 하는 곳에 오면, 당신 삶은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이 당신에게 되돌려줄 것이다. 이것은 자연스럽다. 당신이 이곳에 오면 당신에게 가능성이 있으니, 망설이지 말라.

자신이 진정으로 베푸는 자임을 아는 이는 어디에 베풀어야 하는지 깊이 분별해야 한다는 것을 이미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진정으로 자신을 베풀어야 할 곳을 찾으면, 당신 앎이 그것을 가리켜 줄 것이고, 당신은 그것을 정당화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당신은 맞는 곳이 불현듯 생각났음을 알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이 당신 앎에 불을 붙일 것이고, 당신 앎이 자신을 내주고 싶어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경험이며, 어떤 것을 얻으려고 베푸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이때 당신 내면의 교사들과 접촉하는 것은 의미가 매우 깊다. 왜냐하면 이 접촉이 베풂을 위한 관계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이 접촉의 선물을 받아들인다면, 이 접촉은 당신에게 베풀도록 불을 붙일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단지 베풀기 위해 이곳에 왔기 때문이다.

이제 문제는, 만약 당신이 자신의 삶을 지배하려고 하면, 당신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 혼자 힘으로 확실히 해야 할 것들이 매우 많으므로, 베풀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당신이 몰두하는 것은 사람들이 당신에게서 빼앗아 가지 못하게 막고, 당신이 가진 것을 지키며,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하고, 당신 삶과 일을 지배하려고 힘쓰는 일이다. 당신을 위협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완전히 베푼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이 자신의 왕국에서 얼마나 고통받는지를 느끼게끔 당신 가슴에 불을 지르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자기 삶에 대한 지배권을 얻으려 하고 자신의 개인적 왕국을 세우려고 한다면, 삶에 매우 속았다고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삶은 당신에게서 항상 무언가를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 삶은 항상 당신 성벽의 기반을 침식한다. 삶은 어떤 식으로든 항상 당신에게서 빼앗아 간다. 상황이 당신을 공격하고, 질병이 당신을 공격하고, 다른 사람들의 개인적 탐욕이 당신을 공격하고, 시간이 당신을 공격한다. 그래서 당신이 자신의 영역에서 주인이 되어야 하고, “내가 책임진다!”라며 아무도 당신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할 수 없다고 고집하는 것은 매우 슬픈 상태이다. 책임지는 것은 당신이 진짜인 것을 따를 때 의미가 있다. 이때 당신은 자신의 마음과 일을 관리하는 데 진정한 절제력과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당신에게는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개인 차원에서 진정한 주인의 영역이다.

당신 왕국의 왕이 되는 것은 절망과 실패로 이어지므로 매우 비극적이다. 왜 그러는가? 왜냐하면 당신은 돌아오라고 호출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 삶은 세상의 것이 아니다. 당신은 목적이 있어 이곳에 파견되었으며, 약간의 시간을 보내고 나면 다시 호출을 받는다. 만약 당신이 자신의 왕국, 자신의 개인적 왕국을 당신 영적 가족에게 가지고 가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그것은 전혀 무의미할 것이며, 단지 당신의 개인적 생존을 위한 장치일 뿐이다.

그래서 앎을 따르는 사람은 자기 삶의 주인이 되겠지만, 자기 삶을 완전히 삶에 내줄 것이므로 갈등이 없다고 우리가 말한다. 그들은 세상보다 더 부자이므로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베풀기 위해 이곳에 왔다. 세상은 그저 그들이 베풀 수 있는 것들을 제공할 뿐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삶을 내줄 수 있을 만큼만 갖고, 또 그만큼만 원한다. 그들은 이제 부자이고, 세상은 가난한 곳이며, 그 반대가 아니다. 당신이 개인적 성취에서 개인적 양도로 전환할 때, 세상에 대한 경험이 완전히 뒤바뀐다. 베풂이 양도이다. 꽃은 피어 모든 것을 내주고 나서 죽는다. 양도하라! 그러면 이득을 얻는다. 완전히 양도하면, 완전히 성취한다.

사람들은 양도가 길가에 누워서 포기하는 수동적 상태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매우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양도는 앎이 당신 삶을 넘겨받아 내주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가장 큰 행위이다. 이렇게 할 수 있을 때까지 당신은 자신의 능력을 키워 준비해야 하고, 자신의 성격에서 해로운 성향을 누그러뜨려야 할 것이다. 당신은 새로운 기반을 구축해야 하며,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아직은 앎의 문턱에 도달한 사람이 많지 않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에게는 앎의 기반을 마련할 기회가 있으며, 그리하여 앎이 드러나면 세상에서 유지할 수 있다. 정직하고 일관되고 헌신하고 공헌하고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은 이미 앎의 기반을 개발했으므로, 앎이 넘겨받으면 앎은 유지할 것이다. 앎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고, 세상은 앎을 공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앎이 드러나기 전에 개인적으로 자신에게 공을 들일 때, 이해할 수 없는 더 큰 통로를 위해 자신을 준비시킨다. 댐이 무너질 것이다. 결국 신의 화살 하나가 표적을 맞혀 당신은 무너지고 한동안은 엉망진창이 된다. 야망을 이루려는 당신의 모든 시도는 실패하고, 어떤 것이 마음을 흔들기 시작한다. 바로 그때 당신이 다시 태어난다. 그것이 크리스마스이다. 크리스마스는 나중에 예수가 된 아이의 탄생이 아니다. 크리스마스는 개인에게 앎이 탄생하는 날이다. 그것은 진정한 베풂의 시작이고, 바로 우리가 축제일에 기념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베푼 모든 사람이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당신 삶을 가능하게 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당신은 말 그대로 다른 이들의 베풂으로 일구어진 땅 위를 걷고 있다.

나무는 이전 세대들이 마련한 땅에서 자란다. 나무가 죽으면, 새로운 나무가 살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 된다. 앎도 이와 같다. 앎은 미래의 앎이 살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 될 수 있도록 세상에 앎 자신을 내준다. 신은 세상에 삶을 불어넣고 있다. 당신이 더 발전하고 더 성장할수록, 당신 삶은 더 포함될 것이고 이 점에서 당신 공헌도 더 커질 것이다.

그러므로 앎의 학생이 되려면 당신 삶에 삶의 신비가 있는 것을 허용하라.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하지 말고, 모든 것을 정당화하려고도 하지 말라. 일단 이것이 당신 삶이어야 한다고 당신이 선택했으면, 앎은 당신 내면에서 드러날 것이다. 당신은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그다지 확신하지 못할 것이고, 자신의 목적과 의미와 방향에 대해서는 더 확신하게 될 것이다. 이때 당신은 불안과 양가성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기 시작할 것이고, 이것이 무엇보다 가장 큰 선물이다. 왜냐하면 불안이나 양가성이 없는 삶이 세상에 완전히 전해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