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공동체의 신


2008년 6월 13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에게
계시되다

이 본문에 관하여


What you are reading in this text is the transcription of the original voice of the Angelic Assembly as it spoke through the Messenger Marshall Vian Summers.

Here, the original communication of God, which exists beyond words, is translated into human language and understanding by the Angelic Assembly who watch over the world. The Assembly then delivers God’s Message through the Messenger, whereafter it is transcribed and made available to you and to all people.

In this remarkable process, the Voice of Revelation is speaking anew. The Word and the Sound are in the world. May you be the recipient of this gift of Revelation and may you be open to receive its unique Message for you and for your life.


Life In The Universe
제4편 > 우주의 삶 > 제13장

결국 세상의 모든 종교는 신에 관한 그들의 믿음과 입장을 큰 공동체에 비추어 재고해야 할 것이다.

당신은 “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삶의 이 거대한 파노라마에서 신은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신의 현실은 이곳 지구에서 신을 생각하는 방식과 무엇이 다른가?”라고 자문해 보아야 한다.

큰 공동체의 신은 큰 공동체에 사는 모든 존재의 신이지, 인류만의 신이 아니다. 인류는 시야 아득히 펼쳐진 해변의 모래알과 같은 행성인, 그저 작고 아름다운 한 행성에 있는 아주 작은 한 종족이다. 신은 외모나 인식, 태도, 심지어 지성의 특질까지 인류와는 아주 다른 무수한 종족, 무수한 존재, 다른 존재들의 신이다. 신은 그들의 신이기도 하다.

그들 내면과 당신 내면에 신이 창조한 것은 앎의 힘과 현존이다. 바로 이 앎의 힘과 현존을 통해 우주의 모든 지적 생명체와 당신이 결합한다. 그런데 신은 진화도 창조했다. 이 진화로 당신의 독특한 물리적 매개체인 당신의 몸과 이성이 만들어졌다. 신은 이 몸과 이성을 자리 잡게 한 힘들도 저절로 돌아가도록 했다.

이것은 신이 한 민족이나 한 종족, 한 행성의 신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관점이다. 그런 신은 한 부족의 신과 같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 매우 작은 신일 것이다. 당신이 큰 공동체 전체의 신, 모든 곳에 있는 생명체의 조물주를 상상할 수 있다면, 당신은 신에 대한 자기 생각을 재고해야 한다.

결국 세상의 모든 종교는 신에 관한 그들의 믿음과 입장을 큰 공동체에 비추어 재고해야 할 것이다. 종교들이 이 주제를 다루지 않거나 다루기를 매우 꺼리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왜냐하면 이 주제를 다룸으로써 종교들의 가정이 불완전하거나 많은 경우에 옳지 않음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드러나면 그 종교들은 믿음과 이념을 전면적으로 수정해야 할 것이다. 신이 인간에게만 사로잡혔다고 여기는 것, 신이 나머지 우주는 포함하지 않고 인간만을 구원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 대단히 불완전할 것이다. 여기서 구원에 대한 당신의 생각과 개념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이 드러날 수도 있다.

신이 다른 이 모든 종족의 조물주라면, 인류는 어느 위치에 있는가?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기반을 둔 신을 상상한다. 즉, 자신의 이미지와 닮은 신, 인간의 육체를 지닌 신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인간과 유사하게 생각하는 신, 인간의 가치관, 인간의 이성, 인간의 열망, 인간의 판단을 지닌 신, 당신과 닮았으면서도 훨씬 더 강한 신을 상상한다. 그런데 만약 신이 이런 다른 모든 종족의 신이라면, 신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관을 지니고,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원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신에 대한 당신의 모든 개념은 의심받게 되어 틀림없이 깊이 재고될 것이다. 옛날에는 물론, 심지어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는 오직 신과 인류와 세상만 있을 뿐이다. 이는 마치 나머지 우주가 이곳 지구에서 일어나는 이 거대한 드라마의 배경에 불과하고, 모든 것이 인류와 신과 지구에 관한 것이고, 인류와 지구의 천국과 지옥에 관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큰 공동체에서는 이 중 어느 것도 인정받을 수 없다.

신이 평가할 때 인류는 다른 행성, 다른 문명과 관련하여 어디에 위치하는가? 인류는 우주에서 여전히 중요한가? 아니면 광대한 우주, 외견상 비인격적인 우주의 진화 과정을 통해 출현한 무수한 종족 중 하나일 뿐인가?

큰 공동체의 신은 한 종족에만 몰두할 수 없다. 우주의 신은 한 종족에게 일어나는 일이나 사건만을 관리할 수 없다. 신이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스린다고 보는 것은 고립되어 사는 인류가 생각하는 것이다. 신은 매우 지적이어서 당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과 사건을 관리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진화의 과정이 저절로 돌아가게 설정되었다. 그래서 자연 법칙들이 저절로 돌아가게 설정되었다. 그래서 당신이 지금 삶의 과정을 분별하는 법을 배우는 것처럼, 물질 현실에서 삶의 전 과정이 저절로 돌아가게 설정되었다. 그러므로 신은 모든 것을 관리할 필요가 없다. 당신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당신이나 다른 누군가가 의도한 결과이거나 아니면 단순히 무작위로 일어난 움직임의 결과이다.

신은 모든 이를 돌아오라고 부르는 큰 끌림과 같다. 신은 지각 있는 모든 생명체 안에 앎을 심어 놓았으며, 이 앎은 그들의 특성과 상황에 따라 각각의 특정 종족을 위한 성취와 복원의 독특한 계획을 제공한다. 모든 종족을 위한 구원의 계획이 있으며, 비록 신에 대한 큰 끌림은 같더라도, 각각의 계획은 조금씩 다르다. 구원의 계획이 이처럼 보편적으로 적용되려면, 인간의 판단을 초월하는 것이어야 한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자면, 구원의 계획은 앎을 통해 분리된 이들을 회복시키는 것이며, 앎은 이들이 다른 이들에게 공헌하고 갈등의 해결에 공헌하는 것으로 자기 삶을 성취하도록 이끈다.

이것은 매우 간단한 정의이지만,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실제로 어떻게 표현되는가? 삶에서 이것을 어떻게 체험할 수 있는가? 물론 이것은 한 개인에서 다른 개인으로,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완전히 전달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실제로 이해하려면 매우 깊은 체험의 샘이 필요하다. 당신은 표면에 서서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것을 알 수 없다.

당신의 신은 큰 공동체의 신이며, 이 물질 우주뿐만 아니라 다른 차원에 있는 우주들의 신이다. 심지어 여기서도 물질로 발현된 이 모든 것은 창조의 한 부분일 뿐이다. 이것을 어떻게 누군가의 이론이나 철학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당연히 천국이 어떤 모습일지 설명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신의 창조 범위를 고려하면, 지극히 유치하고 심지어 우스꽝스럽게 보일 것이다. 그리고 다른 행성에서 온 지각 있는 존재들에게 천국의 상태는 어떤 모습이겠는가? 만약 당신들이 모두 같은 현실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어떤 현실이겠는가? 당신이 우주에 인간이나 인간과 같은 존재들이 거주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인간의 현실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런 현실이 아니다. 그래서 천국의 상태가 인간의 가치관과 인간의 이미지, 인간의 열망에 기반을 두지 않는다면, 어떤 모습이겠는가? 그래서 큰 공동체의 현실에서는 지구의 모든 종교가 자기 입장을 재평가해야 하고, 그 이념을 크게 수정해야 할 것이다.

당신은 훨씬 더 큰 맥락으로 나아가고 있다. 더 큰 맥락에서는 모든 것의 의미가 바뀌고 확장되며, 당신의 이전 생각 중 많은 것이 매우 부적절한 것으로 판명된다. 그렇지만 당신이 신은 알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신을 상상하려고 개념을 만들어 내거나 신에게 이미지를 투사하는 당신의 능력 측면에서만 사실이다. 신의 뜻은 당신 삶에서 알 수 있으며, 그것이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의 의미이다. 신의 창조물 전체는 알 수 없지만, 그 창조물과 당신의 연결은 알 수 있다.

여기서 다시 본질의 의미와 발현된 형태 사이에 차이가 있다.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신을 숭배할 수 있고 그 방식들이 모두 적절하다면, 당신의 길이 신에게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당신이 지구상에서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신이 세상의 큰 종교를 모두 창시했는데, 자기 종교가 신에게 이르는 유일한 참된 길이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종교들보다 더 우월하다고 어떻게 선언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지구 안에서조차,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고 극단적이고 오만하다.

큰 공동체의 신은 깊은 공명이 필요하고, 이 공명은 앎의 수준에서 일어난다. 공명은 이성적 이해와는 다르다. 공명은 친밀감과 관계를 깊이 체험하고, 관련되어 있음을 깊이 체험하는 것에 가깝다. 세상에 있는 누구의 이성도, 심지어 큰 공동체에 있는 누구의 이성도 이 의미를 전부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체험은 가능하며, 체험은 거기 있다.

과학계에 있는 어떤 사람들은 신을 단지 자연 그 자체로만 받아들인다. 그러나 자연은 발현된 형태이지 본질이 아니다. 큰 공동체에서는 삶에 중첩된 두 현실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특정한 설계나 초점 없이 무작위적이고 질서가 없어 보이는 세상의 진화, 생명체의 진화와 같은, 자연으로 발현된 현실이 우주 불가시 세력의 조화로운 힘과 중첩되어 있다. 이 조화로운 힘은 지각 있는 모든 생명체에 있는 깊은 앎을 자극하고 인도한다. 이 힘은 한결같으며, 지적 설계를 지니고 있다. 이 힘은 초점이 맞춰져 있고 목적과 방향이 있다.

중첩된 이 두 현실에서, 어느 한쪽만 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완전하다. 만약 당신이 영의 세계만이 신이라고 말한다면, 물질 우주는 무엇인가? 어떤 종교들은 물질 우주를 단지 환상에 불과한 것, 영속적이지 않고 스쳐 지나가는 것으로 여기며, 당신이 높은 수준의 의식에 도달하기만 하면, 이 물질 현실에 있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여긴다. 마치 물질 현실을, 이 현실의 존재를 믿고 여기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지지하는 거대한 환영과 같은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것조차 완전하지 않다. 왜냐하면 신은 자연의 지질학적 힘과 진화적 힘을 창조하여 저절로 움직이도록 설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물질 현실은 신의 창조물의 일부이다. 변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일시적일 수 있지만, 여전히 신의 창조물의 일부이다. 물질 현실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면, 당신은 반드시 자신을 매우 위태롭고 위험하게 할 것이고, 이 현실에 봉사해야 하는 책임감을 잃을 것이다.

신을 자연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동전의 한 면일 뿐이며, 현실의 한 부분일 뿐이다. 자연은 무작위적으로 보이므로 신을 자연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자연은 특별한 목적이 없어 보인다. 비록 생명체들이 복잡성을 띤 더 큰 형태로 진화하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자연에는 어떤 뚜렷한 목적이 없어 보인다. 자연은 그냥 존재한다. 사람들에게는 목적이 필요하므로, 목적이 없는 신은 사람들과 공감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신과 관계를 맺으려면 신과 공유할 수 있는 목적이 필요하다. 당신은 그냥 존재할 수 있고 신도 그냥 존재할 수 있지만, 관계는 목적을 실연한다. 특히 삶에서 하는 일의 의미와 목적이 정말 중요한, 변하는 세상에 살 때는 더 그렇다.

그러므로 큰 공동체의 신학이 있어야 완전히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큰 공동체 신학은 영적 삶을 거부하지 않으며, 물질적, 즉 세속적인 세상 삶도 거부하지 않는다. 그리고 행성들의 진화나 생명체의 진화를 거부하지 않으며, 물질 영역을 초월한 더 큰 힘과 더 큰 창조물을 거부하지 않는다. 큰 공동체 신학은 이 이원성에서 단일성을 본다.

그림은 완전하다. 왜냐하면 당신 자신에게는 이원성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세상에 사는 물질적 생명체로서 본성이 있다. 이 물질적 생명체는 자연법칙 안에서 살며, 자신이 처한 환경과 환경 조건에 영향을 받고, 의식주와 안전, 동반자가 필요하다는 것에 영향을 받으면서 자연법칙을 어긴 결과에 직면한다.

이 그림은 또한 당신이 영적 존재이고 더 높은 수준에서 일하고 있으며 더 깊은 연결이 있고 궁극적으로는 신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당신은 감각의 한계를 넘어 사물을 보고 알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미래와 과거를 이해할 수 있고, 진화의 과정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더 큰 차원과 더 큰 수준에서 삶을 이해하는 능력이 있다. 그렇지만 당신은 내적 갈등으로 고통받고, 죽음과 변화를 두려워하며, 불안 속에 살고, 당신 내면에 있는 갈등으로 인해 변덕스럽고 파괴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당신은 힘이 있지만, 동시에 매우 취약하다. 실수에 취약하고, 갈등에 취약하며, 큰 해를 초래할 수 있다.

만약 신은 천상의 영역에 사는데, 세상이 있다고 당신이 말하면, 그 둘은 같지 않다. 만약 신이 둘 모두의 조물주라면, 어떻게 이럴 수 있겠는가? 이것은 완전히 모순이다. 만약 신이 세상의 조물주라면, 신은 여기서 일어나는 모든 일, 즉 잘못, 파괴, 잔인함, 전쟁의 근원이다.

큰 공동체에서는 앎길에서 진보한 이들이 이 엄청난 이해의 문제들을 뛰어넘었다. 이들은 영성을 깨닫고 체험하는 데서 진보했으며, 당신 내면에도 존재하고 우주 전역에 걸쳐 존재하는 이 이중 현실에 내재한 조화와 목적을 인식하는 데서 진보했다. 이것은 신의 계획을 나타내며, 이 계획은 당신 사회나 세계보다 더 크고, 당신의 이성적 역량보다 더 크다. 당신이 신의 계획을 알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심지어 인류를 위한 신의 계획이라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하고 어리석다.

여기에는 오만도 없고, 미신도 없으며, 당신의 길이 신에 이르는 궁극적인 것이고 유일한 참된 길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다른 이들을 이기려고 하는 시도도 없다. 큰 공동체 의식이 있는 이는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앎의 회복을 통해 신에게 되돌아가기 위해 수행하는 방식은 무수히 많다. 당신의 길이 유일한 길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지구에서도 유일한 길은 없다. 왜냐하면 신은 다양한 종교를 창시해서 누구나 하나의 길을 가질 수 있게 했고, 다른 이들이 공유한 길을 활용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 수중에 들어간 종교는 다른 것이 된다. 어떤 단체가 되고, 일련의 규칙이 되며, 전래하는 이야기가 되고, 개인숭배가 된다. 이렇게 해서 다른 것이 된다.

걱정하지 말라. 우주 전역에서도 같은 실수를 저지르며, 종종 훨씬 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나 근본적인 조화와 목적이 물질 현실에도 있고 영적 현실에도 있으며, 또 이 두 현실의 고유한 상호 관계에도 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당신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왜 여기에 왔고, 어디로 갈 운명인지와 관련이 있다. 이것은 외모와 환경과 이해의 엄청난 차이에 상관없이 모든 곳에 존재하는 지각 있는 생명체에게 적용되는 진실이다.

말로는 이것을 충분히 표현할 수 없으며, 단지 당신에게 개념만 전할 수 있다.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은 당신의 삶을 새로운 표현으로 이끌 것이다. 만약 당신이 이것을 따를 수 있다면, 또 이것을 따르는 법을 배울 수 있고, 앎이 미지의 것인데다가 종종 환영받지도 못하는 세상으로 앎을 전달하는 데 필요한 지혜를 배울 수 있다면, 이것은 당신이 종교적이든 아니든, 또 교회를 다니든 절을 다니든 아무 데도 안 다니든, 당신 삶에서 일하는 힘과 현존을 당신에게 보여주기 시작할 것이다. 신의 계획은 인간의 창작물에 의존하지 않지만, 인간의 창작물을 통해 대단히 이롭게 일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큰 공동체의 이해를 지구에 가져오며, 많은 잘못을 바로잡고 많은 문을 연다.

큰 공동체의 신은 모든 사람의 개인적 삶을 관리하거나 모든 사람의 개인적 경험을 조정하거나 모든 사람을 위해 기적을 행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신은 끌어당기는 큰 힘이다. 이 큰 힘은 발현된 삶 안에서나 발현된 삶 너머에서 신을 섬기는 이들을 끌어당기고, 이 끌림을 물질 현실에 사는 이들의 인식 속으로 가져오는 이들을 끌어당기며, 이 경험을 받아들여 자기 삶에 정착하도록 허용하는 그런 이들을 돕는 이들을 끌어당긴다.

이것은 심지어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조차 소용없을 정도로 매우 방대하고, 포괄적이고, 매우 복잡한 계획이다. 물질 우주에서 신이 어떻게 일하는지에 대한 개념을 창안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당신이 앎길을 배우고 앎을 따르기 시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많은 사람에게 매력적인 일이지만, 그것은 가치 있는 결과를 낳지 못하고 그저 지어낸 개념과 방대한 이론만 낳을 뿐이다. 현실은 다른 수준, 이성을 초월한 더 깊은 수준에서 일어난다. 당신은 신을 이해하려고 여기에 온 것이 아니라, 당신이 따르도록 신이 당신 내면에 심어 둔 것을 따르고, 당신이 받아들이도록 신이 당신 내면에 심어 놓은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여기에 왔다.

이것이 세상에 제공된 큰 공동체 이해이다. 이것은 직접적이고, 근본적이다. 그리고 엄청나게 복잡하지도 않고, 대단한 소양도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지혜와 정직이 필요하고, 단호한 접근이 필요하다.

큰 공동체의 신은 한 종족에게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계획은 앎을 체험하고 표현할 자유를 얻기 시작할 수 있는 종족들에게서 그 속도가 빨라진다. 이 초점은 앎을 체험하고 표현할 수 있는 개인들에게서 그 속도가 빨라진다.

큰 공동체에는 심판의 날이 없다. 그것은 인간의 불만이 투영된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견딜 수 없는 사람, 그들이 거부하거나 증오하는 사람을 신이 심판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자신이 꺼리거나 강행할 수 없는 벌을 신이 가차없이 행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정의를 원하며, 정의가 무엇인지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고 신이 그들을 위해 이 정의를 실행할 것으로 생각한다.

만약 앎을 발견하지도, 앎을 따르지도 못한다면, 당신은 물질 현실, 즉 본질적으로 그 안에서 생활하기 어려운 현실, 극도로 문제가 많은 현실, 고통이 불가피한 현실에 갇히게 된다. 신은 당신의 불만과 적대감과 무지를 없애지 않는다. 당신은 신이 당신 내면에 심어 둔 것에 응답해야 한다. 그것을 따라야 하고, 존중해야 하며, 그것과 함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표현하라고 당신에게 주는 것을 표현해야 하며,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세상 환경에서 이렇게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창조 신화는 없다.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경험에 마지막 정점은 없다. 그러니 창조 신화도 없고 마지막 정점을 이루는 체험도 없고 심판의 날도 없다면, 종교는 무엇인가? 종교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려면, 종교에는 분명히 더 깊은 기반이 있어야 한다. 종교가 이야기나 위협이 되어서는 안 된다.

큰 공동체에서는 선진국과 진보한 개인들이 이런 많은 부분을 옆으로 제쳐놓는다. 자신이 어느 종교 출신이든, 이용하는 사고 패턴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궁극적으로 그들은 자신이 응답해야 할 깊은 지성이 자기 내면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자기 주변과 심지어 자기 내면에 있는 다른 힘들과 이 깊은 지성을 구분해야 하고, 따라야 하며, 이 깊은 지성이 자신에게 표현하도록 주는 것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영성의 본질이다. 이것이 영적 연습의 본질이다. 이것이 절대적인 핵심이고, 귀중한 것이다.

인류는 상당한 수준으로 이것을 연습할 수 있는 자신감을 아직 키우지 못했지만, 기회는 여전히 있다. 이것은 개인에게 기반을 둔다. 이 앎에 다가가서 앎을 체험하고 분별하고 표현하는 데 필요한 지혜는 인류가 이미 얻었다. 이제는 큰 공동체의 지혜가 인류를 위한 새 메시지의 일부로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이 지혜는 매우 중요하다. 이 지혜가 없으면 당신은 여기에 전해지는 내용을 오해할 것이고, 중대한 잘못을 할 것이며, 자신이 찾는 것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이 깊은 앎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중대한 잘못을 저지를 것이다. 이 지혜는 중요하다. 큰 공동체에서는 인류 문명보다 훨씬 더 오래된 문명에서 많은 지혜가 생겨나서 확립되고 학습되었다. 그래서 큰 공동체 지혜를 세상에 가져오는 것은 엄청나게 가치가 있다.

큰 공동체의 신은 당신 내면에 있는 앎에 응답하고, 당신이 앎을 따르려는 의도와 앎을 체험하는 것에 응답한다. 당신이 파괴적이거나 어리석다면, 큰 기회를 놓칠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여전히 물질 현실에 갇혀 있다. 당신이 달리 어디에 갈 수 있겠는가? 어쩌면 당신 삶은 더 비참해지고 더 지옥이 될지도 모르지만, 당신은 물질 삶에서 휴식을 찾을 수 없다. 머지않아, 당신은 휴식을 원할 것이다.

그래서 육체를 지닌 영생은 지옥 그 자체와 같을 것이다. 지옥은 끔찍한 곳이 아니다. 지옥은 당신이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아름다운 곳이다. 만약 지옥이 끔찍한 곳이라면, 당신은 당장 그곳을 탈출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지옥이 아름다운 곳이라면, 당신은 그곳을 떠나는 것에 양가적일 것이다. 지옥은 당신을 끌어당기고, 유혹한다. 지옥은 당신에게 희망과 격려를 주지만, 당신을 제한한다. 지옥은 당신에게 아픔을 주고, 권리를 빼앗으며, 당신을 실망시킨다. 지옥은 당신이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아름다운 곳이다.

사람들은 이 때문에 자기 근원으로 되돌아가지 못한다. 행복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고,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곳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하고, 분리가 잘 돌아가게 하려고 하고, 분리를 실현하려고 하고, 분리하고자 하는 야망과 열망을 실현하려고 하면서, 자기 근원으로 되돌아가지 못한다.

사람들은 부와 권력을 얻고서도 여전히 불행하고,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고서도 여전히 불행하며, 온갖 즐거움과 혜택을 누리면서도 여전히 불행하다. 당신은 이것을 안다. 이것은 당신 주변 모든 곳에서 분명하지만, 모든 사람은 이렇게 한다고 실제로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여전히 동일한 부와 아름다움과 이점을 강력히 원한다. 이것은 단지 당신이 성취의 근원이나 내적 안내를 찾을 수 없는 일련의 상황 속에 당신을 더욱 가둘 뿐이다.

큰 공동체의 신은 큰 끌림이다. 신은 지구에서나 다른 아주 많은 행성에서 많은 이가 상상하는 것처럼 아버지나 폭군 같은 역할을 하지 않는다. 사람의 내면에는 미묘하고 깊은 어떤 것,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으나 즉시 이용할 수 있는 힘, 현존, 움직임, 동기와 같은 어떤 것이 있다. 큰 공동체에서는 이것을 앎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앎은 보고 아는 능력, 힘을 가지고 온전히 행동하는 능력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종교를 본질적인 요소로 요약하면, 종교는 앎에 관한 것, 앎으로 가는 길에 관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큰 공동체에서 발견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류가 지금 연마해야 하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 힘과 현존이 당신 내면에 있으며, 큰 공동체에 있는 다른 이들 내면에도 있다. 고도 기술사회나 억압된 사회에 사는 대다수는 이 힘과 현존에 거의 도달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이 힘과 현존은 여전히 그들 내면에 있다.

우주에서 해방으로 가는 길은 앎을 공유하는 것이고, 앎을 알아차리는 것이며, 앎을 체험하는 것이고, 앎의 회복과 표현에 틀림없이 뒤따르는 지혜이다. 이것이 우주 모든 곳에서 진행되는 큰 해방으로 가는 길이며, 해방으로 가는 이 길은 자유 국가의 진보한 개인들이 지지하고, 우주의 불가시 힘들이 도우며, 궁극적으로 이 길은 신의 뜻과 힘과 끌림으로 안내받고 초점이 맞춰진다.

당신은 신을 전혀 믿지 않고도, 심지어 신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도 이 해방을 체험할 수 있다. 결국 당신은 신을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앎이 이 알아차림을 자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당신은 신을 믿지 않아도 되고, 앎의 힘과 목적의 현실에 초점을 맞추려고 종교에 소속되지 않아도 된다. 우주에는 종교가 없는 사회가 많으므로 종교가 필수 조건은 될 수 없다. 종교가 정말로 앎에 초점을 맞춘다면, 길을 만드는 데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세계에서는 종교가 국가와 국가 지도부를 숭배하는 데만 이용된다.

이것이 인류에게 주는 의미는 엄청나다. 무엇이 전쟁을 끝낼 것인가? 그것은 당신이 처한 상황에 적응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앎길이다. 무엇이 큰 공동체를 대비해 당신을 준비시킬 것인가? 그것은 지금 변하고 있는 당신 상황에 당신이 적응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앎길이다. 우주에서 무엇이 당신에게 힘과 명확성과 자유에 대한 확신을 줄 것인가? 그것은 인류의 통합과 자급자족과 신중함과 앎이다. 그래서 당신의 초점을 이러한 것들에 맞추는 것은 단순히 관음증적 호기심이 아니라 당신 내면에 있는 절실한 필요성에서 나와야 한다. 왜냐하면 당신이 큰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은 이 가르침들을 읽고 공부한다. 이것은 쓸데없는 호기심이 아니다. 이것은 깊은 연결과 근본적인 필요성을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