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가?


1993년 10월 23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에게
계시되다

이 본문에 관하여


What you are reading in this text is the transcription of the original voice of the Angelic Assembly as it spoke through the Messenger Marshall Vian Summers.

Here, the original communication of God, which exists beyond words, is translated into human language and understanding by the Angelic Assembly who watch over the world. The Assembly then delivers God’s Message through the Messenger, whereafter it is transcribed and made available to you and to all people.

In this remarkable process, the Voice of Revelation is speaking anew. The Word and the Sound are in the world. May you be the recipient of this gift of Revelation and may you be open to receive its unique Message for you and for your life.



독자에게 알림
이 번역은 영어 원문 번역을 자원한 새 메시지 학생이 협회에 제공하였다. 우리는 사람들이 자신의 모국어로 새 메시지 일부와 만날 기회를 갖도록 이 같은 초기 형태로 이 번역물을 세상에 내놓는다.

지금까지 말한 것을 생각해보면, 기존 관념과 제한된 개념에 기반해서는 더 큰 것을 배울 수 없다는 것이 꽤 분명해진다. 기존 마음은 새로운 것을 생각해낼 수 없다. 사실, 큰 공동체 앎길을 배우고, 당신을 세상에 오게 한 더 큰 목적을 찾으려면, 새로운 관념과 더 큰 관점만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큰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 큰 마음은 당신에게 오래됐지만, 동시에 새롭게 보일 것이다.

당신 마음은 당신 참 존재와는 다르며, 그러기에 마음은 궁극적으로 앎의 매개체이다. 이때 마음이 가장 큰 역할을 하고, 가장 큰 봉사를 한다. 마음이 앎의 매개체가 되려면, 맑아야 하고, 새로워질 수 있어야 한다. 마음은 명료하고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어야 하고, 생각을 재고하거나 새롭게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삶의 중요한 모든 문턱에서 더 큰 관점과 지혜를 얻으려면, 마음은 유연하고 열려 있어야 하며, 새로운 경험에 쉽게 다가갈 수 있어야 하고, 새로운 이해의 문턱에 열려 있어야 하며, 자신의 관념을 기꺼이 내려놓아야 한다. 이때 마음을 새롭게 바꿀 수 있어야 한다. 마음이 새로워지려면, 당신은 마음보다 더 큰 기반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앎과 당신의 관계인, 이 큰 기반과 당신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앎이 없다면, 당신은 자신을 자신의 마음과 동일시할 것이고, 마음이 자신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당신은 당신 생각이 자신을 표현하고, 규정하고, 통제하며, 당신의 경험을 결정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믿음은 모든 곳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심지어 자기 삶에서조차 자신의 생각이나 믿음, 강박 충동, 평가에 자신이 얼마나 많이 지배되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앎은 그런 모든 것들 너머에 있다. 당신은 이제 앎에 기반을 둔 새로운 기반이 있다. 이 기반과 함께, 마음은 당신을 지배하기보다는 당신에게 봉사할 수 있는 어떤 것이 될 수 있다. 마음은 큰 봉사의 매개체로서, 훌륭한 소통 수단이 될 수 있다. 즉, 당신이 지금 사는 세상과 당신 고향을 잇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

이것이 당신이 당신 마음과 맺어야 하는 관계이다. 이런 관계가 없다면, 당신 마음은 기존 관념들을 입증하는 방식으로 모든 새로운 경험, 모든 새로운 만남, 모든 새로운 관계를 해석함으로써, 기존 관념들을 계속 강화할 것이다. 이것은 당신에게 엄청난 손실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새로운 경험을 하지 못하고, 앎에 다가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때 당신은 과거에 얽매이고, 항상 과거를 강화하려고 한다. 삶에서 큰 권한이 없다면, 마음은 이렇게 할 것이다. 마음은 굳어질 것이고, 딱딱하게 되어 부서지기 쉬울 것이다. 마음은 완고하고, 들어갈 구멍이 없을 것이며, 현실이나 상황 변화를 전혀 고려하는 일 없이 자기 관점을 방어하는 어떤 것이 될 것이다. 그럼으로써 당신이 위험에 처하고, 감옥에 갇힌다. 그럼으로써 당신이 거부당하고 고립된다. 그럼으로써 당신이 다른 이들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그들에게 배우지 못한다. 그럼으로써 당신의 선물이 거부되고, 당신이 다른 사람의 선물을 받을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 당신은 삶에서 큰 권한이 있다. 당신의 큰 권한은 앎이다. 이 앎은 당신 고향에서 당신과 함께 세상에 온 큰 마음으로, 당신을 안내하고, 보호하며, 이곳에서 당신의 큰 봉사와 사명에 당신을 준비시킨다. 앎에 다가가면, 당신은 마음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일단 당신이 마음에서 충분한 자유를 얻으면, 큰 목적에 봉사하는 데 마음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면 마음이 복원되고 새로워지고, 마음의 가치가 회복되며, 마음의 진정한 능력과 역량이 계발될 수 있다.

내려놓아야 하는 것은 마음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당신 생각 말고 무엇이 삶에서 당신을 분리하는가? 당신 생각 말고 무엇이 당신의 주의를 빼앗아 가는가? 새롭고 더 나은 생각을 하는 것이 새로운 체험의 문을 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바뀌어야 하는 것은 마음과의 관계 그 자체이다. 더 나은 생각이 당신을 해방하지는 않을 것이다. 더 나은 생각이 당신을 자유롭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더 나은 생각이 당신 삶을 열지는 않을 것이다. 생각할 수 있는 새로운 생각이 당신에게 필요하고, 당신이 새로운 체험을 할 수 있도록 새로운 길을 여는 것이 마음에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새로운 생각을 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당신 삶에는 완전히 새로운 기반이 있어야 한다. 당신이 마음 안에 서 있으면, 마음이 당신을 사로잡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당신이 마음 밖에 서 있으면, 당신은 마음을 통해 보고, 마음을 지시하고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이 당신이 이렇게 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실제로 앎은 당신을 위해 이것을 할 것이다. 왜냐하면 앎이 실제로 본연의 당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이 앎과 완전히 결합하고 앎과 동일시하는 체험을 할 수 있기 전까지는, 앎이 삶에서 동떨어진 힘처럼 보일 것이다. 즉, 큰 어려움과 불화의 시기, 그리고 당신이 진심으로 앎의 현존과 안내를 요청하는 특정 시기에만 일어나고 드러나는 힘처럼 보일 것이다. 당신은 지금 앎과 관계를 맺고 있다. 당신은 아직 앎과 완전히 결합되지 않았기에, 관계를 맺고 있다. 관계는 완전한 결합에 이르는 예비 단계이다.

그러므로 앎에 당신 기반을 세우라.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으라. 앎길을 배우라. 앎을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법을 배우라. 그러면 당신은 마음에서 훨씬 더 자유로워지고, 마음에 더 객관적이 될 것이다. 이러한 객관성으로, 당신은 당신에게 도움이 되는 생각과 사고방식, 그리고 당신에게 방해가 되는 생각과 사고방식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더 이상 마음의 종이 아니므로,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고 그 생각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마음은 이제 앎의 종이다. 이것이 마음의 큰 목적이고, 이것이 당신이 마음과 맺어야 하는 올바른 관계이다.

당신은 마음과 동일시하는 것을 내려놓아야 하고, 몸과 동일시하는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당신 마음과 몸은 삶에서 표현의 매개체이다. 이것이 당신 마음과 몸을 보는 바른 방식이다. 따라서 당신은 마음과 몸을 매우 잘 돌보아야 할 것이고, 보호해야 할 것이며, 건강한 상태로 유지해야 할 것이다. 당신이 더 이상 몸과 마음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것들에 자기 정체성을 두지 않을 때, 이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마음과 몸 밖에 서서, 그것들에 지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몸과 마음을 이해하고, 그것들에 필요한 것들, 그것들의 능력과 한계와 유용함을 인지할 것이다. 이것이 당신이 해야 할 것이며, 이것이 큰 공동체 앎길을 공부하면서 얻는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사람들이 큰 공동체 앎길 공부를 시작할 때, 그들은 자기 생각을 강화하기 위해 앎을 이용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앎길은 앎을 강화하기 위해 당신의 생각을 이용하도록 가르친다. 앎은 다른 방향과 다른 목표를 정한다. 즉, 앎은 자유와 복원을 향해 방향을 정하고, 권한과 능력, 자기애를 향해 목표를 정한다.

이 과정에서 많은 것을 내려놓을 것이고, 당신은 과거에서 해방된다. 당신은 자신의 과거 말고 무엇을 배웠는가? 당신의 과거는 당신의 모든 평가와 믿음, 이상, 두려움, 강박 충동, 행동 양식 등, 당신이 배운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당신이 앎과 함께하는 순간순간마다, 과거의 그림자와 생각의 굴레, 과거의 제약에서 조금씩 더 해방된다. 앎과 함께하는 순간마다 당신은 현재로 들어가며,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당신의 과거는 미래의 잣대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과거는 지나갔고, 과거에 대한 당신의 기억과 평가는 과거의 현실을 거의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거의 모든 경우에 당신은 과거를 잘못 해석하여 기존 관념을 강화하는 데 사용한다. 그러므로 과거에 대한 당신의 기억은 사건에 대한 정확한 기억이라기보다는 당신의 평가에 대한 기억이다.

앎과 함께하면, 당신은 과거를 새로운 방식으로, 큰 객관성과 명료함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보고 싶은 과거를 보는 것이 아니라, 실재했던 과거를 볼 것이다. 이때 당신은 다른 방법으로는 가질 수 없는 관점과 평가 도구를 얻을 것이다. 이처럼 내려다보기 좋은 위치에서 보면, 당신은 내면의 앎과 보조를 맞추면서 의미와 목적의식을 가지고 현재에 있는 방식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당신은 단순히 자기 생각에 무릎 꿇지 않고 자신에게 진실해질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과거의 생각에 얽매이거나 그 생각을 대변하는 사람들에게 얽매이지 않고, 삶에서 더 깊은 성향과 움직임을 존중하고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큰 자유이고, 큰 해방이다. 당신은 이것이 필요하다. 미래를 준비하고 큰 공동체 앎길을 배울 어떤 희망이라도 있으려면, 당신은 방해받지 않아야 한다. 신의 첫 번째 목적은 당신의 짐을 벗기는 것이다. 이것은 짐을 내려놓는 과정이다. 과거로부터 해방은 당신이 앎과 함께할 때 일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앎은 당신 과거로 향하지 않기 때문이다. 앎은 당신 삶에서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앎은 단지 당신을 앞으로 이끌고자 할 뿐이다. 당신이 앞으로 나아가도록 인도받고, 길을 찾을 수 있을 때, 과거는 당신에게서 점점 더 멀어져 까마득해질 것이다. 기억과 어려움, 비극과 행복이 모두 희미해질 것이다. 이때 당신은 그 순간에 점점 더 많이 현존하고, 당신 내면에서 더 온전해지며, 다른 사람들에게 더 열린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내려놓아야 하는 것은 당신 마음과의 관계이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당신은 과거에서 충분히 자유로워야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고, 기존에 알던 삶보다 새롭고 큰 삶을 구축할 수 있다. 이렇게 하려면, 당신은 모든 것을 가지고 가서는 안 된다. 당신은 거대한 화물 보관소처럼 모든 기억을 가지고 가서는 안 된다. 당신을 현재와 미래로 데려갈 운반 수단이 이 모든 것을 수용하지는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당신은 당신의 모든 관계, 즉 모든 과거의 사랑, 모든 우정과 가족, 좋아하는 모든 사람과 싫어하는 모든 사람, 당신 마음을 어수선하게 하고 당신을 감정적으로 과거에 붙들어 두는 모든 사람과 그들에 대한 기억 등을 모두 가지고 갈 수는 없다. 앎은 이것을 깨고 당신을 과거 지향에서 빠져나오게 할 것이다. 앎은 당신이 앎에 쓸모 있고, 지금 있는 그대로의 삶에 마음을 열 수 있도록, 당신을 자유롭게 하고, 당신의 짐을 벗길 것이다.

당신이 이 느낌을 맛보기 전까지, 어떻게 이 느낌을 소중히 여길 수 있겠는가? 더 이상 당신 자신을 나타내지 않는 기존 관념이나 기존 관계, 기존 관심사, 기존 활동에 얽매임으로써 점점 자신을 나약해지게 하는 영향들을 되풀이하여 보기 전까지, 어떻게 당신이 이 느낌의 필요성을 알 수 있겠는가? 하늘을 어둡게 하고, 당신을 괴롭히고, 당신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는 큰 그림자처럼, 당신을 뒤덮는 당신 기억의 영향을 당신은 알아야 한다. 당신은 이것들을 놓아줄 수 있으므로 용서할 수 있다. 그것들을 놓아줄 수 없다면, 당신은 그것들을 용서할 수 없다. 놓아주는 것 말고 무엇이 용서인가? 여전히 붙들고 있으면서, 어떻게 놓아줄 수 있겠는가? 어떤 것을 놓아주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이 필요하지 않은 곳, 당신이 그것을 데리고 갈 수 없는 곳, 그것이 관련이 없고 중요하지 않은 곳으로 가는 것이다.

신은 당신에게 삶에서 해야 할 중요한 어떤 것을 줌으로써, 당신을 자유롭게 한다. 그 중요한 것은 당신을 과거에서 벗어나게 하며, 당신이 과거의 고통이나 잣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새 삶을 구축할 수 있게 해주는 어떤 것이다. 이것으로 인해, 당신은 과거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으며, 새롭고 더 큰 삶을 살 수 있다. 또한, 이것이 없었다면, 가는 곳마다 당신을 따라다니며 괴롭히고 제한했을, 그런 실수나 비극, 실망을 용서할 수 있다.

과거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과거를 나타내는 마음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며, 이것은 당신의 현재 생각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당신은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고, 삶에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 사실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바로 이런 뜻이다. 즉, 서판을 깨끗하게 닦는 것, 당신이 어떤 것을 늘 해석해왔던 대로가 아닌,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과거의 두려움과 실망으로 새로운 체험을 못 하도록 조건화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체험에 마음을 여는 것이다. 앎은 당신에게 이런 새로운 시작과 큰 기회를 준다. 이것은 당신에게 최상의 가치를 지닌다.

당신은 큰 공동체 앎길을 배우는 것 또한 필요할 것이다. 이것은 수년 동안 이미 당신 내면에 숨겨져 있던 큰 목적을 당신이 마주하고, 체험하는 데 필요하고, 이 목적과 관계를 맺는 데 필요하다. 당신은 원하는 모든 것과 일어났던 모든 것에 매달린 채, 그 위에 의미 있는 것이 더해지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원할 때, 그들은 보통 과거의 것을 더 원한다. 그들은 새로운 것을 원한다고 말할지도 모르며, 새로운 기회를 원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 그들은 삶에서 과거에 중요시한 오래된 것에 덧붙이고 있다.

당신은 마음을 비워야 하고, 열어야 한다. 당신 마음이 온통 정보로 가득 차 있다면, 당신이 어떻게 받을 수 있겠는가? 마음은 자유로워야 한다. 그것은 마치 당신 집이 지금까지 소유한 모든 것으로 천장까지 짐이 가득 차 있는데, 당신이 아무것도 버리지 않은 것과 같다. 크고 작은 모든 것이 당신의 모든 방과 복도를 가득 채우고 있다. 그리고 당신은 이렇게 말한다. “음, 새로운 것을 집에 들이고 싶지만, 공간이 없네. 집에 새로운 느낌과 분위기를 내고 싶지만 그럴만한 공간이 없어.” 모든 것이 어수선하고, 집은 점점 더 불편해진다. 그 안에서 당신은 감옥을 경험하고, 모든 시간을 이 모든 소유물을 관리하는 데 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마음에 대한 좋은 비유이다. 당신의 모든 시간을 자신의 기존 관념을 섬기는 데 쓰는 것은 지금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 수 없게 한다. 삶은 당신 곁을 스쳐 지나가고 있고, 당신은 그 삶을 놓치고 있다. 삶의 모든 순간은 당신에게 다가가지만, 당신은 삶의 순간들에 다가가지 못한다. 삶은 당신에게 크고 새로운 기회를 주지만, 당신 마음에는 그 기회를 받아들일 여유가 없다.

당신의 기존 관념들을 그냥 모두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중 일부는 여전히 유용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마음에서 자유로워지는 과정은 매우 자연스럽다. 당신이 앎에 접근하게 되면, 앎에 대해 알게 되며, 앎과 함께하는 매 순간, 당신은 무엇을 간직하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당신은 옛집을 비우는 자신을 볼 것이다. 또한, 어떤 것들을 비우고, 여기저기 있는 것들을 치우고, 깨끗하게 청소하여 공간을 만들며, 집 안과 마음 안에서 새롭게 찾은 공간과 자유를 즐기고, 움직일 수 있음을 즐기는 자신을 볼 것이다.

당신 마음은 세상에서 당신이 사는 집과 같다. 당신 마음은 당신이 거기에 놓아둔 것이 무엇이든, 그것들로 가득 차 있다. 그곳에서 당신은 세상을 내다본다. 그곳은 당신의 피난처이자 보호소이며, 당신 영이 주로 머무는 곳이다. 하지만 집이 너무 어수선하고 불편해지면, 앎은 거기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자신이 과거의 유물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은 자신이 마치 오래된 물건들을 관리하는 박물관 관리자인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앎길은 당신을 집 밖으로 나오게 하여 더 큰 이해로 데려간다. 그러면 당신은 그곳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견딜 수 없는 것인지, 또 복원되고 회복되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알 것이다. 그리고 여기저기 있는 물건들을 버리기 시작한다. 다락방을 청소하고, 지하실을 청소하고, 여기저기서 오래되고 잊힌 물건들을 찾아내어 그것들을 없애기 시작한다. 그러고 나면 당신은 집을 완벽하게 개조할 수 있고, 또 완벽하게 개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그 옛집은 당신의 새로운 체험을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개조가 당신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회복 과정의 시작일 것이다. 이때 당신 마음이 복원될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은 새로워지고 생기를 되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점점 더 과거의 영향을 적게 받으므로, 마음은 과거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앎은 또한 당신을 새로운 관계, 즉 당신을 괴롭히고 과거의 경험으로 마음을 채우는 옛 기억을 대체할 새로운 관계와 접촉하도록 데려갈 것이다. 그러면 당신 과거는 당신이 앞으로 나아갈수록 점점 더 무관해질 것이다.

앎길은 마음의 회복과 복원에 관한 것이다. 앎길은 완전한 과정이며, 여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이 과정은 효과가 있고, 자연스럽고, 자연스러운 진행을 따르므로, 시간이 걸린다. 여기서 당신은 자신에게 인위적이거나 기계적인 어떤 것을 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마음이 스스로 새롭게 되는 것을 허용하고, 새로운 생각이 떠오를 수 있게 기존 생각이 사라지도록 놓아두는 것이다. 이것은 당신 마음 안에서 죽고, 썩고, 재생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 일어나게 한다. 그러면 당신 마음은 더 이상 그저 오래된 유물 박물관이 아니라, 모든 것이 끊임없이 자라고 열매를 맺고 그 결실을 주는 밭이 될 것이다. 정원사처럼, 당신은 새로운 믿음과 생각이 떠오를 수 있도록 자신의 기존 믿음과 생각을 갈아엎는다. 그러면 당신 마음은 늘 풍성하게 지혜를 수확하게 되고, 현재와 보조를 맞추며, 새로운 체험과 보조를 맞춘다. 또한, 당신 마음이 과거에 얽매이지 않으므로,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 당신은 이곳에 이해라는 새로운 씨앗을 심을 수 있으며, 토양은 새로워지고 복원되므로 비옥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기존 마음 위에 새로운 인식을 심을 수 없다. 기존 마음은 단순히 이전의 견해를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인식을 이용할 것이다. 이에 대한 예는 손쉽게 볼 수 있다. 사람들이 “음, 나는 이것에 공감하지 않아.” 또는 “나는 그것에 감흥이 일어나지 않아.”라고 말할 때, 그들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것이 자기 과거와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당신 자신도 여러 번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당신이 새로운 것을 볼 때, 또는 당신에게 새로운 생각이 떠오를 때, 당신은 “음, 나는 이것에 공감할 수 있지만, 저것에는 공감이 안 돼.”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당신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나는 저것을 내 과거에 맞출 수 없어.”라는 말이다.

이것은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큰 공동체 앎길은 비전과 지혜를 개발하는 완전히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이 앎길은 인간 사고의 일반적인 범위를 넘어설 것이다. 물론 당신은 이 앎길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앎길은 당신 과거의 일부가 아니다. 큰 공동체에 관해 들으면, 어떤 사람들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라고 말한다. 그것은 그들이 큰 공동체에 대해 배워서는 안 된다는 뜻인가? 큰 공동체가 근거가 없다는 뜻인가? 이것은 그들이 지금까지 보고 느끼고 배운 것을 큰 공동체에 맞출 수 없다는 의미이다. 큰 공동체는 그들이 과거에 배운 것과 관련이 없다. 만약 그들이 과거에 배운 것에 이것을 맞추려 한다면, 그것은 현재가 아니라 과거에 관한 어떤 것이 된다. 어떤 물체를 볼 때, 사람들은 과거의 잣대로만 보며, 그 순간 실제 있는 그대로의 물체를 거의 보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젊은 눈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복원하고 새롭게 하는 삶, 교육적인 삶의 체험들을 그냥 지나친다. 만약 어떤 것이 과거와 맞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것을 보지 못하고 감지하지 못한다. 그러면 마음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때 마음이 감옥이 되고, 이때 마음이 당신의 인식력과 보는 능력을 가로막으며, 이때 마음이 당신을 가두고, 붙잡고, 구속하고, 떼어놓는다.

모든 새로운 관계는 새로운 체험이고, 모든 기존 관계는 새로운 방식으로 체험될 수 있지만, 거기에는 새로운 체험을 위한 공간과 역량이 있어야 한다. 새로운 경험은 과거와 어떠한 관련도 없는 그 자체로 진짜인 어떤 것이다. 당신이 과거를 지향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당신은 이러한 새로운 체험을 더 많이 할 수 있을 것이고, 새로운 체험에서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당신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 필요하다. 또한, 당신이 다른 사람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가능성을 위해 필요하고, 큰 공동체 앎과 지혜를 배울 수 있도록 하는 데 필요하다. 큰 공동체 앎과 지혜는 당신의 과거 이해뿐만 아니라, 당신이 만날 대부분 사람들의 과거 이해를 훨씬 넘어서는 곳으로 당신을 데려갈 것이다. 지금 세상에 매우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준비이다. 왜냐하면 세상이 과거의 불화, 과거의 갈등, 과거의 전쟁, 과거의 슬픔, 과거의 잘못으로 큰 압박과 큰 부담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아주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가끔 누군가가, “나는 새로운 것이 보인다.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알겠어. 이것은 기회야. 이것은 위험해.”라고 일어나서 말하며, 주변 사람들을 일깨우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사람이 말하는 것에 무감각하여, 그것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하며, 공감하지도, 원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본 사람은 대단히 좌절한다. “나는 이것이 보인다. 바로 여기야.”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에 관심이 없다. 과학이나 예술, 종교, 정치, 사회학 등 삶의 어느 영역에서든, 새로운 발견을 했거나 어떤 혁신을 가져온 이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이 내보이는 이런 무반응, 볼 수도 알 수도 없는 그런 상태, 새로운 경험에 대한 저항, 이런 과거의 잣대, 기존 평가의 기준에 직면했다.

어느 분야에서든 혁신가, 공헌자, 개척자 역할을 한 이들은 이런 것을 직면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그들은 양가성이나 무관심, 저항에 부딪혔다. 이것이 인류의 큰 딜레마이고, 인간의 인식에서 큰 장애이다.

그런데 이런 절망적으로 보이는 상황으로, 지구는 큰 공동체에 출현하고 있다. 이 출현은 인간의 경험을 영원히 바꿀 것이며, 한 종족으로서의 인류 과거를 멀고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는 큰 공동체가 없는 과거이고, 미래는 큰 공동체와 함께하는 미래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출현은 인류 스스로 집단의 마음과 믿음, 연합, 가치관, 이상을 새롭게 바꾸는 기회를 가질 만큼, 인류에게 새로운 경험을 집단으로 직면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긴 과정이고, 아직 그 결과에 도달하지 않았다. 사실은, 심지어 지금도 사람들은 세상에 큰 공동체에서 온 이들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그들을 볼 수도, 느낄 수도, 알 수도 없고, 원하지도 않는다. 만약 어느 정도라도 그들을 보거나 느낀다면, 사람들은 자신이 이미 느끼고 믿는 것들을 떠올리고 그와 같은 방식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사람들은 삶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바탕으로 그들을 멋진 것으로 혹은 끔찍한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이러한 모든 제약을 받으면서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이 모든 요건을 가지고 무엇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당신 마음 안에 있는 감옥 창살 사이로 밖을 볼 수 있겠는가? 과거를 뛰어넘어 볼 수 있겠는가? 과거의 잣대를 갖는 것은 자신이 있었던 곳을 보려고 항상 뒤돌아보며 삶을 뒷걸음질로 살아가는 것과 같다. 물론 당신은 무언가에 부딪히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온갖 재앙과 중대한 실수, 어리석은 잘못을 경험한다. 뒷걸음질로 가면, 당신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볼 수 없다. 당신은 항상 자신이 있었던 곳을 알아보려고 하면서, 비틀거리고, 넘어지고, 결국 자신에게 알맞지 않는 곳에 머무르게 된다. 이 이미지를 그려보라. 그러면 그 결과로 생긴 큰 장애를 볼 수 있다. 당신이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자신의 삶과 미래를 바라보며, “이것이 바로 앞으로 일어날 일이야. 여기가 내가 갈 곳이고, 이것이 내가 해야 할 것이야.”라고 어떤 확신을 가지고 아직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라.

뒷걸음질로 걸을 때, 사람들은 “내가 갈 곳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에서 벗어나는 거야.”라고 생각하고, 뒤를 돌아볼 것이다. 그들의 미래 예측은 그들의 과거 지향성에 기초한다. 그들은 현존할 수 없다. 그들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볼 수 없다. 그들의 마음이 그들을 사로잡았다. 그들의 관심은 모두 과거에 기준을 둔 그들 생각에 빼앗겼다.

큰 공동체는 인류에게 한 종족으로서 해방할 큰 기회를 준다. 큰 공동체 영향의 심각성, 큰 공동체가 인류에게 줄 문제와 도전은 당신을 좌절시키거나 구원할 것이다. 이것은 모든 곳에 있는 사람들을 통합시킬 큰 문제이다. 왜냐하면 지금 모든 사람이 같은 처지에 있기 때문이다. 당신들 사이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어디서 태어났는지, 혹은 어느 도시에서 살았는지, 어떤 언어를 쓰는지, 당신의 부모가 어떤 종교에 속했는지가 무슨 차이를 만드는가? 당신들은 모두 지금 더 큰 문제에 직면해 있고, 모두 한 무리이며, 서로가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큰 복원이다. 삶은 지금 매우 큰 방식으로 당신을 과거에서 끌어내고 있다. 현재와 미래는 심지어 세상과 자신에게 무감각한 이들마저도 응답해야 할 정도로 피할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비록 그들의 응답이 과거에 기초한 것일지라도, 그들은 일련의 새로운 환경에 직면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현재와 미래를 보고, “음, 예수님이 구원해 줄 거야,” 또는 “신이 여기에서 구해줄 것이 분명해,” 또는 “이 일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 또는 “항상 이런 일은 있었어. 별거 아니야.”라고 말하지 말라. 사람들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경험하지 않으려고, 또 그들의 더 깊은 느낌과 성향을 대면하지 않으려고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한다.

앎은 당신을 현재로 데려와 미래에 준비시킬 것이다. 앎은 당신을 당신 자신과 세상에 민감하게 할 것이다. 앎은 당신에게 볼 수 있는 눈과 알 수 있는 마음을 줄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 나아가면서, 당신은 자신이 가져갈 수 없는 것, 더 이상 맞지 않는 것,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은 이전 삶의 엄청난 비극과 좌절이 희미해져 가는 것을 깊이 안도하며 볼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되살리거나, 다시 재현하고 싶지 않을 것이고,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것이며, 더 이상 그것들이 당신의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치거나, 당신에게 색안경을 씌우거나, 당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점점 더 당신 마음 밖으로 나갈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마음에 이용당하기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앎은 당신의 마음을 새롭게 할 것이다. 당신의 마음이 새로워진다는 것은 당신의 마음이 생기를 되찾고, 짐을 덜고, 현재와 미래에 열려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길고도 암울한 잠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다. 당신은 삶을 새롭게 볼 것이고, 자신을 새롭게 체험할 것이다. 이것은 당신에게 새로운 날이 될 것이다. 당신은 눈을 떠서 눈앞에 무엇이 있는지, 수평선을 내다보며 무엇이 다가오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얘기한 것 가운데 매우 낯설고 과거의 경험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 것 중 일부가 이제는 훨씬 더 명백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것들을 볼 수 있는 좋은 위치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산을 오르는 것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이미지에 불과하다.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 무엇이고, 현재의 체험과 충돌하는 것이 무엇이며, 현재의 통찰을 부정하거나, 좌절시키거나 대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면, 삶에서 큰 힘을 체험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며, 이 큰 힘이 바로 앎이다. 앎을 당신 안의 자라나는 기준점으로 삼고 앎과 함께한다면, 당신은 마음과 함께 일할 수 있고, 진정한 객관성을 가지고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마음이 당신을 위협하거나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당신은 마음을 삶의 큰 목적에 봉사하는 유용한 도구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더 고요해지고, 더 관찰력을 얻고, 더 인내심을 얻고, 더 관대해지고, 더 용감해질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당신의 마음이 새롭게 변하고 앎과의 관계가 새롭게 바뀌므로 일어날 것이며, 이것이 당신의 새로운 기반이 될 것이다. 앎은 당신에게 앎의 자질과 은총을 줄 것이고, 앎의 힘을 줄 것이며, 새 삶을 줄 것이다.

이것이 당신에게 주는 신의 큰 선물이다. 당신은 과거에 신이 당신을 위해 이것이나 저것을 하지 않았다고 느끼거나 심지어 불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신이 당신에게 준 것은 이전에 당신이 요청한 모든 것보다 훨씬 더 크다. 신은 당신에게 자유를 주었고, 더불어 목적과 방향을 주었다. 이 가능성을 보장하기 위해 앎이 있다. 나머지는 당신에게 달려 있다. 이 새 삶을 선택하라. 새 삶을 준비하고, 새 삶에 자신을 내주라. 새 삶에 전념하라. 그러면 당신은 앞으로 나아가면서 당신 삶에서 불필요한 것을 모두 볼 것이고, 필요한 것을 모두 알 것이다. 점점 더, 당신은 필요한 것을 지키고 싶을 것이고, 필요하지 않은 것은 버리고 싶을 것이다. 당신의 삶은 소중하며, 당신의 시간도 소중하다. 필요한 것은 의미를 주고, 필요하지 않은 것은 의미를 빼앗는다. 그래서 선택은 명백해지고, 당신에게는 선택할 힘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