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문제와 불화 세력

the problem of evil
1989년 1월 1일
미국 뉴욕 올버니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에게
계시되다

이 본문에 관하여


What you are reading in this text is the transcription of the original voice of the Angelic Assembly as it spoke through the Messenger Marshall Vian Summers.

Here, the original communication of God, which exists beyond words, is translated into human language and understanding by the Angelic Assembly who watch over the world. The Assembly then delivers God’s Message through the Messenger, whereafter it is transcribed and made available to you and to all people.

In this remarkable process, the Voice of Revelation is speaking anew. The Word and the Sound are in the world. May you be the recipient of this gift of Revelation and may you be open to receive its unique Message for you and for your life.


Relationships and Higher Purpose
제4편 > 관계와 높은 목적 > 제7장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는 매우 중대한 주제를 이제 논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악의 문제와 불화 세력이다. 이것은 많은 사람에게 어려운 주제이다. 왜냐하면 이것에 관해 두려움과 불안이 상당히 많고, 게다가 왜곡된 관점을 갖거나 부정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불화 세력들이 있다. 이 세력들은 삶의 통합을 반대하고, 삶의 진화를 반대하고, 앎이 하는 일을 반대하고, 앎의 회복을 반대한다. 이 세력들은 지구 안에서도 생겨나고, 지구 밖에서도 생겨난다. 이 세력들은 삶의 통합과 진화를 반대한다는 점에서 악하다. 이 세력들은 분열을 일으키며, 연결되어야 하는 것을 분리하려고 하고, 분리되어야 하는 것을 연결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악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 이 말을 인정하는 것이 기본이다. 이 말을 인정하지 않으면, 당신은 반대 세력들을 매우 과소평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력들은 당신에게 영향을 미치고 당신과 대립하며, 앎과 신을 거스르도록 당신을 자극한다. 당신과 대립하는 것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결코 현명하지 않다. 세상에는 반대 세력들이 존재한다. 반대 세력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실수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불안감을 없애려고 반대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려고 한다. 지금 그들은 물질계의 현실이 신의 현실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실수이며, 물질 삶의 현실을 부정하고 자신의 내적 체험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 부정은 자신을 극도로 속이는 것이다. 이 부정은 두려움에서 나오고, 명백한 것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나온다.

삶에 있는 악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처음에는 억압적으로 보이고 삶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앎을 따르는 사람은 불화 세력들을 이런 식으로 보지 않으며, 단지 삶의 조건의 일부분으로 본다. 그리고 세상은 이 조건 아래에 있다.

당신은 공헌하기 위해 세상에 왔다. 갈등과 반대는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조건에 속한다. 문제를 인식하고 받아들일 수 없다면, 어떻게 해결책을 알아내고 적용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앎을 회복하는 첫 단계 중 하나는 실재하는 문제를 인식하는 법,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법,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는 법,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세력들을 분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실제로, 선한 세력들이 있고, 선을 반대하는 세력들이 있다. 사람들이 이 현실을 객관적으로 다루기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이 현실과 관련하여 두려움과 부정적 상상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과 신의 반대 세력 사이에 전쟁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물질 우주는 단순히 신을 부정한 곳이다. 이 부정이 누적된 결과를 악이라고 할 수 있다. 한 개인이 모든 악을 만들어서 악이 생긴 것이 아니다. 악은 분열과 분리를 바라는 마음에서 생기며, 이 마음은 두려움, 적개심, 죄책감에 기반을 둔다. 이것이 세상에 누적된 결과를 낳는다. 왜냐하면 세상은 물질 환경이자 정신 환경이기 때문이다.

악은 마음의 영역에 존재하며 몸의 영역에서 표현된다. 악은 존재나 신의 영역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악은 몹시 혼란스러운 마음 상태를 나타내며, 세상에서 활동하는 힘으로 인지되어야 한다. 악은 어떤 장소에서 다른 곳보다 더 많이 느껴지는 힘이며, 어떤 이들에게서 다른 이들보다 더 활발히 움직인다. 악은 힘이다. 악에 완전히 지배받는 이들은 그들의 본성이 여전히 신성하기는 하지만, 악의 한 표현이 된다. 그들은 삶에 반대하며, 삶의 진화와 자신의 앎에 반대한다.

이 힘에 자신을 내주고 진심으로 이 힘을 섬기는 이들을 당신이 만나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누구나 어느 정도 이 힘에 영향을 받으며, 누구나 이 힘과 싸워야 한다. 이 힘을 부정하거나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으로는 이 힘과 싸울 수 없다. 이 힘을 단지 문제 많은 자신의 과거에서 생긴 결과로만 생각하거나 오직 자신의 심리적 문제의 영역에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는 이 힘과 싸울 수 없다. 이 힘을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당신에게 힘이 있고 통제할 수 있다는 느낌을 일시적으로는 줄 수 있을지 모르나, 세상에서 이 힘이 미치는 위력과 당신에게 미치는 잠재적 영향력을 과소평가하게 되므로 치명적인 실수이다.

당신은 악을 물질 삶의 한 조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악은 당신이 다루어야 할 어떤 것이다. 당신은 악에서 나온 많은 영향력과 유혹을 인식해야 하고,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다루어야 한다. 이 객관성은 앎에서만 나올 수 있다. 앎은 악의 존재로 위협받지 않으며, 단지 건설적인 방식으로 악을 다루려고 할 뿐이다.

앎은 세상에서 사랑과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그러나 앎 없이 야망으로 이것들을 회복하려 한다면 당신은 큰 위험에 처하게 되고 대단히 실망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당신은 선의로 했어도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재앙을 일으킬 수 있다. 앎이 없는 선의는 재앙으로 이어진다.

앎은 당신의 내적 길잡이고 당신의 등대이다. 앎은 당신이 어디에서 어떻게 전념해야 하는지, 누구와 함께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지혜를 담고 있다. 앎은 악이 있다고 해서 실망하지도 않고 악에 영향을 받지도 않는다. 앎은 당신 내면에 지닌 신성한 영향력의 힘이다. 앎이 신성한 영향력의 힘인 이유는 세상에 있는 다른 어떤 영향력보다도 더 크기 때문이다. 앎은 당신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래서 앎은 당신에게 가장 큰 선물이고 성취의 근원이다.

불화 세력은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된다. 이 표현의 형태는 구체적이고 다양하지만, 모두 신과 대립하고 삶의 통합을 반대하고 싶은 욕구에서 나온다. 신이 불화 세력에게 화를 낸다고 생각하지 말라. 신은 화를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신이 불화 세력이나 그 세력의 지지자들을 벌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 지지자들은 신과 분리됨으로써 이미 스스로 벌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신을 부정하는 곳 말고 무엇이 지옥인가? 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곳 말고 무엇이 지옥인가? 지옥에 산다는 것은 관계를 맺지 않고 산다는 것이며, 신은 모든 관계의 총합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은 어느 정도는 지옥에 살고, 그들이 관계를 맺지 않은 만큼 지옥에 산다. 관계를 맺지 않으면, 당신은 부정적인 상상만 할 뿐이고, 그 부정적인 상상은 당신을 괴롭히고 당신이 불화 세력을 따르도록 이끌 것이다.

앎이 당신 내면에서 회복될 때, 당신은 내면에 있는 조화의 힘을 인지할 수 있고, 그 힘을 확언하고 지지하며 더욱더 많은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힘에서 불화 세력들에 영향을 받지 않는 능력이 점점 더 커진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당신이 불화 세력들을 객관적으로 인식해야 하며, 그 세력들을 부정하지도, 자신에게 그 세력들을 통제할 힘이 있는 듯한 잘못된 느낌을 가지려고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도 말아야 한다.

악은 단순히 자기 내면에 있는 것으로 교정할 수 있다고 어떤 사람들은 믿는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앎과 함께하면, 당신은 불화 세력을 따르려는 자신의 성향을 고칠 수는 있지만, 불화 자체를 교정할 수는 없다. 앎과 함께하면, 당신은 세상에 있는 앎의 방향으로, 또 세상이 진화하는 쪽으로 공헌한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당신 혼자만의 일이 아니다. 세상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선물을 내줄 때 바뀔 것이다. 당신이 자신의 선물을 내주면, 다른 사람들도 그들의 선물을 내주도록 영향을 받을 것이다. 중요하지만 작은 역할이 당신에게 있다. 당신의 역할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역할을 하도록 하기 위해 필요하다. 앎의 학생이 되라고 부름을 받는 당신은 당신의 역할을 하도록 부름을 받는다. 당신이 자기 역할을 하는 것은 당신 내면과 세상에 있는 앎의 궁극적인 표현이다.

악은 이 세계 너머에서 발원한다. 이것은 당신이 다세계 큰 공동체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분명하다. 그렇지만 사람들 대부분은 이것을 알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세계가 유일하게 존재하는 곳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직 신과 이 세계, 또는 하늘과 지구만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극도로 제한된 맥락에서 생각하는 것이고, 그 결과 무엇이 불화 세력이고 이 세력들이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한 이해는 지극히 제한될 것이다.

불화 세력은 물질 우주의 창조를 촉발한 분리에서 비롯했다. 이것을 논하는 것은 이 책의 목적이 아니거니와, 당신이 그 개념을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다. 분리의 기원은 분리 자체가 끝날 때만 파악될 수 있다. 그제야 분리의 목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분리의 목적을 추측하는 것은 도움이 안 된다. 그러나 당신이 자기 내면에 있는 앎을 고수하는 법을 배우고, 반대 세력이 있는 지구라는 제한된 맥락에서 앎의 선물을 공헌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중요하다.

불화 세력을 섬기는 데 전념하는 이들은 지구뿐만 아니라 큰 공동체에도 존재한다. 그들 신념의 강도와 그들 역량의 크기에 따라 그들 영향력의 범위가 결정된다. 어떤 경우에는 지구 너머에 있는 불화 세력이 지구에 있는 불화 세력에게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지구 너머에 있는 세력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이 주제를 다룰 때, 두려움이나 불확실성, 부정이 당신 내면에서 일어날 수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전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그것을 어떻게 상대할지 결정하는 것은 당신에게 달려 있다. 그러나 존재하는 것은, 그것에 어떻게 대응하기로 당신이 결정하든 상관없이 존재한다. 앎을 따르는 사람은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기보다는 존재하는 것을 상대하기로 선택한다. 그들은 자결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렇게 선택한다.

세상에서 활동하는 큰 공동체 세력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이 인제야 이것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큰 공동체 관점을 갖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수이다. 큰 공동체 관점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더 큰 관점에서 보는 능력이다.

모든 지적 생명체는 앎의 현실과 불화 세력 사이의 대립에 둘러싸인다. 이 물질 현실의 수준에는 이원성이 있다.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삶을 경험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당신은 앎으로 새 삶을 경험하겠지만, 물질 현실을 부정하는 것으로는 앎이 출현하지 않는다. 물질 현실은 마음이 겪는 근본적 갈등의 표현이다. 이 갈등은 정신 환경과 물질 환경, 모두에서 표현된다. 당신의 생각은 당신의 행동으로 이어진다. 만약 당신 마음이 혼란스럽다면, 이 혼란은 당신이 세상에서 하는 행동을 통해 표현될 것이다.

자연이 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그것은 옳지 않다. 자연은 그저 돌아가는 현실일 뿐이고 참여하는 사람들이 계속 참여하는 한 계속 돌아갈 것이다. 당신이 신과 함께 있을 수 있는데 왜 세상에 있는가? 왜냐하면 당신은 내면에 있는 앎을 회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앎을 바라는 열망과 앎에 대한 거부가 모두 존재하는 곳이다. 앎을 거부하는 것은 악과 불화 세력을 낳고 또 낳는 것이다. 분리를 소중히 여기므로 앎을 거부한다. 앎을 거부하는 것은 삶에서 분리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 분리는 생존이라는 이름으로 종종 정당화되지만, 이것은 잘못이다. 앎 안에서는 당신이 이미 생존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항상 생존할 것이기 때문이다.

앎을 따르는 것을 반대하는 주장이 많다. 분리를 정당화하는 것이 많다. 당신이 가장 깊이 아는 것에서 당신이 단절되는 일을 옹호하는 믿음과 추측이 많다.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대부분 직간접적으로 앎에서 이렇게 분리되는 것을 옹호한다. 이것은 큰 공동체에 있는 다른 세계들에서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인류가 나쁘거나 사악한 종족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인류는 큰 공동체의 다른 모든 종족과 마찬가지로 단지 정신적·물질적 성장과 진화의 특정 단계에 있는 한 종족일 뿐이다.

불화 세력들을 상대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이들은 지구에서 꽤 활동적이고 이곳의 모든 사람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당신이 처음에 할 수 있는 일이 몇 가지 있다. 먼저, 이 세력들을 분별하는 법을 배울 때, 또 이들이 우세한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 당신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당신은 이들을 감정적으로 상대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들을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끌어안지도 말라. 이들에게서 도망치지도 말라.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이 객관적이니 당신도 객관적이 될 수 있다. 이 세력들을 찾아내려 하지도 말고, 온갖 수단을 써서 피하려 하지도 말라. 앎은 당신이 긍정적인 방식으로 어떤 것을 공헌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니면 당신을 이들에게서 떼어놓을 것이다.

그다음으로, 악을 개념화하거나 악을 한 존재나 한 개체 탓으로만 돌리려고 하지 말라. 그렇게 하면, 당신은 대부분의 경우처럼 악을 실제보다 더 무서운 것으로 만들든가, 아니면 자신감을 가지려고 악이 당신 가까이에 있을 때 악을 축소하거나 제한하려고 할 것이다. 불화 세력들은 개인적으로 당신과 견주면 당신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왜 더 강력한가? 왜냐하면 매우 많은 이가 이들을 지지하기 때문이다. 오직 앎과 함께할 때만, 당신은 당신 내면에 있는 불화 세력들을 이겨낼 수 있고, 주변 세상에 있는 불화 세력들을 상쇄할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앎과 함께하지 않으면, 불화 세력들은 당신을 압도할 수 있다. 앎에는 다른 마음에 있는 앎에 영향을 주는 힘이 있다. 마음에 앎이 배어 있지 않다면, 한 마음이 그렇게 많은 마음에 대항해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악에 맞서 전쟁을 벌이는 것은 소용이 없다. 악에 맞서 전쟁을 벌이는 것은 악을 과소평가하고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이것은 패배와 완전한 낙담으로 이어질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앎과 함께하면 당신은 어려운 상황에서 긍정적인 것을 공헌할 수 있다.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은 다른 모든 이들 안에 있는 앎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비록 일시적으로 불화 세력들에게 마음을 내주어도 당신은 그들의 앎을 자극한다. 삶에서 당신이 어떤 형태로 공헌하든 상관없이, 이처럼 앎을 자극하는 것이 공헌이 지닌 가치의 본질이다.

세상은 매 순간 이 반대 세력들의 상태와 이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표현한다. 이것은 상반되는 둘 사이의 균형과 같다. 당신의 역할은 이 균형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꾸는 것이다. 당신이 이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으면, 당신은 자신도 모르게 불화 세력의 공범자가 되거나 실제 지지자가 될 것이다. 어느 쪽이든, 당신은 개인적으로 삶에서 중립적 입장을 취할 수 없다. 유일하게 진정으로 유익한 입장은 앎과 함께 있는 것이다. 앎은 악에 영향을 받지 않고, 선에 공헌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앎이 없다면 당신에게 삶은 전쟁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삶은 전쟁이 아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여기서 말한 것을 당신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여기서 말한 모든 것은 완전히 명백하지만, 당신이 이런 관점으로 보지 못하면 이것을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아직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볼 수도 알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을 볼 수 있을 만큼 높은 전망점에 도달하면, 당신은 신의 위대함과 선함을 전달할 수 있으며, 갈등이 있는 환경에서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사람들 내면에 있는 앎을 자극하고 무엇이 사람들 내면에 있는 앎을 반대하는지, 무엇이 의미 있는 관계를 낳고, 무엇이 의미 있는 관계를 해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전에도 말했듯이, 앎은 특정 방식으로 특정인들과 관계를 맺도록 당신을 이끌 것이다. 불화 세력들은 다른 방식으로 특정 사람들과 관계를 맺도록 당신을 부추길 것이다. 그렇지만 결과는 완전히 다르다. 앎은 세상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도록 장려하고 심지어 요구도 할 것이다. 불화 세력들은 세상을 다르게 이해하도록 요구할 것이다. 앎은 모든 건설적인 사고와 행동을 낳는다. 불화 세력들은 다른 종류의 사고와 행동을 낳는다. 진실은 물론 진실을 대신하는 것들도 모두 정신 환경과 물질 환경에서 움직임을 낳는다. 당신은 이 두 영역에서 앎과 불화 세력 둘 다 다루어야 한다.

불화 세력들은 상당히 강력하다. 혼자서 그들과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그런 야망을 갖지 말라. 스스로 자기 능력을 거창하게 여기고 내면의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앎과 함께하지 않으면, 당신의 능력은 불화 세력들 앞에서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이다.

여기서 무엇이 세상의 힘을 낳는지를 배울 필요가 있다. 세상에서는 힘이 마음을 집중한 결과이다. 다시 말해, 더 집중한 마음은 더 강력할 것이고, 덜 집중하여 덜 강력한 마음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집중력은 여기서 초점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마음이 집중할수록 마음은 초점을 더 맞춘다. 마음이 초점을 맞출수록 마음은 더 잘 통제된다. 마음이 잘 통제될수록 마음의 영향력은 더욱 강력할 것이다. 당신이 정신 환경에서 살고 있으므로, 이곳은 정신적 영향력이 작용하는 세상이다. 여기서 당신이 자신의 마음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으면, 다른 마음이 당신 마음에 쉽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당신은 대부분의 마음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쉽게 끌려갈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는 대중의 의식과 관계없이 생각할 수 있는 자유이다. 진정한 자유는 앎에서 나온다. 여기서 당신은 전쟁에 휘말리지 않을 것이고, 그 대신에 유익한 것에 공헌하는 관찰자가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당신은 세상에서 진정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이가 될 것이다.

당신 마음이 집중할수록 삶에 미치는 영향력은 더 커진다. 당신의 의도가 잘 통제될수록,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더 커진다. 그렇지만 만약 당신의 집중력이 약하고 당신의 초점이 약하고 당신의 결단력이 약하면, 불화 세력들에게 충성하는 데 더 집중하는 이들이 당신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것이 정신세계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수준에서 작용하는 힘이다. 물질세계에서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순전히 힘으로 압도할 수 있다. 정신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마음이, 힘이 더 약하고 집중력이 더 약한 다른 마음들을 압도한다.

앎은 정신 환경과 물질 환경 양쪽에서 모두 봉사한다. 앎은 당신이 집중할 수 있게 하고, 의미 있는 목적과 강력한 표현에 초점을 둘 수 있게 한다. 앎은 필요한 정신적 자율권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앎 자체의 힘도 제공한다. 그러면 이제 당신은 신과 함께 생각하게 된다. 당신은 우주와 함께 생각하게 되며, 한 개인으로서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의 개체성은 이제 큰 현실을 표현하므로 의미가 있다. 이 높은 목적이 없다면, 당신의 개체성은 단지 생존 체계일 뿐이고 본질적으로 두려워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당신의 개체성은 불화 세력들에 영향을 받고 종속될 것이며, 이 세력들이 끌어들이는 주된 힘은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떼어 놓고, 사랑은 잇는다. 두 힘 모두 특정인들과 구체적인 관계를 맺도록 이끌지만, 목적이 다르며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낳는다. 불화 세력을 섬기는 이들은 이 목적으로 관계를 맺고 다른 이들과 결속한다. 이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현실에서든 상상에서든 관계를 맺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당신을 도울 다른 이들을 찾아야 한다.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혼자서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앎의 현실도 불화 세력의 현실도 관계를 통해 표현한다. 그래서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관계는 세상에서의 공헌과 파괴, 이 둘을 모두 표현하는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불화 세력을 어떻게 다루는가? 대체로 답은 매우 간단하지만, 많은 적용이 필요하고 성장과정에서 많은 단계를 밟는 것이 필요하다. 답은 근본적으로 앎의 학생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앎은 당신 내면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원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앎이 없다면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하고 갈등을 겪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상황에서 앎은 건설적으로 당신을 인도하는 안내의 근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앎은 복잡한 것에 단순함을 가져오고, 불화에 화합을 가져오며, 분열에 통합을 가져온다. 앎은 당신이 몸과 마음 양쪽에서 모두 강해질 수 있도록 당신 마음을 집중시키고 당신 몸을 튼튼하게 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강해야 하기 때문이다.

악이 어디에 존재하는지 알아차리는 법을 배우고, 악을 부정하거나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 당신이 통제하고 지배할 수 있다고 느끼는 어떤 것으로 악을 축소하려고 하지 말라. 그렇다고 악 앞에서 당신이 약하고 무력하다고 생각하지도 말라. 앎과 함께하면 당신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악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은 앎의 학생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필수이다. 이러한 큰 관점을 갖는다면 당신은 문제뿐만 아니라 해결책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악과 싸우지 말라. 왜냐하면 당신이 그렇게 하면 악은 당신을 유혹할 것이기 때문이다. 야망이 있을 때만 당신은 악과 싸우려고 할 것이고, 악은 언제나 승리할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악의 지지자들은 한때 악에 대항하여 싸우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현재 악을 지지하고 대변하는 이들 중 많은 이가 한때 악에 대항했다. 그러므로 앎을 따르는 사람들은 갈등을 일으키지 않으며, 단지 삶에서 해결책을 지지하고 조성하기 위해 갈등과 함께 일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방법을 찾을 뿐이다.

불화 세력들의 힘이나 설득력을 과소평가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들도 신과 사랑을 말하고, 그리스도와 무함마드와 부처에 대해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주안점과 목적을 가지고 말한다. 그들 또한 모든 선한 것을 이용하지만, 다른 목적으로 이용한다. 그래서 앎을 따르는 사람들은 시간을 두고 큰 분별력과 이해력을 키워야 한다. 당신은 그저 단순한 관점으로 사물을 보아서는 안 된다. 당신은 무엇이 진실인지 알려면 더 큰 관점을 가져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단지 안전하게 있으려고 세상에서 파괴적인 것을 공격하거나 폄하하거나 회피할 것이다.

당신 내면에 있는 불화 세력들의 영향력을 알아차리라. 앎의 학생이 되면, 당신은 점점 더 명료하게 이 영향력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자신의 내면에서 앎을 추구하는 것과 앎을 반대하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당신은 당신 내면이나 주변 세상에서 무엇이 이 대립을 만드는지 보는 법을 배울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불화 세력에 대해, 또 불화 세력들이 당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방식에 대해 직접적인 통찰과 객관적인 관점을 얻을 것이다. 당신은 자신의 정치적·사회적 사상, 신과 세상에 대한 당신의 견해, 자신에 대한 당신의 평가가 어떻게 이 불화 세력들의 영향을 받는지 알 것이다. 여기서 겉으로는 이로운 것처럼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이 세력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당신이 취하는 입장은 당신이 어떤 목적으로 그 입장을 취했고 그 목적 뒤에 숨은 동기가 무엇인지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된다. 앎과 함께하면, 당신은 이것을 알 수 있을 것이고, 앎과 함께하지 않으면, 알아보기가 훨씬 더 어려울 것이다.

앎과 함께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들의 현실과 정체성의 기반을 자신의 신념에 두고 세상에서 자신이 속한 단체에 둔다. 이 신념과 단체가 유익하지 않더라도 그들은 이것들을 옹호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그 결과가 해롭더라도 사람들은 자신의 신념과 단체를 옹호할 것이다. 이것은 객관적으로 보고 행동하는 것을 점점 더 어렵게 한다. 그래서 앎이 당신의 구원이다. 앎과 함께하지 않으면, 당신의 선의에도 불구하고 머지않아 당신은 분명히 불화 세력의 희생양이 될 것이다.

어느 누구도 완전히 불화 세력의 희생양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불화 세력은 신의 뜻을 대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생애만 한정하면, 한 사람의 삶은 이 불화 세력에 완전히 지배될 수 있다. 그리고 사실, 많은 사람의 삶이 완전히 지배된다. 심지어 이들은 세상을 떠날 때도 자기기만 상태에 있을 것이고 이 상태로 다시 세상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래도 앎은 여전히 그들이 가는 곳마다 함께 간다. 왜냐하면 당신 마음과 삶이 완전히 앎에 대한 반대를 표현해도 당신은 실제로 앎에서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앎은 당신이 어디를 가든 당신과 함께 간다. 그러므로 앎이 인지되고 받아들여지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다. 앎은 변함없고 영구적이다. 비록 삶에서 불화 세력들이 지속적으로 재생되고 있지만, 불변하는 것이거나 영구적인 것은 아니다. 결국 그들은 앎의 힘과 현존에 항복하겠지만, 이것은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이 시간이 덜 걸릴수록 사람들의 고통도 줄어들 것이다. 이 시간이 덜 걸릴수록 세상에서 앎이 더 많이 표현될 것이다.

이제 앎의 초보 학생이 되는 것을 배우는 당신은 당신 내면에 있는 불화 세력들을 인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어떤 경우에는 이 세력들이 자신들을 표현하는 곳이 명백하고, 어떤 경우에는 분명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앎길을 배우고 시행착오를 겪고 다른 이들과 건설적으로 결합하는 것을 통해서만, 당신은 당신 내면에 있는 불화 세력들을 분별하는 법과 건설적으로 다루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시간이 걸리고 많은 단계를 따라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앎과 연결이 더 깊어지는 일은 당신의 안녕에 필수이고, 당신이 세상에 가져온 선물 보호에도 필수이다.

세상은 앎을 바라는 열망과 앎에 대한 반대가 공존하는 곳이다. 여기서 앎에 대한 거부가 지배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사실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믿는 것은 앎의 힘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세상 그 자체는 일시적인 곳이며, 세상에서의 당신 삶 또한 일시적이라는 것을 명심하라. 이 세계가 존재하는 것에 비추어 볼 때, 당신은 여기에 아주 잠깐 머문다. 만약 앎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당신에게 저승의 삶이 없을 것이고, 당신은 빠르게 자신을 태워 버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양초와 같을 것이다. 앎을 확언하는 것은 저승의 삶을 확언하는 것이다. 이것은 당신의 영적 가족, 당신 내면의 교사들과 당신의 관계, 앎의 현존 자체를 확언하는 것이다. 세상에서의 짧은 삶이 영원한 삶에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삶이 그 자체를 의식하지 못하도록 일시적으로 가로막는 것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세상에서의 당신 삶은 지금 여기에서 당신 삶이며, 당신은 이 삶에 자신을 바쳐야 한다. 그렇지만 당신이 자신의 영원한 삶을 더 많이 알수록, 당신은 자신을 통해 세상에서 영원한 삶이 표현되도록 더 많이 허용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자신에게 있는 진정한 힘의 본질을 이해할 것이다. 그러면 앎에 대한 반대가 자신을 벌하는 그런 한심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