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의 기둥


1994년 10월 12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신의 메신저, 마샬 비안 서머즈에게
계시되다

이 본문에 관하여


What you are reading in this text is the transcription of the original voice of the Angelic Assembly as it spoke through the Messenger Marshall Vian Summers.

Here, the original communication of God, which exists beyond words, is translated into human language and understanding by the Angelic Assembly who watch over the world. The Assembly then delivers God’s Message through the Messenger, whereafter it is transcribed and made available to you and to all people.

In this remarkable process, the Voice of Revelation is speaking anew. The Word and the Sound are in the world. May you be the recipient of this gift of Revelation and may you be open to receive its unique Message for you and for your life.


You need sufficient health - not perfect health
제3편 > 앎길을 따르는 삶 > 제4장

세상에는 건강을 회복하고 증진하며 유지하는 일에 다양한 이론들이 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먼저, 좀 더 근원적인 질문부터 해보자. 무엇이 건강인가? 어떤 상태일 때 진짜 건강하다고 할 수 있는가? 단순히 병이나 장애가 없으면 건강하다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관점을 바꾸어서 운동선수와 같은 능력이 있거나, 특정 기준에 맞는 체력을 갖추어야 건강한 것인가?

앎길을 배우고 실천하기 위해 기반을 다지려 하는 사람에게 건강은 활력이다. 목적과 의미와 방향이 확실한 삶, 세상이나 다른 사람들과 의미 있게 결합하는 삶, 이런 참된 삶을 살아가는 데서 나오는 활력이 바로 건강이다. 이런 삶을 살 때, 살려는 의지, 공헌하려는 열망, 삶에 대한 열정 등이 솟아난다.

다른 기준에서 보면 건강한 사람, 심지어 매우 건장한 몸을 가졌고 심각한 질병을 전혀 앓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런 활력이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반대로 육체적으로 장애가 있거나 큰 병을 앓아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 활력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보면 이 또한 놀라운 일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무엇이 건강인지, 무엇이 건강을 낳는지 그 본질을 보아야 한다. 그러면 무엇이 건강을 해치는지, 어떻게 하면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지 더욱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건강은 활력이다. 활력은 살려는 의지, 공헌하려는 열망이다. 활력이 있으면, 삶에 신이 나고 목적의식이 생긴다. 또한 삶과 자연스럽게 생기는 친밀감을 주위 모든 사람에게 전해준다. 이 활력은 몸이 적절하게 기능할 때 느낄 기회가 훨씬 더 많아지겠지만, 몸이 약한 사람도 느낄 수 있다. 심지어 신체적으로 심각한 한계나 장애가 있는 사람이라도 건강의 정수라고 말할 수 있는 이 활력을 느낄 수 있다.

그 다음 물어보아야 할 것은 얼마나 건강해야 되느냐이다. 이 점에 대해 세상에는 참으로 견해가 다양하다. ‘병만 없으면 돼’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아니야, 훨씬 더 활동적이고 활기차고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어야 건강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건강에 대한 기대치가 대단히 높아 심지어 건강한 사람들까지도 건강에 상당히 집착하고 있다. 사람들은 물질계 삶을 아무런 고통이나 통증, 문제가 없이 살기를 바라고 기대한다. 심지어 아프거나 병든 것을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마치 모든 사람이 항상 완벽하게 건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부정적으로 상상하거나 다른 사람들과 부적절하게 관계를 맺으면, 활력을 잃어 건강을 해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부상당하거나 병에 걸리는 일을 본질적으로 결함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질병이나 부상은 물질계를 살아가면서 겪어야 하는 위험 요소이므로 누구나 이런 일을 겪을 수 있다.

사람들은 건강을 매우 이상적으로 바라보므로 이 말에 이견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삶을 질서 있고 의미 있게 살아간다면 아무런 질병이나 부상이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희망찬 기대이기는 하지만,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현자 중에서도 현자라 하더라도 부상당할 수 있고, 병들고 늙는다. 물론 당신은 질병이나 부상의 가능성을 크게 줄일 수도 있고, 건강한 삶을 살도록 의미 있는 조치를 취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 앞서 당신은 얼마나 건강해야 하는지 스스로 그 개념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아주 중요한 문제이니 지금부터 이 점을 다루어 보자.

간단히 말해서, 당신이 삶에서 목적을 충분히 수행해낼 수 있다면, 당신 몸은 건강하다. 그러나 당신은 아직 자신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니 다른 기준이 필요할 것이다. 당신 몸이 앎을 위해 기반을 다져 삶의 큰 도약인 두 번째 단계로 들어갈 수 있을 만큼 건강하다면, 당신 건강은 충분할 것이다.

이때 말하는 건강이란 아름다움이나 운동선수들의 기량, 그 밖의 다른 이상적인 개념과는 무관하다. 몸은 봉사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하면 충분하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면, 당신은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접고 몸 돌보는 일을 가장 우선시해야 한다. 몸은 마치 자동차처럼 당신을 나르는 매개체다. 자동차는 당신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는 데 그 일을 해낼 수 있으면 그 목적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계적으로 문제가 있어 그럴 수 없다면, 정비소에 가야 할 것이다.

당신이 세상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몸이 작동된다면, 당신 건강은 충분하다. 건강의 기둥을 다룰 때 당신은 매우 현실적으로 바라보아야 하므로 우리가 처음부터 이 점을 분명하게 명시한다. 필요 이상으로 건강을 기대하면, 이 기둥에 집착하여 다른 기둥을 희생할 수 있다. 이미 말했듯이 네 기둥이 모두 적절히 유지되어야 한다. 물론 어떤 시기에는 어느 한 기둥에 관심을 집중해야 하는 때가 있지만, 네 기둥은 모두 적절히 유지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육체 건강에 많이 집착하고 있다. 때로는 자신의 몸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런 집착을 타당하게 여기지만, 그래도 우리는 아까 말한, 건강에 대한 기본 정의를 고수해야 한다. 즉, 몸은 당신이 삶의 큰 목적을 수행하는 데 매개체로써 봉사해야 한다.

자신의 목적을 수행할 만큼 건강하면서도 여전히 건강에 집착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자신의 높은 기대치에 건강을 맞추려고 자신의 목적을 소홀히 한다. 여기서 우리는 바라는 것과 필요한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런 구분은 아주 중요한 것으로 삶의 모든 분야에 적용되어야 한다. 마치 자동차가 당신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데려다주면 그 일을 다 하듯 당신 몸도 필요한 일을 하면, 그 목적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몸이 완벽해야 할 필요는 없다. 당신이 몸을 완벽하게 만들려 한다면, 몸에 지나치게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때 당신은 삶의 다른 부분을 희생해서 몸에 관심을 쏟을 것이다.

삶에는 네 기둥이 있으며, 이 기둥들이 모두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라. 기둥 하나하나가 모두 튼튼해야 하고 제 몫을 다해야 한다. 당신은 현실에 맞게 기대해야 한다. 너무 기대치를 높게 잡으면, 당신은 한 기둥에 너무 많은 것을 바쳐 다른 기둥들을 소홀히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하는 건강은 필요한 만큼의 건강을 말한다. 이것은 당신이 기대하고 바라는 것과는 차이가 날 수 있다.

그래서 당신은 “나는 어느 만큼 건강해야 하는가?”라고 자문해 보아야 한다. 이 물음에 대답하기 전에, 당신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건강에 쓸 수 있는지, 또 미용이나 몸단장을 포함해서 건강과 관련된 것으로 믿는 활동들에 쓸 수 있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심지어 병약자마저도 앎으로 빛을 발할 수 있다. 이것이 활력이다.

그러므로 당신에게 적절한 건강이 어느 정도인지 자문해보아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당신에게 경고하고 길잡이 역할을 하여 바른길로 가도록 가리켜줄 뿐이다. 당신이 앎길을 따르며 앎의 학생이 되는 기반으로 삶의 네 기둥을 다지려 한다면, 어느 하나에만 지나치게 투자할 수 없음을 알 것이다. 균형을 맞추며 살아가는 사람이 세상에 매우 드물지만, 당신은 그 균형을 찾아야 한다.

몸은 필요한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필요한 일이 무엇이냐는 당신 목적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목적이 당신에게 드러나 당신이 그 목적을 알아보고 수행할 만큼 준비되면 무엇이 필요한 일인지 알 것이다. 이때 다른 사람보다 몸이 더 튼튼해야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의식주가 어느 정도 해결되어 안정된 사람들은 대다수가 현재 건강 수준에서 앎의 학생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필요한 것과 바라는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높은 산을 한걸음에 달릴 수 있거나 육상 경기에서 대단한 기록을 내는 일은 운동선수에게는 괜찮은 일이지만, 건강을 적절히 회복하여 유지하는 데는 불필요하다. 사실, 이런 활동은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하므로 오히려 당신이 앎을 위해 기반 다지는 데 방해될 수 있다.

몸에 관심이 부족한 경우도 종종 있지만, 건강이라는 명목으로 너무 많은 것을 여기에 바치는 경우가 더 많다. 사람들은 건강과 치유에 집착해 있고, 기분 좋게 느껴지고 멋지게 보이는 일에 매달려 있지만, 그 대가로 무엇을 지불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앎길을 배워 그에 맞게 살고 싶지만, 지금은 내 건강 문제를 보살펴야 한다.”라고 말하는데, 이들은 자신의 건강 문제만을 한없이 안고 살아갈 것이다. 그들은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우선순위에 문제가 있다. 병이 위독하여 목숨이 위태롭지 않은 한, 당신은 앎길을 배울 수 있다. 심지어 휠체어에 의존하여 생활하거나 어떤 장애가 있다 하더라도 당신은 앎을 위한 기반을 다질 수 있다.

당신은 여기서 적절한 건강이 어떤 것인지 따져보아야 한다. 즉, 건강이 어느 정도 필요하냐에 따라 당신의 기준과 기대치를 산정해야 한다. 이처럼 현실에 맞게 건강에 접근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 모든 것을 균형 있게 바라보며, 건강을 유지하는 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좀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당신 삶에서 실제 필요한 것에 기반을 둔, 이런 기본적인 원칙과 관점이 없다면, 당신은 건강을 무시하거나 집착하여 균형 잡히고 목적 있는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다.

몸은 물질구조로 이루어진 조직이다. 몸은 신비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몸을 마음이나 영혼과 혼동하지 말라. 사람들은 이것을 모두 같은 것으로 보려 한다. 그래서 자신이 통합되었고 삶이 통합된 것으로 느끼고 싶어 한다. 그러나 삶은 다른 수준에서 돌아간다. 삶에는 물질환경과 정신환경, 영적환경이 있으며, 각기 그 수준에서 돌아간다. 당신이 세상을 살아가고 앎길을 따라 살아가려 할 때 관심을 둬야 하는 것은 물질환경과 정신환경에서 적절한 기량을 터득하는 일이다. 당신은 균형 잡힌 삶을 살 수 있도록 물질환경에서 기량을 연마해야 한다. 또한 지금은 지구가 큰 공동체에 진입하므로 정신환경에서도 기량을 연마해야 한다. 그래야 그 환경에서 적절히 기능하여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해낼 수 있다. 영적환경에서의 기량은 당신이 연마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앎이 내면에 있고, 영적 가족과 연결되어 있으며, 당신 성장을 감독하는 불가시존재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삶에서 완벽하게 건강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심지어 당신 생각이 완벽하고 행동에 전혀 흠잡을 데가 없다 하더라도, 사고나 질병, 부상에 대한 위험이 줄기는 하겠지만, 여전히 위험은 상존한다. 이 위험은 세상을 살아가려면 당연히 뒤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종종 위험이라는 개념 자체를 없애 보려고 한다. 그들은 위험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개념 자체를 싫어한다. 그래서 “실제로 사고나 질병, 부상은 없다. 이것들은 모두 인간 기능이 정상 작동하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다. 인간 기능이 정상으로 작동하게 되면 아무런 사고나 질병, 부상이 없을 것이다.”라고 믿는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고 동식물들을 보라. 모두 위험을 안고 살아간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돌아가리라는 보장도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세상을 살아가려면 이상을 꿈꿀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삶을 받아들여야 한다. 삶을 체험하려면 이상을 꿈꿀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삶을 체험해야 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위험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이 점을 받아들이라. 이것은 회피가 아니라 용기다. 삶을 받아들이려면 통째로 받아들여야 한다. 좋아하는 부분만 받아들이고 나머지를 무시하면 안 된다. 당신이 완벽한 삶에 대한 개념이나 그런 이상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당신에게 훨씬 더 큰 것을 알려주고 있다. 당신 내면에 있는 앎, 우주의 앎과 완전히 조화를 이루는 삶, 즉 진짜 삶이자 참된 삶을 알려주고 있다. 이것이 신성이다.

우리가 접근하는 방식은 다른 것과 비교하면 단순해 보일 것이다. 여기에는 속임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필요한 것을 빼내지도 않고 불필요한 것을 집어넣지도 않는다. “어느 만큼 건강해야 하는가?” 결국 이 질문은 당신이 답해야 한다. 여기서 배운 기준을 생각해보면서 자문해보라. “앎길을 배워 실천하기 위해 기반을 다지려면 어느 만큼 건강해야 하는가? 운송 수단처럼 내 몸도 내가 원하는 곳에 데려다 줄 수 있는가? 또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가?”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빼고는 대부분의 경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때 당신은 몸을 적절히 사랑스럽게 보살필 수 있다. 만약 몸을 당신이 품은 이상적인 건강에 맞추려 한다면, 당신은 몸을 해칠 만큼 몸에 지나치게 요구할 것이다. 또한 몸이 완벽한 도구가 되어 절대 실수하는 일이 없기를 바랄 것이다. 그래서 물질계 현상과는 어울리지 않은 당신의 이상에 맞추도록 몸에게 요구할 것이다.

그러니 다시 본질로 되돌아가 질문하라. “내가 세상에 올 때 하려 한 일을 이 몸이 해내려면 얼마나 건강해야 하는가?” 당신은 이것을 끊임없이 자문해 보아야 한다. 이에 대한 당신 답이 변할 것이니, 한 번만 물어보아서는 안 된다. 특히 당신이 앎길을 실천하는 학생으로서 나아간다면, 나아감에 따라 답이 달라질 것이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처럼 당신도 자신의 몸 생김새가 마음에 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큰 목적에 봉사하는 일의 관점에서 몸을 본다면, 어떤 점이 다른가? 겉모습을 멋지게 보이는 데 얼마나 투자할 작정인가? 마음에 들지 않은 사소한, 몸의 겉모습이나 기능들을 극복해보려고 당신의 중요한 시간·에너지·자원을 얼마나 많이 써야 하는가?

그래서 당신은 삶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바탕으로 현실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우리가 전에도 말했듯이, 다른 사람들과 의미 있는 관계는 당신이 그들과 함께 삶에서 할 수 있는 일에 바탕을 둔다. 당신은 삶에서 함께 하는 일로 결속을 다지고, 신뢰를 쌓으며, 역량을 기르고, 관계의 규모를 키운다.

이 점은 몸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몸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몸과의 관계를 깊게 해줄 것이다. 몸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면, 당신은 실망할 것이다. 관계의 진짜 기반이 무엇인지 보라. 시간이 지나면서 당신이 해야 할 일을 알게 되면 그 기반이 보일 것이다. 이때 몸이 제대로 쓰일 것이다. 왜냐하면 몸은 본질적으로 소통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몸의 목적은 아름답게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소통의 도구로 쓰이는 것이다. 즉, 물질 현실세계에서 매개체가 되어 참여하는 것이다. 자동차가 당신을 원하는 곳까지 데려다 주면 제 몫을 다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동차를 어떻게 다루는지 보라. 자동차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가! 사람들이 자동차를 운송 도구로 여기는가? 아니다. 자동차는 자기과시의 도구가 되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운송 도구인 자동차에 엄청나게 많은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흥미롭게도 몸과의 관계가 이와 흡사하다.

당신이 삶에서 진짜 공헌을 찾아 행하게 되면, 당신은 그 공헌으로 기억될 것이고, 당신 삶은 그 공헌으로 진가를 인정받을 것이다. 당신이 제대로 공헌하고 이 세상을 떠나면, 당신은 그 공헌을 바탕으로 이 삶을 기억할 것이다. 그 밖의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 오직 공헌과 관계 회복만이 당신 관심사가 될 것이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당신이 가지고 갈 수 있는 전부다. 그러므로 당신은 세상에 있는 동안 여기에 가장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지금 당신에게 권하는 것은 자유다. 참된 삶, 균형 있는 삶을 사는 자유를 찾으라고 권하고 있다. 당신은 건강해야 하고 만나야 할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당신에게는 적절하면서도 필수적인 것이 필요하다. 완벽한 건강을 찾는 일은 완벽한 사람을 찾는 것과 같다. 완벽한 건강을 찾는 일에 일생을 보냈다면 일생을 허비한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선물을 내주지 못한 채로 고향으로 되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되돌아가서, 저 밑에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해야 할 일을 깨닫지 못했는지 의아해할 것이다. 그러면서 “도대체 내가 뭐 한 거야. 깜박했네. 저런, 다시 돌아가야겠네. 이번에는 기억할 거야. 이번에는 분명히 기억할 수 있어.”라고 말할 것이다. 고향에 돌아가면 모든 것이 분명하므로 당신은 이처럼 말할 수 있다. 그곳에서는 당신 시야를 가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당신은 물 밖으로 나왔으니, 상황을 명백하게 볼 수 있다.

몸을 바라보고 이렇게 말하라. “몸아! 너는 나의 목적에 봉사해야 한다. 나는 세상에 내려온 목적을 위해 너를 보살필 것이고, 너에게 감사할 것이며, 네 능력을 보존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일을 마치면, 나는 너에게 감사하고 축복하고 너를 떠날 것이다.” 이것이 몸을 존중하는 것이고, 삶에서 몸의 역할을 인정하는 것이다. 당신은 몸을 마음이나 영혼과 같은 것이라고 곡해해서는 안 된다. 몸의 물질구조가 돌아가는 것을 이해하라. 몸에는 필요한 것이 있고 보살펴주어야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라. 그래서 몸이 봉사하는 것에 감사하고, 그 이상은 요구하지 말라.

이제부터는 정신건강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기본적인 개념들을 알려줄 것인데, 처음에는 이 개념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말한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이것들도 깊이 고찰해보아야 한다. 먼저, 도움이 될 만한 정의부터 알려준 뒤, 그 정의를 확장해 나가겠다. 몸과 마찬가지로 마음도 영혼을 섬긴다. 영혼을 섬기는 것이 마음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그러나 당신은 마음이 제 역할을 하도록 마음의 큰 가치를 깨달으려면, 먼저 지휘 체계를 바꾸어야 한다.

아직 앎을 되찾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마음은 몸을 섬기고 영혼은 마음을 섬기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섬기는 순서가 완전히 뒤바뀌어 몸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몸의 기쁨, 몸의 건강, 몸의 외관, 몸의 안락 등 몸에 관한 것이 가장 큰 관심사가 된다. 마음은 몸에 관한 이 모든 것을 한없이 제공하기 위해 노예처럼 바동거려야만 한다. 몸은 불완전한 도구로 고통에 민감하고 질병이나 부상에 취약하므로 마음은 몸이 원하는 것을 충족할 수 없어 보인다. 마치 자동차를 꾸미고 손보는 데 모든 시간을 다 쓰는 운전자와 같다. 위아래가 뒤바뀌어 모든 것이 거꾸로 돌아간다. 차는 운전자를 위해 있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삶의 관점에서 보면 운전자는 영혼이고, 제어판은 마음이며, 차체나 엔진 등 물리적 부분은 몸이다. 마음은 여기서 영적세계와 물질세계의 가교 역할을 하며, 정신환경이라 불리는, 마음 자체의 환경 안에서 살고 있다. 정신환경은 생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그 안에서 마음들 간에 서로 영향을 준다. 이 환경은 물질세계와는 분명히 다르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둘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서로 영향을 준다.

그러므로 먼저 중요한 정의부터 내리고 시작하겠다. “마음이 앎을 섬기면 자신을 표현하고, 자신을 섬기면 혼란에 빠진다.” 마음이 자신을 섬기면 가장 중요한 건강과 관계를 잃게 된다. 당신이 앎과 관계를 맺지 못하면 당신 마음은 다른 것을 섬겨야 한다. 왜냐하면 마음은 섬기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은 스스로 만든 생각을 섬기고, 지키고, 보호할 것이다. 심지어 자멸하는 일이 있더라도 이런 일을 할 것이다. 마음은 매개체이지 창조의 원천이 아니다. 앎이 없는 마음은 노예처럼 따라서만 하며,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닌 군더더기에 불과하다. 그리고 방어적이며 의심이 많다. 또한 본질적으로 두려움이 많다. 왜냐하면 마음 자신밖에 없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진짜 기반이 없기 때문이다. 당신도 이런 두려움과 불안을 맛보았고, 이런 취약성을 잘 알고 있으며, 이처럼 방어막을 치고 살았다. 마음은 큰 것을 섬겨야 삶에서 제자리를 찾을 수 있고 큰 공급원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다.

마음은 자신을 위해 획득한 권한을 포기하고 싶지 않을 것이므로 계속 투쟁할 것이다. 마치 왕이 없는 사이 왕권을 장악한 시종과 같다. 시종은 왕국을 소유할 수 없으므로 지배권을 포기해야 한다. 왕국은 시종의 지배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나 몸은 섬겨야 한다. 그래서 당신은 지금까지 지휘 체계, 즉 마음은 몸을 섬기고 영혼은 마음을 섬기는 것에서 삶의 실재 세계, 즉 몸은 마음을 섬기고 마음은 영혼을 섬기는 곳으로 넘어가야 한다.

사람들은 온갖 정신질환들로 고통받고 있다. 정신질환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을 만큼 널리 퍼져 있다. 심지어 당신 삶에서도 그 영향을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은 삶에 의미를 느끼지 못하므로 고통받는다. 그들은 어디에도 어울리지 못하므로 방황한다. 스스로 영웅이 되어 혼자서 모든 것을 충족하고 결정할 수 있기를 바라지만, 삶은 이처럼 되지 않는다. 그들은 고통이 두렵지만, 그 고통이 어디서 오는지 모르니 항상 이중적이다.

마음은 종이므로 통치할 수 없다. 마음이 통치하면 아주 형편없는 통치자가 될 것이다. 마음은 현실에 기반을 둘 수 없어 세상 살아가는 데 안정되고 의미 있는 기반을 만들 수 없다. 또한 진짜 정체성이 없으므로 의미 있고 지속되는 관계의 기반을 마련할 수도 없고 삶에서 실현하는 큰 목적을 정할 수 없다.

이런 불가능한 것을 마음에게 하라고 하면, 당신은 마음을 무자비하게 혹사시킬 뿐 계속 실패하고 실망만 할 것이다. 마음을 이처럼 다루는 것은 가혹하다. 마치 몸으로 하여금 마음의 불안감을 없애는 도구로써 일하라고 하는 것만큼이나 가혹하다. 당신 삶의 가장 주된 권한을 마음에 부여하는 것은 매정한 짓이다.

개인적 마음, 즉 당신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가꾼 마음은 참으로 멋진 도구이자 아름다운 심리 체계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아니다. 마음은 몸이 죽고 나서 잠깐 더 살 수 있지만, 결국 사라져야 한다. 끝내 남는 것은 오직 내면의 필수 부분뿐이다.

당신이 세상에 있는 동안, 가장 위대한 발견이자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그 내면의 필수 부분을 찾아내는 일이다. 왜냐하면 오직 앎만이 고향에서 가져온 목적을 담을 수 있고, 오직 앎만이 세상에서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며, 오직 앎만이 당신의 정신적·육체적 특성과 그에 알맞은 설계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앎이 없으면 사람들은 거창한 개념이나 엄청난 철학과 우주론, 대단히 복잡한 정신작용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당신이 삶과 함께하느냐, 자신의 진짜 본성과 관계를 맺고 삶에서 그대로 표현하느냐, 세상의 진짜 본성과 관계를 맺고 세상이 나아가는 방향과 성장에 공헌하느냐이다. 이것이 진짜 문제며, 당신 생각이 얼마나 대단한지, 삶에 대한 당신 철학이 얼마나 포괄적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넓게 보고 생각하는 것은 큰 삶을 살 때, 즉 앎을 따르는 삶을 살 때만 나온다. 생각이 커지는 것은 체험이 커졌기 때문이고, 생각이 포괄적인 것은 포괄적인 것을 체험했기 때문이며, 생각에 균형이 잡히는 것은 삶에 균형이 잡혔기 때문이다.

마음의 삶과 가슴의 삶 사이에는 도저히 뛰어넘을 수도 없고 깊이도 알 수 없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으니, 당신은 다리를 놓아야 한다. 이 다리에는 네 기둥이 있다. 삶의 기반인 이 다리가 일단 세워지고 나면, 그 위로 필요한 것들을 나를 수 있다. 즉, 당신이 앎과 지혜가 건너올 수 있도록 다리를 세워 놓으면, 세상과 고향 사이에 세워진 이 다리 위로 생각, 힘, 통찰, 알아보는 능력 등이 건너올 수 있어 당신은 삶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다.

마음이나 몸은 모두 다리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 다리를 세우려면 당신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적절히 건강해야 한다. 몸과 마찬가지로 마음도 완벽할 필요는 없다. 결점이나 실수, 고통, 불편함이 없어야 할 필요는 없다. 마음은 다만 적절히 기능하며, 큰 힘에 삶의 통제권을 넘겨주기만 하면 된다. 실제로 마음은 큰 힘을 섬기도록 설계되어 있다.

마음은 일순간에 통제권을 넘겨줄 수 없으며, 서서히 조금씩 넘겨주게 된다. 통제권을 넘겨줄 기회는 당신이 중대한 결정을 할 때마다 온다. 그러니 중대한 결정을 할 때마다, “내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원하는가?”라고 자신에게 물은 다음, 당신이 생각하고 원하는 것을 놓고, “내가 여기서 꼭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라고 자신에게 물으라.

아는 것과 원하는 것은 다른 경우가 많으며, 사람들은 이것을 알고 나서 종종 혼란을 느끼거나 좌절감을 맛본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당신이 체험을 통해 이것을 알고 나서야 앎이 상상으로 꾸며내거나 단순히 소망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것임을 깨닫는다는 점이다. 아는 것과 원하는 것이 다를 때, 앎의 실재가 당신에게 입증된다. 그래서 이때 당신은 앎이 당신의 소망에서 나오거나 불안감 때문에 꾸며낸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실재하고 지성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리고 이 지성은 당신의 충동이나 두려움, 소망, 그 밖의 세상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앎은 유혹이나 조종에 넘어가지 않는, 당신의 유일한 부분이며, 당신 삶의 기반이다. 앞으로 알겠지만, 앎은 당신 안에 있는 가장 중요한 천성이다. 당신이 앎으로 가는 계단으로 준비해나가면, 마음은 앎을 향하게 되어 앎과 훨씬 더 보조를 맞추어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마음이 앎을 위해 다리가 되고 앎의 매개체가 된다. 결코 마음이 단절되거나 무시당하거나 거부당하거나 파멸되지 않는다. 마음은 새롭게 다시 쓰여 앎과 참된 관계를 맺고 다시 화합을 이룬다.

시간이 지나 당신이 이 상태에 이르게 되면, 삶에서 진짜 조화로움을 체험할 것이다. 당신은 몸을 자비롭게 바라보며 그 가치를 알아볼 것이고, 마음을 자비롭게 바라보며 그 가치를 알아볼 것이다. 마음과 몸은 모두 소통 수단이며, 물질계에서 존재하는 데 매개체가 된다. 이 둘은 완벽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하게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 대부분은 앎이 실재하는 것임을 알지 못하므로 마음을 지나치게 과장해서 보고, 마음에 깊이 몰두한다. 사람들이 몸에 집착할 수 있듯이 마음에도 집착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감정, 생각, 기억, 미래 계획, 이론, 철학, 두려움, 공포 등에 집착한다. 그럼으로써 마음은 대단히 커 보이고 지배적으로 보인다. 또한 수많은 층으로 이루어져 혼란스러워 보이고,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어 보인다. 마음은 수도 없이 많은 생각으로 겹겹이 쌓여 있다. 그래서 마음이 마치 실재를 압도하여 당신이 마음의 뜻과 충동에 종속된 것처럼 느껴진다.

어디서 자유를 찾을 것인가? 자유는 마음이 앎을 섬길 때 찾을 수 있다. 자유는 지휘 체계를 되돌리면 찾을 수 있다. 당신이 마음의 노예가 되면 지휘 체계는 원래 상태에서 역전된다. 마음은 할 일을 부여받지 않으면 제멋대로 날뛰고, 초점을 정해주지 않으면 사방팔방으로 관심을 쏟으며, 당신 내면에서 지휘를 받지 않으면 정신환경에서 다른 마음들의 노예가 된다.

마음의 진짜 지휘권은 앎에 있다. 창조주의 계획은 완벽하므로 창조주는 당신에게 내면에 진짜 지휘 체계에 맞는 것을 세우도록 요청한다. 그렇다고 이 말이 당신 삶을 신에게 내주라는 뜻이 아니다. 신은 당신 활동을 일일이 인도하면서 당신 문제를 모두 해결해주는 데 그 목적을 두지 않는다. 우주의 창조주가 당신 일상에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일들, 즉 당신의 감정, 생각, 두려움, 관심사, 그 밖에 당신이 몰두하고 있는 사소한 일들에 깊이 관심 둘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창조주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창조주는 이런 일을 위해 당신에게 앎을 주었다. 앎은 당신 내면에 있다. 그러니 앎에게 다가가라. 그러면 당신은 창조주에게 다가간다. 왜냐하면 신은 오직 그냥 알아질 뿐이기 때문이다. 생각이나 추론을 통해서는 신을 알 수 없다. 앎이나 삶도 오직 그냥 알아질 뿐이다. 앎이 없다면, 당신은 생각하고 철학적으로 사색하고 분석하고 평가하고 비판해도 창조주와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앎으로 가는 계단을 함으로써 당신 마음은 생산적이고 창조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방향을 알게 되고, 목적을 알게 되며, 의미를 알게 된다. 이때 마음은 파괴적이지 않고 섬길 줄 알며, 세상 속으로 당신 삶을 확장하는 매개체가 된다. 그러나 마음이 앎에 다가가 앎과 자연스러운 관계를 회복하려면, 앎길에서 준비를 해야 한다.

여기에 비결이나 비책 같은 것은 없다. 이상하게 생긴 알약을 먹고 나면 다음 날 아침, 앎의 상태로 깨어나는 일은 없다. 당신은 다리를 세워야 한다. 기반을 다져야 한다. 이것이 당신 일이다. 일단 기반이 다져지면 창조주가 일할 것이다. 창조주가 불가시존재들을 통해서 다리를 건설하고 기반을 다지는 일에 당신을 도울 것이다. 그러나 이때 당신은 작업 현장에 나타나 마음과 몸을 그 일에 투입해야 한다. 당신은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하고, 또 그 일을 해야 한다.

이쯤에서 중요한 사실을 하나 짚고 넘어가겠다. 많은 사람이 영성이나 종교에 접근하는 것은 불안에서 안도감이나 피난처를 찾고자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험난한 삶에서 위로받고 쉴 수 있는 곳을 원한다. 또 인정받고 용서받기를 원한다. 당신은 앎길을 따르면서 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지만, 이보다 더 많은 것을 만나게 되고, 훨씬 더 많은 것을 요청받게 된다.

사람들은 종종 신을 거대한 영적 복지 제도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그 제도에 가입하기만 하면 부채를 면제받고, 선물을 받으며, 기적이 일어난다. 당신은 그저 그 제도를 믿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신이 와서 당신을 위해 온갖 잡다한 일을 다 도와준다. 마치 신이 당신 소망을 들어주는 일 말고는 우주에서 별로 할 일이 없어 보인다. 어떻게 신이 이처럼 한심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영적 복지 제도가 아니다. 우리는 복지 제도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할 일을 준다. 우리는 당신에게 일할 수 있는 환경과 그 기반을 제공하여 목적과 의미와 방향을 준다. 그래서 당신이 자신의 자연스러운 능력을 회복하여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며 앎의 진짜 기반을 세울 수 있게 한다. “신이 나를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라고 생각하지 말라. 신은 당신에게 앎을 주었다. 당신이 얼마나 큰 것을 받았는지 이해한다면, 세상에서 당신의 길과 당신의 공동체를 찾는 데 필요한 것이 당신에게 있음을 알 것이다.

그러나 지휘 체계가 뒤바뀌어 있는 한, 즉 마음이 몸을 섬기고 영혼이 마음을 섬기는 것처럼 보이는 한, 육체적·정신적 어려움은 지속될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의 육체적 문제나 정신적 문제는 지나치게 과장되어 당신은 삶에서 일어나는 작은 문제들에 매이기 쉬울 것이다.

삶의 큰 문제들을 다루기 시작할 때, 당신은 작은 문제들에서 빠져나오거나 그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해결할 것이다. 당신 에너지를 삶의 큰 문제에 쏟을 때, 당신은 작은 문제들을 너그럽게 받아들인다. 삶의 큰 문제를 다룰 때, 당신은 앎으로 가는 길을 찾아내어, 당신이 왜 세상에 와 있는지 깨닫고 앎의 회복과 표현에 헌신한다. 앎길에서 당신의 진짜 동행자인 몇몇 사람들에게 자신을 헌신할 때, 앎은 회복된다. 앎은 당신이 자신을 바칠 때 회복된다. 앎은 개인적 보상 혹은 신이나 세상으로부터 더 나은 복지를 얻는 데 그 기반을 두지 않는다. 앎은 당신을 세상에 오게 한 가장 중요한 공헌을 당신이 찾아내도록 하는 일에 힘을 쏟는다. 또 당신을 세상에 보낸 이들, 심지어 지금도 당신과 함께 있는 이들을 당신이 기억해내도록 하는 일에 힘을 쏟는다.

건강은 활력이지만, 활력은 현실 생활을 해나갈 때 생긴다. 활력은 삶의 위험과 기회를 회피하지 않고 받아들일 때 생기며,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과 진짜 관계를 맺고 진짜 헌신할 때 생긴다. 활력은 삶의 진짜 지휘 체계를 체험하는 데서 생기며, 당신 본성의 다른 측면, 존재 방식의 다른 수준들을 존중하는 데서 생긴다. 그러니 아프면 의사를 찾아가 몸이 당신 목적을 계속 수행할 수 있도록 원활히 돌아가게 하라. 또 필요하면 생각이나 행동을 바꾸라. 당신은 큰 목적을 섬기니 이렇게 할 수 있다. 이때 당신은 자신의 영적 삶을 세상에서 생각과 행동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이 건강이고, 이것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이며, 모든 사람에게 내재된 큰 진리, 큰 현실세계를 보여주는 모습이다.

이것을 우리는 앎길이라고 부른다. 앎길을 따르면, 당신은 이곳에서 만나야 할 사람들을 만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다. 또한 자유를 찾을 수 있고, 수많은 어려움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인류는 지금 지구 자체의 어려움에 직면해 있을 뿐만 아니라 큰 공동체 진입을 앞에 두고 있으면서 수많은 어려움에 처해 있다.

당신의 안녕뿐만 아니라 세상의 안녕을 위해서도 당신 삶에는 지금 큰 진리가 필요하다. 당신은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세상에 온 것이 아니다. 당신은 세상을 위해서 이곳에 왔다. 그래서 당신이 그처럼 대단하며, 당신의 목적이 그처럼 크다. 당신이 삶의 필수 부분을 회복하면, 보상 또한 대단히 클 것이다.

당신은 가야 할 곳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러니 병에 걸리거나 다쳤다면, 단순히 그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생각해보고 필요한 조치를 취하여 당신이 해야 할 일을 계속할 수 있게 하라. 그러면 질병이나 부상을 지나치게 과장해서 보지도 않을 것이고, 당신의 관심사가 온통 거기에만 쏠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살아가면서 병에 걸리거나 다칠 수 있지만, 여전히 이곳에서 당신의 운명을 완수할 수 있다.

끝으로 잘 사는 것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보겠다. 잘 먹고 충분히 자라. 날마다 운동하라. 적절한 사람들과 함께하라. 아는 것을 따르라. 계속 앎에게 물으라. 만약 부적절한 사람들과 어울리면, 당신은 건강을 해치고 다시 혼란 속에 빠질 것이다. 단순한 것이면서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따르라. 어쩌면 당신은, “맞아. 분명히 이렇게 해서는 안 돼.” 혹은 “맞아. 분명히 이렇게 해야 해.”라고 혼자 말했을 것이다. 그렇게 하라.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을 하라. 무엇을 망설이는가? 무엇을 기다리는가? 위기가 닥칠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 작은 문제가 큰 문제로 커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 당신은 육체 건강과 정신 건강을 유지하는 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 일들을 하라. 더 많은 것을 묻지 말라. 당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하지 않는다면, 더 많이 알아본들 소용없다.

사람들은 신과 하나 되기를 바라지만, 심지어 단 한 사람하고도 함께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엄청난 건강이나 마음의 평화를 원한다. 하지만 오늘 해야 할 일,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간단한 일조차 할 수 없다면,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아는 것부터 시작하라. 당신의 현재 상태에서 시작하라. 아는 것을 실천하며 뒤로 물러서지 않도록 당신을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해보라. 이런 것이 기반을 다지는 일이고, 세상에서 고향으로 가는 다리를 세우는 일이다. 그래서 당신 삶의 모든 면을 활용하여 삶 전체에 활력을 준다.

앎에 가까이 다가가라. 그러면 앎이 가깝게 느껴지며, 당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당신이 아는 것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