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공동체에 대한 인간의 반응

Human Responses to the Greater Community

1997년 2월 5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신의 메신저, 마샬 비안 서머즈에게
계시되다.

이 본문에 관하여


What you are reading in this text is the transcription of the original voice of the Angelic Assembly as it spoke through the Messenger Marshall Vian Summers.

Here, the original communication of God, which exists beyond words, is translated into human language and understanding by the Angelic Assembly who watch over the world. The Assembly then delivers God’s Message through the Messenger, whereafter it is transcribed and made available to you and to all people.

In this remarkable process, the Voice of Revelation is speaking anew. The Word and the Sound are in the world. May you be the recipient of this gift of Revelation and may you be open to receive its unique Message for you and for your life.




독자에게 알림
이 번역은 영어 원문 번역을 자원한 새 메시지 학생이 협회에 제공하였다. 우리는 사람들이 자신의 모국어로 새 메시지 일부와 만날 기회를 갖도록 이 같은 초기 형태로 이 번역물을 세상에 내놓는다.

사람들이 큰 공동체라는 이 개념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큰 공동체는 인류에게 대단히 큰 문턱이자 엄청난 전환점이다. 어떤 이들은 큰 공동체를 향해 나아가려 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큰 공동체에서 멀어지려 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큰 공동체에 반대하려 할 것이다. 새로운 개념이나 새로운 경험에 사람들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이 이 세 가지이다. 이 세 가지 반응에는 각각 몇 가지 다르게 표명되는 것이 있다. 지금 이것들을 살펴보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개개인 안에서나 인간 사회 그 자체 안에서 이러한 반응이 어디에서 오는지 살펴보겠다.

큰 공동체에 대한 첫 번째 반응은 큰 공동체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인간은 놀라우리만치 부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상존하는 것들을 부정하고, 세상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들을 부정하고, 만성적인 어려움이 있는 것들을 부정하고, 자신이 그곳에 있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거나, 실제로는 전혀 아니면서도 어떤 것을 자신이 통제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큰 공동체는 인식과 이해에서 엄청난 변화를 나타내며, 엄청난 변화를 요구할 것이므로, 부정이 대단히 많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큰 공동체를 전혀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 많은 방문이 일어나고 있고 이 방문자 중 상당수가 인간 문제에 간섭하고 있다는 증거가 매일 증가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다. 사람들은 개인 일에 몰두하면서 자기 일만 계속할 것이다. 그들은 단순히 큰 공동체가 그들 의식 속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부정은 세상에 대단히 흔하다. 사람들은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왜 이러는가? 이것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왜 이런 성향이 사람들에게 그처럼 많이 존재하는가?

인간의 본성 안에는 고통에 대한 보호막이 있으며, 자기 일에 대한 통제력을 어느 정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어떤 필요성이 있다. 그럼으로써 안정감을 얻으며, 원활히 돌아가는 상태에서 살려는 의욕, 생산적이 되려는 열의를 계속 유지한다. 그런데 자신을 보호하고 보존하는 바로 그 메커니즘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들의 안녕을 위협하고 그들 삶에 대한 실질적 통제력을 약화하는 바로 그 상황, 바로 그 사건들을 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를 읽어보면, 도전이나 변화가 있는 시기에, 사람들이 엄청나게 부정했던 증거를 보게 된다. 사람들은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거나, 만약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 실제로 그것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면, 마치 잘 해결될 것처럼 행동했다.

어떤 경우는 “이것은 신의 소관이다.” “신이 알아서 하실 것이다.” “신이 행복한 결과를 가져다주실 것이다.”라고 말하며, 큰 힘에 호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의 행복감을 보존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실제로 그들을 위험에 빠뜨렸으며, 세상에서 해악에 더 취약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그 안에는 너무 많은 고통이나 너무 많은 불확실성을 경험하지 못하게 하는 어떤 보호 메커니즘이 있다. 그런데 바로 이 보호 메커니즘이 인류를 위험에 빠뜨리고, 문제가 커지기 전에 해결하는 것을 막는다. 어떤 점에서 보면, 바로 이 보호 메커니즘이 삶을 더 어렵게 하고 더 위험하게 한다.

그런데 부정은 단순히 내재된 생존 메커니즘의 결과만은 아니며, 사람들의 집착에서 온 결과, 사람들이 어떤 것에 충성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것을 설명해보겠다.

만약 당신이 자신의 생각과 선호에 충성한다면, 그 접근방식이 갖는 바로 그 속성으로 인해 당신은 삶의 현실과 충돌하게 된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삶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당신이 중요하게 여긴 것이 옳지 않다고 증명하는 것을 부정하거나 무시할 것이다.

행복에 대한 이러한 집착, 자신의 생각과 믿음을 고수하려는 이러한 집착은 매우 위험한 접근방식이다. 이 방식은 삶의 특정 요소, 삶의 특정 측면들만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다른 모든 것은 가로막으려 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부유해지고, 편안해지고, 행복해지기를 원하지만, 이것이 그들에게 초래하는 과정, 즉 활력을 잃고, 관계를 잃고, 내적 삶을 잃는 것 등을 인식하지 못한다. 또한, 이것이 어쩌면 자신이나 세상을 위한 최상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해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한 가지 목표에 마음을 정하고 나서, 거기에 치루는 대가를 고려하지 않을 것이며, 이것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려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목표를 집요하게 추구할 것이며, 그로 인해 그들이 모든 것을 희생하고, 사실 그것이 전혀 그들에게 의도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앎의 개념은 그들에게 두려운 것이다. 세상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그들이 다루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목표에 몰두하고 있지만, 그 결과 자신의 참자아와 진정한 목적,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자기 삶의 결과와 인류의 미래를 결정할 바로 그 삶의 상황을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지성 없이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큰 공동체에서, 지성은 적응하고 창조하는 데 필요한 의지와 소망과 능력으로 정의된다. 이것이 지성의 정의이다. 지성은 뇌의 크기가 아니며, 1분에 계산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지 않는다. 지성은 적응하고 창조하는 데 필요한 소망과 의지와 능력이다. 많은 사람이 날마다 창조하려고 시도해보지만, 적응하지 못하면, 창조할 수도 없다.

진정한 창조적 충동은 세상에 직접 참여하는 데서 온다. 즉, 세상에 필요한 것, 당신이 창조하도록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것, 당신이 만들어 낼 기량이 있는 어떤 것을 창조해야 하는 데서 온다. 이것이 지성이다. 지성은 문제를 인식하고 즉시 대처하는 능력이다. 지성에 대한 다른 실질적이고 의미 있는 정의는 없다.

지성의 표현은 창조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그 결과 자신과 타인 모두를 위해 삶의 상황을 개선하는 능력이다. 그런데 부정은 모든 형태와 표현에서, 지성의 심각한 결여를 보여준다. 현실이 보여주는 것을 피하거나 저항할 때, 당신은 자신의 지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자신의 지성을 상실하고 있고, 자신의 지성으로 적응하고 창조하는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

여기서 행복의 추구는 모든 악의 뿌리가 되는데, 그것은 행복의 추구가 본질적으로 나빠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하고 행복만을 좇기 때문이다. 그리고 행복의 추구로 그들이 잃는 것은 대단히 크고 중대하며, 그들의 안녕과 성취에 매우 중요하다.

많은 사람이 큰 공동체에서 멀어질 것이다. 그들은 자신만의 생각이 있으며, 자신만의 목표가 있다. 그들은 삶이 자신의 계획을 방해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그저 큰 공동체가 자신의 의식에 들어오는 것을 차단하거나,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할 것이다. 만약 큰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면, 그들은 그것을 즐거운 것, 좋은 것, 자신이 동일시할 수 있는 것, 개인적인 계획과 목적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바꿔놓을 것이다.

이것이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다. 많은 사람이 “아, 다른 형태의 지적 생명체의 방문은 위대한 영적 사건이다.”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게 해 줄 어떤 것, 자신이 삶에서 추구하는 깨달음, 희망, 평화를 가져다줄 어떤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진정한 삶의 목적을 나타내는 이러한 목표들조차 여기서 잘못 판단되고 잘못 해석된다.

평화의 진정한 가능성을 보려면, 즉 침착함을 개발하고, 인간 가족에 더 큰 화합을 가져오려면, 당신은 실제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맞게 일해야 한다. 자신의 이상이나 가치관을 덧붙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삶은 그런 것에 반응하지 않을 것이고, 당신은 내면에 있는 진짜 본성과 주변 삶의 현실, 둘 모두와 접촉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삶과 자신에게서 멀어지게 될 것이며, 당신에게 삶의 큰 보상을 줄 것으로 생각했던 바로 그 이상은 실제로 당신에게서 그 보상을 빼앗아 갈 것이다.

지금 세상에는 큰 공동체에서 온 이들이 인간의 삶에 평화와 평정과 진정한 해결책을 가져다줄 것을 바라고 믿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실제 상황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자 하며, 이것은 보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이 생각하고 싶은 것만 생각하고자 하며, 이것은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때 자신의 지성을 제대로 발휘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실질적 진실을 밝혀줄 것을 내면에 있는 앎에 요구하고 있지 않다. 그들은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 눈을 뜨고 있지 않다. 이것은 일종의 부정이다. 이것은 현실에서 멀어지는 것이며, 삶의 의미와 목적과 본질을 회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들이 큰 공동체로부터 멀어질 것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많은 사람은 큰 공동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으면서 그냥 외면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확신을 품게 할 충분한 증거가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들 삶에서 직접 만나지 않는다면, 그들은 큰 공동체가 세상에 존재하며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현실을 부정하고 회피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들의 결론은 그들의 생각과 믿음을 더 굳건히 하는 데만 쓰일 것이다. 그들은 그들 세계관이 위협받거나 도전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삶이 그들 세계관을 확인해주기만 바라며, 그래서 그들 세계관이 무엇이든 그 세계관을 확인하는 일에, 큰 공동체가 세상에 있다는 증거를 사용할 것이다. 그들은 그것이 현실이라고 인정하겠지만, 그들의 개인적인 관심사와 목적에 맞게 그것을 해석할 것이다.

그들은 뒤돌아보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직 자신의 생각과 믿음만을 볼 것이고, 그 너머는 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부정과 회피이다. 즉, 실제 있는 그대로의 삶과 함께할 수 있는 능력이 없고, 마음을 열고 새로운 것을 생각해볼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며, 삶에 노출할 수 있는 능력이 없고, 새로운 강점과 능력을 개발하는 데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멀어질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큰 공동체와 싸울 것이다. 멀어질 수도 없고 그 존재를 부정할 수도 없으니, 그들은 큰 공동체에 대항하여 투쟁할 것이다. 그들은 방문자들이 그들을 파멸하기 위해 여기 왔다고 믿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방문자들이 악마 세력이라고 믿을 것이고, 이곳에 있는 방문자들의 존재를 세상에 있는 고대 종교 가르침을 바탕으로 해석하려 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 또한 회피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방문자들이 그들 자신처럼 자신에게 필요한 것과 몰두하는 것들에 쫓기는, 지각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방문자들을 악마나 사탄의 앞잡이로 만들 것이다.

그들은 큰 공동체의 현실을 자신의 종교적 관점에서 해석하겠지만, 그 현실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인류 홀로 알아서 살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큰 공동체에 맞서 싸우겠지만, 인류가 새로운 문턱에 와 있고, 큰 공동체에서 온 이들이 있다는 것은 지구 안에서 삶의 진화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종교 사상을 유지하려고 싸울 것이다. 또한, 성장과 발전을 위한 새로운 파노라마가 있을 가능성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싸울 것이다.

그들은 이 현실에 맞서 투쟁할 것이고, 자신만의 멀리 떨어진 위치에서 이 현실을 볼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무엇을 다루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 역시 보고는 있지만,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두려움과 불안의 지배를 받을 것이다.

세 번째로 가능한 반응은 큰 공동체를 향해 가면서, 큰 공동체가 현실이고 새로운 것임을 인식하며, 여기에는 새로운 접근과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고, 요구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큰 공동체를 인정하고 그 의미를 이해해보려고 진지하게 시도해보는 사람이 소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성공할 수 있다면, 또 큰 공동체 앎길을 배울 수 있다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교육하고 안내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을 것이고, 바로 그들이 이 세상에서 진보를 위한 긍정적인 세력이 될 것이다.

그들도 여전히 큰 어려움에 직면하지만, 그들은 상황을 새로운 시각과 새로운 이해로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들은 인식력과 분별력을 길러야 한다. 그들은 큰 공동체의 삶에 대해 배울 수 있어야 하고, 방문자들의 의미와 의도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은 방문자들이 천사나 악마가 아니라, 자신들과 같이 실제로 지각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들은 명확하고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 선악의 이분법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들은 주위에 있는 엄청난 부정과 두려움과 적개심과도 싸워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알고 싶어 하지 않거나, 아니면 두려워하고 방어적으로만 상황을 볼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이런 일반적인 태도나 믿음과 싸워야 할 것이며, 어떤 면에서는 큰 공동체에서 온 이들보다 이것들이 더 큰 장애가 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믿는 것과 아는 것을 구별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또한, 자신의 생각과 평가에도 존재하는 미신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배움은 엄청나겠지만, 그들 주변에 있는 다른 누구도 갖지 못할 발견의 기회, 창조와 적응의 기회가 그들에게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큰 공동체에 대해 반응할 수 있는 것은 세 가지가 있다. 이 세 가지는 삶에서 새로운 어떤 경험을 할 때 가질 수 있는 반응들이다. 누구나 삶에서 어려움이나 역경에 직면할 때 가질 수 있는 것이 세 가지 가능성이다.

큰 공동체에서 온 이들은 어려움과 역경과 기회에 해당한다. 하지만 누가 이것을 알아볼 수 있는 위치에 있는가? 누가 이것을 볼 수 있을까? 누가 상황을 실제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까? 누구에게 바라볼 용기가 있는가? 누가 현실과 자신의 인식 사이의 차이를 분별하는 능력이 있는가? 누구에게 큰 공동체 앎길을 배울 인내와 끈기가 있는가?

세상에는 인류를 무지 상태에 계속 있게 하는 매우 강력한 세력들이 있다. 어떤 경우에는 그 세력들이 의도적으로 이렇게 하려고 하며, 어떤 경우에는 무지해서 의도하지 않게 이렇게 하기도 한다.

지구 정부들은 자국민을 계속 고분고분하고 순종하게 하려고 한다. 의도적으로 이렇게 한다. 그 정부들은 넘어야 할 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정부 몫이고, 보통 사람들은 능력이 안 되거나 할 수 없다고 믿는다. 또한, 인류의 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권위와 책임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국민의 뜻이 없으면, 정부가 이것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정부는 앎을 믿지 않으며, 설득과 조작만을 믿는다.

현재 세계 종교 기관들은 그들의 고대 신앙을 지키고자 한다. 또한, 그들의 권위를 지키고 싶어 하며, 신성에 대한 전통적 해석, 인간의 목적과 운명에 대한 전통적 해석을 지키고자 한다.

그런 종교 기관에는 큰 공동체가 대단한 도전이고 위협이어서 큰 공동체를 완전히 부정하는 경향이 더 강하다. 만약 그 종교 기관들이 큰 공동체를 인식하게 되고 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 사람들을 교육하고 신도들을 교육할 용기와 진실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이것들은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자신의 내면, 자신의 성향, 자신의 믿음을 살펴봄으로써 찾을 수 있다. 내가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경향은 당신 안에 존재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과거에 삶에서 만난 상황들을 부정했고, 변화와 역경에 맞서 싸워왔으며, 때로는 새로운 것과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한 것을 향해 나아가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은 이 세 가지 반응을 모두 표현하였다. 이 책을 읽는 순간에도, 우리가 지금 여기서 제시하는 도전과 기회에 직면하는 이때에도, 당신은 내면에서 이런 성향들을 느낄 수 있다. 당신의 성향에는 이 세 가지가 모두 있다. 당신은 주변 아는 사람들에게서, 또 일반 사람들의 경향이나 주안점, 우선순위 등에서 틀림없이 이 모두를 볼 것이다.

신문을 읽어보면, 인간의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는지 알 것이다. 사람들은 살인과 폭력에 매료되지만, 삶에서 일어나고 있는 더 큰 사건들은 다루고 싶어 하지 않는다. 세계 식량 공급이 줄어들고, 표토가 줄어들고, 환경 시스템이 파괴되고, 삶의 기회는 점점 더 줄고, 역경은 점점 더 커지는, 이 모든 사실에는 사람들이 직면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큰 공동체에서 온 이들이 세상에 있다는 가능성조차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들은 “글쎄, 우리는 이런 또 다른 문제가 필요 없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여기에 근본적인 무능이 있으며, 그래서 삶을 실제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고, 작은 문제와 큰 문제를 구별할 수 없다. 현재 세상의 강력한 단체들이 이 무능을 지원하고 있다.

인류가 변화하는 환경에 보조를 맞출 어떤 희망이라도 있을지는 오로지 개인들과 소그룹들의 용기 있는 행동에 달려 있다. 이런 개인들이 더 많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그저 여기저기 재능 있는 한두 사람만의 책임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육의 필요성을 각자 안에서 느껴야 한다. 당신이 기관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기관들은 당신에게 필요한 큰 교육을 제공하고 싶지 않거나 제공할 수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신의 책임이며, 당신의 응답이다.

당신이 미래를 외면하면, 미래가 당신을 엄습할 것이다. 당신이 미래와 싸운다면, 미래는 당신을 무찌를 것이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면, 당신은 미래를 직접 상대하는 능력을 갖출 뿐만 아니라, 자신과 타인을 위해 유익한 결과를 낳도록 미래를 이용하는 능력을 갖출 것이다. 이것이 지금 필요한 것이다.

당신 내면에는 강한 본성이 있고, 약한 본성이 있다. 당신의 강한 본성은 당신 안에 있는 앎의 현실로 표현된다. 당신의 약한 본성은 앎 없이 살려고 하는 당신의 성향, 당신을 인도하기 위해 당신의 생각과 선호에 의존하려는 당신의 성향이다. 여기서 당신은 단 한 번만이 아닌, 몇 번이고 반복해서 선택하여, 자신의 강한 본성을 찾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고, 이 본성이 당신에게 주는 더 큰 힘과 책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관계나 취미, 개인적 목표에 모든 관심을 쏟으며 환상의 세계로 도피하여 살고자 하면, 당신은 삶에 공헌하는 위치에 있지 않을 것이고, 삶은 당신에게 큰 역경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만약 변화와 새로 드러난 것들에 맞서 싸운다면, 당신은 자신에 맞서 싸울 것이다. 왜냐하면 내면에 있는 앎은 당신이 현실적이고 생산적인 방식으로 현재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함으로써 당신을 미래로 나아가게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자기 생각을 고수하고, 자신의 믿음과 연상에 집착하면, 당신은 앎에 응답할 수 없을 것이다. 삶은 당신에게 전쟁터처럼 되고, 행복과 평화와 평온은 당신에게 미지의 것이 될 것이다.

또 다른 문제가 있다. 그것은 영향력의 문제이다. 이것은 인간이 정신환경에 관한 기량과 인식이 부족한 문제이다. 현재 큰 공동체에서 온 이들은 지구에 자리잡으려 하고 있다. 그들은 지구에서 자원을 얻고자 이곳에 왔으며, 인간의 사고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고 있다.

그들의 계획 중 일부는 가장 총명하고 가장 자유롭게 생각하는 사람들, 접근방식에서 전통적이거나 관습적인 것에 가장 얽매이지 않은 사람들을 데려가, 그들을 회유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기서 우리는 평화와 화합에, 또 삶으로부터의 물러남에 영적 주안점을 두는 것을 본다. 그런데 이것은 진정한 영적 초점과 활동이 이루어지는 절이나 수도원으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 자체에서 물러나는 것에 가깝다.

오늘날 세상에는 그 근원이 신에게서 나오지 않은 영적 가르침이 있다. 그것은 큰 공동체 개입의 산물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무엇보다도 행복과 위안을 찾도록 동기를 부여하여, 삶에서 후퇴하고 자신에게서 후퇴하는 과정으로 들어가게 한다.

이러한 가르침은 깨달음, 무한한 행복, 평온, 끊임없는 기쁨을 약속하지만, 실제로는 영향받는 사람들의 깊은 성향을 무력화하여, 그들이 볼 수 없고 알 수 없고 앎에 따라 행동할 수 없는 위치로 밀어 넣는다. 그들은 다른 것을 보거나 알 수 없을 정도로 욕망이나 선호, 희망에 빠져 있다.

세상이 해결책을 요구하고, 긍정적인 참여를 요구하고, 공헌을 요구하는 등 점점 더 많은 것이 요구될 때, 이런 것들을 제공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많은 사람이 회유되고 무력해지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들은 산이나 해변에 있는 작은 마을로 가서 은둔한다. 그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모든 사람과 모든 것에서 멀어지며, 괴로움이 없는 세상, 어려움이 없는 세상으로 자신을 떼어놓으려고 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자신 안에 왜 그런 괴로움이 있는지 그들은 의아해한다. 어쩌면 그들은 그것이 영적으로 자신이 열리는 과정이라고 배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 그들이 경험하고 있는 갈등은 그들 내면에서의 삶이나 세상 속의 삶에 그들이 참여할 수 없어서 생긴 결과이다. 그들은 고통받지만, 그들의 고통은 정당화된다. 그들은 큰 힘에 자신의 힘을 내주고 싶어 하지만, 누구에게 자신을 내주어야 할지, 이것이 정말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지혜나 분별력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인도받기 위해 자신의 힘을 모두 내주지만, 누가 자신을 안내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들은 삶의 책임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며, 다른 이가 자신을 위해 결정을 내려주기를 원한다. 그들은 어린아이처럼, 손에 이끌려 따라가는 것이 삶을 사는 길이며, 삶 속에서 진실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의 권한을 잃게 되며, 또 진정으로 영적 삶을 살고 있다고 계속 믿으면서 자신의 혼과 연결을 잃는다.

그들은 큰 공동체를 직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으며, 큰 공동체를 이해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그들은 자신의 힘을 불러들이고, 자신의 선호를 제쳐놓고, 자신의 행복을 잃을 각오를 하고, 삶에서 중요하고 필요한 일을 하기 위해, 자신의 권한을 이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그들은 삶에 참여하려는 의지를 잃었으며, 자신의 권한을 넘겨주었다.

장담하건대, 이것은 창조주의 뜻이 아니다. 이것은 길이 아니다. 창조주와 불가시 존재들이 초점을 맞추는 것은 사람들을 강하고 책임감 있고 능력 있게 하는 것이지, 사람들이 바라고 기대하는 것처럼 그들에게 모든 것을 제공하는 영적 복지 같은 것을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대, 인류와 교류하는 큰 공동체 세력들은 인류의 이러한 성향을 충분히 활용하여, 그들에게 이익이 되도록 이용할 것이다. 큰 공동체 세력들은 이 개인들을 관찰할 것이며, 이들의 깊은 성향을 무력화할 것이다. 또한, 이들의 순진함을 이용할 것이고, 이들의 좋은 의도를 다른 방향으로 돌릴 것이다.

어쩌면 이 시점에서 당신은 “맙소사! 이것이 가능하다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이 정신환경을 이해하고 그 기술을 얻으면, 당신은 이것이 방문자들에게 어떤 기회를 만들어주고, 방문자들이 정신환경을 이용하기가 상대적으로 얼마나 쉬운지 알 것이다.

만약 영적 가르침이 당신의 권한을 강조하지 않고,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의 회복을 강조하지 않으며, 당신이 대응하고 행동하고 공헌하고 배우고 베풀도록 당신을 세상으로 불러들이지 않으면, 그런 영적 가르침은 어떤 것도 믿지 말라. 이런 것을 해야 할 책임을 빼앗고 당신 안에서 진실하고 실용적인 지혜를 기르게 하지 않는 영적 가르침에는 어떤 것에도 반응하지 말라.

만약 당신이 삶을 직시하고 삶에 참여하는 것을 선택할 용기 있는 사람, 앎길에서 강해지기를 선택하고 지혜를 개발하기를 선택할 용기 있는 사람 중 한 사람이 되려면, 당신은 스스로 분별해야 한다.

우리가 말했듯이, 상대하기가 가장 어렵고 좌절감을 주는 것은 방문자들의 의도보다는 인류의 성향이다. 왜냐하면 세상에 있는 큰 공동체 방문자들을 해석하고, 그들과 겨루고, 관계 맺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준비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엄청나게 강하지는 않으며, 전능하지도 않다. 그들은 자리잡기 위해 인간의 나약함에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힘이 드러날 수 있다면, 그들은 인류가 만만히 볼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계획을 조정해야 할 것이며, 접근법을 바꿔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 삶의 권리와 특권과 지배권을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그들의 존경을 받아야 하며,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국경을 정해야 하고, 분별력을 가져야 하며,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 만약 당신이 이런 일을 하는 유일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당신은 이렇게 해야 한다.

삶에 주의를 기울이라. 앎의 학생이 되라. 큰 힘이 당신 안에서 드러나게 하라. 큰 힘은 당신에게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고, 당신에게 용기와 힘과 끈기를 줄 것이다. 큰 힘은 사기 저하와 낙담에서 당신을 벗어나게 할 것이고, 당신에게 생명의 빛을 줄 것이다. 큰 힘은 창조주가 당신이 갖기 원하는 것을 당신에게 줄 것이며, 창조주가 당신이 하기 원하는 것을 당신이 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큰 힘은 당신이 인간의 부정과 양가성과 적개심의 안개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줄 것이며, 당신을 믿음의 영역에서 확신과 지혜와 힘의 영역으로 데려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