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종교와 믿음이 가진 한계를 넘어서기

Going Beyond the Limits of Human Religion and Belief

1997년 2월 5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신의 메신저, 마샬 비안 서머즈에게
계시되다.

이 본문에 관하여


What you are reading in this text is the transcription of the original voice of the Angelic Assembly as it spoke through the Messenger Marshall Vian Summers.

Here, the original communication of God, which exists beyond words, is translated into human language and understanding by the Angelic Assembly who watch over the world. The Assembly then delivers God’s Message through the Messenger, whereafter it is transcribed and made available to you and to all people.

In this remarkable process, the Voice of Revelation is speaking anew. The Word and the Sound are in the world. May you be the recipient of this gift of Revelation and may you be open to receive its unique Message for you and for your life.




독자에게 알림
이 번역은 영어 원문 번역을 자원한 새 메시지 학생이 협회에 제공하였다. 우리는 사람들이 자신의 모국어로 새 메시지 일부와 만날 기회를 갖도록 이 같은 초기 형태로 이 번역물을 세상에 내놓는다.

세계 종교들은 풍부한 유산이 있으며, 지구 정부와 사회 등이 종교들을 조작했음에도 불구하고 큰 공동체 관점에서 보면, 그 종교들은 앎이 세상에 살아 있게 했다. 그 종교들은 매우 많은 사람에게 영성의 빛이 살아 있게 했다.

그렇지만 인류는 상대적으로 고립된 상태에서 진화했고, 큰 공동체에 있는 다른 형태의 지적 생명체와 어떤 식으로든 대규모로 접촉하는 도전을 받지도 못했고, 거기에서 이로움을 얻지도 못했으므로, 지구에 있는 종교들에는 어떤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인류의 고립을 고려해 보면, 이러한 한계는 이해할 수 있으며, 대부분 이러한 고립에서 나온 결과로 이해해야 한다.

앎의 학생에게는, 화해해야 하는 어떤 것들이 있다. 이것들은 세상 사람 대부분이 자라 온 문화와 종교에서 나온다. 이 문화와 종교는 인류의 열망도 보여주고, 인류의 인식과 이해가 가진 한계도 보여준다.

당신에게 엄격한 종교적 배경이 있든 없든 간에, 당신은 이 조건화에 영향을 받는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전반적으로 당신의 문화적 조건화 밑바닥에 흐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이 그 흐름을 알아차리든 못하든 간에, 그 흐름들은 당신 관점을 조건화한다.

우리는 이제 이것들을 다루어 보겠다. 그래서 세상에서 영적 부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세상 상황이 어떻게 변했는지, 이렇게 변한 상황이 지금 무엇을 요구하는지 당신이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겠다.

세상에는 믿음이라는 어떤 관습이 있으며, 이 관습은 세상 도처에 널리 퍼져 있다. 여러 나라를 아우르는 종교에도 있고, 부족 종교에도 있다. 이 종교들의 뿌리는 삶의 어려움을 헤쳐 나가려는 시도이고, 인간의 활동을 보호하고 인도할 수 있는 더 큰 힘, 신성한 힘에 대한 확신을 유지하려는 시도이다.

비록 종교가 문화나 정치 단체에 있는 다른 많은 것이 되었지만, 종교 수행의 본질은 영적 체험이 계속 살아 있게 하는 것이고, 사람들이 신성을 직접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것이며, 상위 의식을 세상에 가져오는 것이다. 상위 의식인 이 윤리는 시장이 강제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크고, 평범한 삶 자체가 사람들에게 고무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문제들도 있다. 이 문제들은 큰 공동체를 이해하거나, 큰 공동체 영성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큰 방해가 된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오늘날 종교 기관들은 큰 공동체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거나, 큰 공동체에 대비하여 사람들이 적절히 준비하는 데 필요한 것을 이해하는 데 대체로 방해가 된다.

여기에는 인류에 대한 사람들의 기본 이해, 자연이나 신과 인류가 맺은 관계에 대한 사람들의 기본 이해가 큰 공동체에 인류가 출현하고 있는 현실로 인해 심각하게 도전받을 것이라는 사실이 들어 있다. 여기서 사람들은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이상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이상은 대부분 우주적이지 않으며, 영적 삶에 필요한 것들은 이제 재평가되어야 한다. 그리고 삶의 범주와 삶의 의미가 의미 있게 되려면 큰 맥락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것이 세계 모든 종교에 매우 유익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종교는 성장하고 확장해야 한다. 만약 성장하고 확장하지 않는다면, 수축할 것이고, 근본적으로는 반발자가 되어, 지금 인류에게 일어나고 있는 큰 변화에 반대할 것이다. 이 큰 변화는 새 삶과 새로운 정신을 그들 종교에 불어넣을 것이고, 지금 인류에게 매우 절실히 필요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할 것이다.

현재 세상에 있는 종교 안에는 반드시 다루어야 할 어떤 이분법들이 있다. 우리는 이미 지금까지 이것에 관해 많은 부분을 언급했지만, 이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우선, 큰 공동체 맥락에서 천국과 지옥에 대한 전반적인 개념을 살펴보자. 간단히 말해서, 천국은 당신이 온 곳이자 당신이 되돌아갈 곳이지만, 현재 체험의 관점에서 보면, 천국은 앎에 대한 당신의 친밀함, 앎에 대한 당신의 충성, 앎과 당신의 일체감과 관련이 있다.

지옥은 당신이 자신의 참된 본성에 다가가지 못함을 나타내며, 이것은 당신을 심각한 불확실성과 의심, 불안과 고통이 있는 세상으로 몰아넣는다. 이것이 연옥이다. 연옥은 나쁜 행동에 대한 응보가 아니다. 연옥은 하늘이 당신을 원하지 않는 경우에 당신이 가는 곳이 아니다. 하늘은 항상 당신을 원한다.

연옥은 앎 없이 사는 것이고, 따로 떨어진 것이다. 연옥은 고립과 분리의 삶을 사는 것, 즉 당신 내면에 있는 앎과 분리되고, 당신이 삶에서 맺는 진정한 관계의 의미에서 동떨어진 삶을 사는 것이다.

큰 공동체에서는 전통적인 의미의 천국과 지옥이 없다. 당신이 이것에 대해 생각해보면, 이것이 이해되기 시작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 환경에서 선한 행동이라는 것은 다른 문명이나 다른 환경에서는 바뀌어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다른 종족들에게는 선한 행동에는 상을 주고 악한 행동에는 벌을 주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자신들만의 꾸며낸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가 당신과 무관하게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국과 지옥에 대한 인류의 묘사도 그들에게 무관하게 보일지 모른다. 여기에는 우주적인 것이 전혀 없다. 이것은 지역 관습, 지역 종교이고, 이 경우는 지구와 관련된 지역적인 것이다.

큰 공동체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 환상적인 창조 이야기도 없으며, 우주 삶에 임박한 종말도 없다. 하지만 배움에는 끝이 있다. 그리고 발현된 삶에도 끝이 있겠지만, 그것은 당신이 염려하지 않아도 될 만큼 아주 먼 미래의 일이다.

마찬가지로, 물질 현실 안에서 삶의 진화는 지구가 생성되기 훨씬 전에 일어난 일이다. 그러므로 시작은 매우 오래전이고, 끝은 매우 먼 미래에 있어서 이것들은 당신 삶에 있는 신성의 의미와 본질에 대한 이해로는 관련성을 규정할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종교 기관을 통해 이용되는 설득력과 진정한 종교 생활의 의미를 구별해야 한다. 정치적 편의성으로 뒤섞인 순응과 복종은 이곳에 있는 대다수 사람의 생각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는 많은 이상과 계율을 낳았다.

마치 큰 벌의 위협이 없고 사람들이 믿어야 하는 절대적인 것들이 없다면, 사람들은 정처 없이 방황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사람들이 스스로 부여할 진짜 동기가 없으므로, 그들은 지배를 받아야 하고, 그래서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이러한 것들이 고안된다.

그러나 앎의 학생은 이러한 이분법 너머를 보아야 하고 거기에 있는 진정한 진리를 알아야 한다. 선과 악의 이분법을 살펴보자. 이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에 관한 아주 대단히 급진적인 사상이 많은 사람에게 있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이상주의의 상당 부분은 아주 진지하게 고찰하고 묵상한 결과라기보다는 오히려 사회적 반응에 가깝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과거 교회의 지배 때문에, 악의 개념을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실제로 이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이것은 단순한 반응인가?

분명히 선을 위해 헌신하는 이들이 있고, 선을 거스르는 일에 전념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정반대의 극단을 보여준다. 다른 모든 이는 중간에 있으면서 이쪽이나 저쪽으로 흔들린다.

선한 세력이 있고 불화 세력이 있다. 당신은 그들을 선과 악이라고 부를지 모르지만, 그들은 본질적으로 이것보다 더 복잡하다. 선을 행할 수 있는 역량과 악을 행할 수 있는 역량은 개개인 안에 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한 개인의 삶에서 지배 세력이 되는가? 어떤 사람이든, 어느 한 세력이 다른 세력보다 훨씬 더 우세하거나, 조금이라도 우세하다.

큰 공동체의 맥락에서 그리고 큰 공동체 영성에서는,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앎의 본질로 돌아온다. 당신이 앎과 연결되면, 선을 행한다. 앎과 연결되지 않으면, 비록 당신이 선을 행하려는 성향이 있더라도 선을 거스르기가 쉽다.

삶에서 누구도 전적으로 선하거나, 전적으로 악하지 않다. 당신이 전적으로 선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당신의 인식과 판단 등에서 속거나 실수하는 기회가 항상 있기 때문이다. 물질 삶에서 모든 사람은 실수할 수 있다. 이것은 지구에서 사실인 것처럼 큰 공동체 전역에서도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누구도 전적으로 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개인에게서 앎을 말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신이 심어 놓은 것을 파괴할 수 없다. 앎을 부인할 수 있고, 방해할 수 있고, 전적으로 외면할 수는 있지만, 앎을 없앨 수는 없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아무리 해롭게 행동하더라도 그에 상관없이, 선을 행할 능력이 있고 잠재력이 있다. 여기서 당신은 성숙해져서 선한 것과 악한 것에 대한 유치한 관점에서 벗어나야 하고, 천사와 악마에 대한 유치한 관점에서 벗어나, 삶의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창조주는 당신이 세상에 오면, 세상은 어려움으로 가득 차 있고, 당신이 많은 실수를 저지를 것이며, 심지어 당신이 이곳에서 자신의 목적과 길을 찾는 데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분명히, 그것은 이해가 된다.

사실, 극소수의 사람만이 이곳에서 자신의 목적과 사명을 발견한다. 다른 모든 사람도 시도를 하지만, 어쩐지 성공하지 못한다. 이것은 세상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고, 그들이 큰 교육의 첫 단계를 밟으려면, 자신들의 참된 본성과 참된 기원, 참된 운명을 대체로 몰라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만약 당신이 고향과 그곳에 있는 당신의 관계들을 아주 잘 안다면, 당신은 세상에 들어오고 싶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들어오기가 너무 어려울 것이다. 고향에 가고 싶은 당신의 열망이 너무 커서, 이곳에서 제대로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이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 영적 가족과 함께 있을 때는, 세상이 그렇게 힘들어 보이지 않는다. 그곳에 있으면, 모든 것이 완전하다. 모든 것이 매우 완벽하고, [모든 이가] 당신을 아주 전적으로 이해한다. 당신이 세상에 오면, 그것은 모두 사라진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현실이다.

그러므로 창조주는 당신이 이곳에서 많은 실수를 저지를 것을 안다. 그래서 비난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자신의 참 자아를 찾고, 이곳에 온 자신의 목적과 사명을 찾는 것이다. 모든 주안점은 여기에 있다.

창조주는 당신에게 앎을 주어 이것을 할 수 있게 한다. 앎이 없다면, 당신은 세상에 압도당하고 꼼짝 못 하게 될 것이다. 당신에게는 진실을 발견하고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을 것이고, 진정한 양심도 없을 것이다. 앎이 없으면, 당신은 전적으로 사악해질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앎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앎은 그들 종교 교육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들은 믿고 순종하도록 배우며, 관념, 말, 책, 규범, 관습을 믿도록 배운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끔찍한 보복에 직면한다. 앎길의 가르침이 전무하며, 앎을 회복하는 방법도 없다. 이런 일이 원시 종족에게 있는 것은 이해할 만하지만, 현재 인류는 비록 행동의 상당 부분이 여전히 매우 원시적이긴 해도 원시 상태에서 벗어나고 있다.

사람들은 알아야 한다. 믿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믿음은 취약하고, 오류에 빠지기 쉬우며, 쉽게 설득되고 영향을 받는다. 믿음은 오늘날 세상에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인류에게는 더 나은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앎 그 자체가 필요하다.

그런데도 이것은 종교 사상에서 정말로 혁명이 될 것이다. 안정과 정체성을 얻기 위해 자신의 이념과 제도에 의존한 이들은 이런 생각으로 크게 위협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성의 타고난 선함을 믿지 않거나, 앎의 현실과 의미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 사후 세계에서 받는 보상과 벌, 선과 악에 대한 강조 등, 이 모든 것은 앎을 모르는 환경, 앎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환경에서 자행된다. 이러한 것은 앎을 따르는 이들이 앎이 제공하는 길을 여행하기 시작하는 데 매우 어려운 환경을 만든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환경뿐만 아니라 자기 내면에 있는 이 영향력들을 다루어야 한다.

일부 사람들은 종교 훈련을 너무나 완고하고, 너무 강력하게 받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 훈련은 정말 엄청난 무게이며, 그들을 짓누른다. 그들은 기존 관념에 충성하던 것을 자기 내면에 살아 있는 현실에 충성하는 것으로 바꾸려고 할 때 아주 많은 죄책감을 느낀다.

선과 악, 천국과 지옥의 이 이분법으로는, 새로운 체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게 된다. 본질적으로 새로운 체험 그 자체와는 실제로 무관한 일련의 믿음에 따라 상황을 판단한다.

예를 들어, 큰 공동체 세력들이 지구에 있다. 이것을 아는 사람들은 이런 선과 악의 개념을 투영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저들은 선한 이들인가? 악한 이들인가? 저들은 신인가? 사탄인가?”라고 말한다. 심지어 이런 말을 하지 않는 교육받은 사람들도 실제로 이처럼 느낄지도 모른다. 그들은 걱정한다. 이러한 미신들은 너무 뿌리 깊이 자리잡고 있어, 때로는 인지하거나 벗어나기가 매우 어려울 만큼 문화의 일부가 되고, 문화 정체성의 일부가 되어 있다.

앎이 없으면, 종교는 미신이 되고, 믿음이 되며, 믿음은 지배하고 영향을 주기가 쉽다. 앎이 없으면, 사람들은 온갖 것들을 믿을 수 있으며, 비록 그것들이 자신의 체험과 완전히 반대이더라도, 믿는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본질적으로 사악하므로 종교 이념을 엄격하게 고수하도록 복종해야 한다고 배울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그들 자신의 자연스러운 체험을 저버린다. 그들은 자신이 육체적으로 사악하고, 자기 몸이 사악하고, 육체적 체험이 사악하며, 어쨌든 살아있는 것이 큰 불행이고, 그 자체가 징벌의 한 형태라고 배울 수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삶 자체의 실제 체험과는 완전히 대조를 이루며, 사람들이 세상에 있는 것과 그 목적의 진정한 본질은 선을 행하도록 타고났으므로 완전히 모순이다.

창조주는 선을 행하도록 모든 사람을 이곳에 파견하였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먼저 세상을 경험해야 한다. 많은 사람에게, 이 세상 경험은 그들의 큰 기회와 더 큰 표현을 부인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영웅 숭배는 대체로 인간 종교에 내재한 또 다른 부분이다. 일부 종교에서는 다른 종교들보다 영웅 숭배가 더 강조된다. 사람들에게는 믿을 만한 위대한 인물, 인간의 오류를 드러낼 것 같지 않는 인물, 완벽한 상태에 있는, 그런 초인과 같은 존재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큰 공동체에서도 이러하겠는가? 큰 공동체에서 어떤 한 사람이 신에게 이르는 수단이 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마치 이곳에 방문한 종족이 당신에게 와서, “당신은 우리의 영웅을 완전히 믿고 따르고 복종하지 않는 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물론 그 영웅은 인간이 아닐 것이다.

이것이 사람들에게 더 큰 일을 하게 하고, 더 높은 수준의 지성과 의식을 고취하는 데 인간의 맥락 안에서는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큰 공동체 안에서는 그렇지 않다.

큰 공동체에는 초월적 존재들이 있을 수 없다. 오직 물질적 삶의 존재로, 앎으로 강하거나 약한 존재들만 있을 뿐이다. 이것 말고는 그들에게 사회 제도와 기술과 윤리의 발전이 있다.

그러나 결정적 요소는 그들이 앎으로 강한지 그렇지 않은지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구에서 본 바로는, 앎이 없는 선한 윤리는 나쁜 결과로 이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많은 것을 선한 의도로 시작하지만, 그 선한 의도는 긍정적인 방식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큰 공동체에서 영웅 숭배라는 개념은 중요한 가치를 지닐 수 없다. 예수는 지구에서 비록 여전히 크게 오해받고 있기는 하지만 위대하다. 그리고 큰 공동체 관점에서도 지구에서만큼 위대하기는 하지만, 그는 지역 영웅이다.

지적 생명체가 있는 모든 공동체에 위대한 교사들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예수와 같은 운명을 겪었다. 어떤 경우에는, 종교들이 그 교사들을 기반으로 세워졌지만, 그 교사의 참된 본질과 목적을 거의 반영하지 않았다.

지구의 많은 종교에는, 당신과 창조주 사이의 중재자로 어떤 다른 사람, 즉 어떤 신성한 사람, 종교 기관에서 큰 일을 맡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개념이 있다. 만약 이러한 기관들에 진정한 지혜가 있고, 그 기관들이 완전한 은총으로 다스려진다면, 이것이 가능하고 유익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이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은 큰 오해로 이어지고, 지위의 큰 남용과 오용으로 이어진다.

큰 공동체에서는, 국민들에게 훨씬 더 많은 책임이 있다. 이 책임에는 매우 발전된 형태의 자기 정직이 필요한데, 아직 지구에서는 크게 육성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앎길을 배우면,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나 애착하는 것, 자신을 위해 갈망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이 그들 내면에 있는 앎에서 오는 것으로 여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런 실수를 할 것이며,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고, 나머지는 상관하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앎으로 여기거나, 아니면 그것이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얻는 데 자신이 생각하기에 이점을 줄 어떤 것으로 여길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무엇이 문제인지 안다. 하지만 엄청난 오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인류에게 앎길의 가르침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류에게 미신과 종교 이념이 있고, 비전이 없기 때문이며, 또 인류의 운명과 미래를 형성하고 있는 더 큰 상황, 앎길로 깊이 들어가야 하는 큰 상황을 인류가 전혀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앎길은 세계 종교들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종교들에 진정한 가능성을 줄 것이고, 큰 공동체 삶의 맥락 안에서 그 종교들이 의미 있게 존속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앎의 학생에게 심각한 문제를 제기할 만큼 많은 영적 개념이 학생들 내면과 그들 관계들 안 모두에 아주 뿌리 깊이 박혀 있다. 인류 역사상 위대한 성인들은 항상 그들 시대의 주요 종교 밖에 서 있었다. 비록 그들이 그 종교들의 회복에 핵심 역할을 했고, 그들이 핵심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은 항상 그들 내면에 있는 큰 권한을 따랐다. 그 결과, 그들은 종종 그들이 봉사한 종교 권위자들에게 엄청난 고난과 박해를 받았다.

오늘날 세상에는 많은 미신이 널리 퍼져 있다. 그것들은 앎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신이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하고 인간의 복지에만 특별히 관심이 있다는 믿음은 미신이다. 나쁜 사람은 지옥에서 영원히 산다는 생각은 미신이다. 천국을 찾으려면 모두가 한 교사만 믿어야 한다는 생각은 미신이다. 하늘에서 오는 세력이나 별에서 오는 방문자들은 누구나 악마이거나 천사임이 틀림없다는 믿음은 미신이다.

비록 이 미신 중 일부는 믿을 수 없어 보이고, 당신은 “나는 이런 것들을 믿지 않아.”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당신은 그것들로 어느 정도 조건화되었음을 알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인간 사회에 매우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러한 견해를 절대 공개적으로 주장하지 않는 세련된 사람들도 개인적으로는 자기 내면에서 그것들을 느낄 수도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악해지거나, 사악한 세력의 손아귀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이 두려움은 그들에게 자신의 깊은 성향을 의심하게 할 것이다. 어떤 종교에 있는 고대 문헌에 근거를 두고서, 세상에서 선을 행하려는 사람들의 성향이 실제로는 나쁜 것이라는 것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설득될 수 있을까? 과거의 왕과 왕족들은 스스로 신권을 부여했으며, 충분히 많은 사람을 설득하여 그것을 믿게 했다.

여기에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인류를 유아기 상태로 유지하고, 무지하고 미신을 믿는 상태로 유지하게 하는 것 말고, 어떤 지배적인 종교 사상들은 인류를 큰 공동체에서 온 이들의 조종에 극도로 취약하게도 한다.

지난 반세기 동안 인류는 집중적으로 연구되었으며, 인간의 생리뿐만 아니라, 인간의 문화와 종교, 인간의 이념과 동기, 인간의 심리가 연구되었다.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놀랍도록 복잡하다고 생각하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다. 만약 당신이 외부에서 자신을 보고 관찰할 수 있다면, 당신은 자기 행동이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는 것을 알 것이고, 자신의 취약점을 알 것이다.

큰 공동체 준비에서 우리가 말했듯이, 인간의 정부와 종교 기관들은, 자기 목적을 위해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려는 이들의 주요 표적이 될 것이고, 둘 다 취약하다.

정부는 권력을 추구하고, 종교 기관도 권력을 추구한다. 그러나 종교 기관은 설득하는 것을 통해서나, 정신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통해서 권력을 얻는다. 정부는 다른 방식으로 권력을 얻지만, 그들 역시 영향력을 써야 한다. 그러므로 정치 기관과 종교 기관들은 인간의 행동, 인간의 가치관, 인간의 이상 및 인간의 우선순위에 영향을 미치는 일에 세상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곳이다.

놀라운 일이지만, 인간 종교의 조종은 아주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우리가 말했듯이, 큰 공동체 세력은 사람들 앞에 성인의 이미지가 나타나도록 투영할 수 있다. 비록 그것이 단순히 그들 마음속에 있는 투영이더라도, 사람들은 그것이 진짜라고 생각할 것이다. 만약 그들이 앎으로 강하지 않아 분별할 수 없다면, 그들은 자신이 보는 것을 믿을 것이다.

큰 공동체 세력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들은 이곳에 자신들이 있는 것을 사람들이 영적 회복이나 영적 문턱의 일부로 생각하게 하거나, 고대 예언을 성취하는 것, 그리스도 재림과 다름없는 것으로 생각하게 할 수 있다. 이러한 투사는 대다수의 사람을 자극해서 그들 자신의 본성과 앎에 반하여 행동하게 할 수 있다.

인류에게 자율권을 주고 인류를 향상하는 것이 진정한 임무인 바로 그 종교들이 도리어 인류의 큰 문제 중 하나가 되었다. 이것은 앎이 아직 인간 가족 내에서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앎이 강해질 가능성이 크며, 앎길을 배울 기회가 놀라울 정도이다. 특히 큰 공동체에 있는 다른 사회들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아는 것과 타고난 선함과 타고난 성향에 대해 훈련을 받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있는 앎이라는 큰 하사품을 요청하도록 배우지 않는다. 비록 복종하고 따르고 섬기는 것이 자신의 본성과 큰 본능을 저버리더라도, 그들은 그리하도록 배운다.

이 시점에서 당신은, “글쎄, 인류는 정말 나쁜 것 같군.”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이것은 큰 공동체 전역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고립된 상태에서 발전하는 모든 종족은 이 문제에 직면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신성과 창조에 대한 그들의 사상이 탁월하고 보편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치관이 모든 이와 모든 것에 틀림없이 들어맞을 것으로 믿는다.

우리가 이 메시지 첫머리에서 말했듯이, 이것은 대체로 고립되어 사는 데서 나온 결과이다. 다른 형태의 지성과 접촉하고, 또 지성을 지닌 다른 종족과 무역하고 상업하고 교류함으로써 이러한 극단적인 입장이 누그러지며, 사회가 지닌 많은 가치관과 가장 소중히 여기는 이상을 재고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또 다른 중요한 것을 재고하게 한다. 많은 사람은 창조주가 그들을 구해줄 것을 바라고, 어떤 이들은 구원해 줄 것을 열렬하게 믿는다. 삶에는 매우 진짜이고 매우 현실적인 어떤 취약점이 있다. 당신 조상들은 그들이 생존할 수 있도록 풍작을 기원했다. 사람들은 이제 그들이 기울인 노력에 좋은 성과가 나기를 기원하고, 그들이 한 결혼에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원하며, 그들의 건강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원한다. 그래서 그들은 신에게 간청한다.

인간이 이렇게 하는 것은 정상적이고 자연스럽지만, 세상에서 신의 본질과 활동을 이해하는 데 큰 문제가 생긴다. 큰 공동체의 도래는 이처럼 신의 보호와 개입을 기대하고 바라고 요구하도록 자극하겠지만, 그런 것은 없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우리를 지켜줄 신은 어디 있는가? 예수는 어디 있는가? 붓다는 어디 있는가? 지금 우리를 인도할 무함마드는 어디 있는가?”

많은 사람에게 이것은 영적 위기가 될 것이다. 신이 인간을 우월하게 여긴다는 전체 개념이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우주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와 삶에서 신의 활동의 본질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는 많은 사람에게 무리가 될 만큼 흔들리고 바뀔 것이다.

그럼으로써 큰 공동체 세력이 있는 것과 그 현실을 크게 부정할 것이다. 사람들은 이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심지어 이 현실과 여기에 함축된 의미를 생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현실은 그들 삶의 일부이고, 교육의 일부이며, 그들의 성장과 발전에 필요 조건이다. 그리고 한 행성에 있는 하나의 종족으로 발전하는 불가피한 결과이다. 왜냐하면 결국 모든 행성에 있는 모든 종족은 큰 맥락을 나타내는 큰 공동체와 반드시 접촉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경우에, 그들 자신의 소중한 이상과 믿음과 가정은 크게 도전받을 것이다. 우주를 직접 체험하지 않고 누가 삶에 우주적 접근을 할 수 있겠는가?

창조주는 모든 사람 내면에 있는 앎을 통해, 또 불가시 존재들의 활동을 통해 그들 삶에 적극적으로 관여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믿는 것과는 달리, 불가시 존재는 많지 않다. 사람들은 “음, 내 주위에는 항상 이 모든 천사가 있어!”라고 말하는 것으로 종종 자신에게 자신감을 준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불가시 존재는 저마다 수백 명의 개인을 지켜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지금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훨씬 더 많이 개인이 책임져야 하고, 개인의 내면에서 앎이 성장하고 진정한 자발성이 드러나야 하며, 이러한 것이 매우 중요하다.

기존 종교들이 무너지고 있다. 부족의 정체성과 문화가 더 큰 집단에 동화되고 있다. 전 세계 국가들이 경제적 상호의존과 환경 악화로 서로 융합되고 있다. 이제 세상에서 고립되기란 매우 어렵다. 그리고 지구의 고립은 큰 공동체에서 온 이들로 인해 이제 끝이 나고 있다.

지배적인 이러한 사상들은 인류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다주었지만, 그 사상들이 먼 과거에 지녔을 수 있는 어떤 유용성을 이제는 잃어버렸다. 인류는 정신적으로 더 강해져야 한다. 인류는 더 유능하고, 더 분별력 있고, 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선을 행하고 선한 세력이 되려는 동기는 이제 점점 더 개인들에게서 나와야 한다.

세상은 격동의 전환기에 있다. 세상은 단일 공동체가 되는 과정에 있다. 이는 세상이 단일 공동체가 되기를 사람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세상이 단일 공동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알지만, 심지어 이성적으로나 정서적으로도 그 생각을 용납할 수 없다.

삶은 당신이 다룰 준비가 된 것만을 당신에게 줄 것이라는 개념이 있다. 지금 많은 사람이 이렇게 생각한다. 이것은 이 시대의 신화 중 하나이다. 하지만 사실은, 삶은 당신이 준비되었든 안 되었든, 그것을 감당할 수 있든 없든, 그것에 동화될 수 있든 없든 간에 당신에게 주어야 할 것을 줄 것이다.

큰 것을 믿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당신은 지금보다 더 커져야 하고, 커질 수 있을 만큼 커져야 한다. 당신의 기관들이나 그 기관들의 이상을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당신은 신이 당신 내면에 심어 놓은 것을 찾아야 하고, 그것이 당신 내면에서 드러나도록 허용해야 한다. 오래전 세상에서 살았던 위대한 성인의 일을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당신은 지금 다른 것들이 필요한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광야에서 벗어나도록 인류를 인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큰 공동체에서 인류를 구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직 인간의 책임감, 인간의 능력, 인간의 협력을 기르는 것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들은 모두 앎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이것들은 모두 창조주가 개개인에게 준 타고난 책임감과 지혜와 역량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이것들이 지금 강조되어야 하는 것들이다.

세상은 큰 공동체에 출현하고 있다. 세상에는 큰 부름이 있다. 그것은 앎을 향한 부름이다. 그것은 새로운 시대, 어려운 시대, 위대한 시대의 시작이다. 우리가 여기서 설명하는 능력들을 인류가 기를 수 있어야만 인류는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인류에게 기회이고, 지금이 그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