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고 신의 새 메시지


영어로 된 계시의 원음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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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13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에게
계시되다

이 녹음에 관하여


당신이 이 오디오 녹음에서 듣는 것은 메신저 마샬 비안 서머즈를 통해 천사의 회중이 말한 음성이다.

여기에, 언어 차원을 넘는 신의 본래 메시지는 지구를 관장하는 천사의 회중에 의해 인간의 언어와 이해로 번역된다. 그리하여 회중은 메신저를 통해 신의 메시지를 전한다.

이 놀라운 과정에서, 계시의 음성이 다시 말하고 있다. 말씀과 음성이 세상에 있다. 역사상 최초로 녹음된 계시의 원음을 당신과 세상이 체험해볼 수 있다.

당신이 이 계시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고, 당신과 당신 삶을 위해 계시의 유일한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데 마음을 여는 사람이 되기를 빈다.



독자에게 알림

이 번역은 영어 원문 번역을 자원한 새 메시지 학생이 협회에 제공하였다. 우리는 사람들이 자신의 모국어로 새 메시지 일부와 만날 기회를 갖도록 이 같은 초기 형태로 이 번역물을 세상에 내놓는다.

신의 새 메시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려면, 신이 아주 오랫동안 세상에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보내왔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메시지들은 인류 문명이 출현하고 나서야 시작될 수 있었다. 그 전에는 세상에 보내는 메시지를 받아들이기에는 인류가 너무 원시적이고 고립되고 분리되고 흩어져 있었다.

불행히도, 종교는 인간의 채택과 침해로, 부당한 역할을 하게 되고, 잘못 이해되었으며, 변질되었다. 그래서 종교와 사람들의 관계는 왜곡되고 모호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은 이 큰 메시지들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왜 전해졌는지, 언제 전해졌는지, 또 메신저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고,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 알 수 있도록, 해명이 있어야 하고, 필요하면, 바로잡는 일도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류가 변화의 큰 물결에 직면해 있으므로, 절실히 필요한 시기, 세상에 불확실성과 격변이 점점 더 커지는 시기에, 신이 다시 말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역사상 과거 어느 때와도 다른 시대이다. 이것은 한 집단이나 한 부족, 한 국가의 운명만이 아니며, 온 인류의 운명이다.

신은 지금, 문맹에서 벗어난 세상, 국제통신이 가능하고, 지구적 관점이 중요해진 세상에 말하고 있다. 신이 말하고 있는 이 시기는, 인류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사건, 사실 어떤 세계의 역사에서도 가장 큰 사건인 우주 생명체와 접촉하는 문턱에 서 있으며, 또 이전에는 겪어보지 못한 규모로 환경과 사회와 경제의 큰 변화, 격변에 직면하고 있다.

신의 이전 큰 계시들 가운데 그 어떤 것도 이런 것들에 인류를 준비시킬 수 없다. 그래서 신이 다시 말해야 하며, 다시 말했다. 한 국가나 부족, 한 지역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 말했으며, 이전에 인류에게 전해진 그 어떤 것보다 범위가 더 넓고, 더 상세하고, 더 포괄적으로 말했다.

당신은 계시의 시대에 살고 있다. 메신저가 세상에 있다. 무함마드 시절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다.

이러한 것들을 이해하려면, 당신은 신의 새 계시와 세상에 있는 메신저가 이런 큰 가르침들과 예언자들, 메신저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아야 한다.

신의 계시를 이해하려면, 당신은 신의 이전 계시들을 이해해야 한다. 인간의 이해와 타협, 인간의 무지와 와전으로 그 계시들이 어떤 역할을 했고, 어떻게 밝혀졌고 묘사되었는지가 아니라, 정말 무엇을 의미했는지, 왜 전해지게 되었는지, 왜 신의 새 계시와 조화를 이루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의 메신저들은 모두 천사의 회중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이 아니지만, 평범한 사람도 아니다.

전에는 이것이 한 번도 사실적으로 묘사되지 않았다. 그래서 신의 계시 안에서 조화로움을 볼 수 있도록, 전해져야 하는 교정과 해명이 많다. 왜냐하면 이 계시들은 모두 신에게서 왔으며, 모두 사람들과 문화에 의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큰 불화와 갈등을 낳고, 종교전쟁을 일으키고, 종교적 근본주의를 낳으면서, 그 계시들이 서로 경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지금 종교는 그 계시들이 원래 의도한 대로 단합과 동정심, 목적을 불러오기보다는 그저 인간 가족을 갈라놓고 분열하는 또 다른 요인만 된다.

예수는 용서와 연민의 의미를 가르치고, 새 메시지에서 앎이라 부르는 성령에 관한 계시의 의미를 가르치기 위해, 천사의 회중에서 파견되었다.

예수의 모든 큰 선언은 그를 통해서 말하는 성령이다. 왜냐하면 앎의 힘과 현존을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신에 다가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이 각자의 내면에 심어 놓은 앎과 신의 앎, 그리고 이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고 어떤 관계인지, 이것은 비록 역사를 통틀어 예지력이 있는 이들이 깨달은 것이지만, 세상에 새로운 이해이다.

예수의 사역은 결코 완성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는 그가 사는 문화에 의해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사라졌으며, 한참 지난 후에 구전으로만 증언이 전달됐다. 그래서 그의 삶은 이제 알아보기 어렵게 되었으며, 그는 역사적 사실보다는 전설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이 땅을 걸었으며, 용서와 연민을 가르쳤다. 그리고 앎의 힘, 즉 성령을 시범하였다. 그 앎의 힘은 지금 인류의 진로를 바꾸고 변화시키기 위해, 개개인을 통해 말하고 있으며, 문화와 역사의 갈림길에서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메시지가 그의 문화, 그의 국가와 부족을 넘어 사람들에게 전파되고 이용될 수 있게 하였다. 그래서 이 메시지는 인류 문명을 여는 근본적인 윤리적۰도덕적۰영적 초석이 되었다.

신은 단지 현재만이 아니라 미래도 생각하고, 단지 현재 존재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다가오는 시대의 사람들의 안녕도 생각한다. 그래서 계시는, 고려된 적조차 없는 질문에 답해야 하며, 인류의 진화에서 다음의 큰 단계에 인류를 준비시켜야 한다.

물론, 예수의 메시지는 매우 신비스러웠다. 그는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에 의해 억압받는, 무지하고 문맹인 사람들에게 말했으며, 큰 불화와 혼란과 불행의 시대에 말했다. 그의 민족을 억압하는 바로 그 세력에 그런 교사를 잃었으니, 신과 거리를 좁혀주는 다리 역할을 그가 했다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이 필요했다. 마치 신이 이전에 인류에게 화가 난 것 같은, 사실과는 다른 이야기, 또 단순히 상징적인 이야기일 뿐인 에덴동산까지 거슬러 올라가 저지른 잘못을 갚기 위해 그의 삶이 박탈당했다는 이야기를 지어내야 했다.

그래서 예수가 신격화되었다. 왜냐하면 메신저로서는 그가 민족을 움직이고, 그를 기반으로 한 종교를 세우기에 부적절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 내면에 있는 앎의 힘과 현존에 대한 개념이 없는 사람들에게 해석의 문제들이 처음에 시작되었다. 그들은 종교를 그들의 목적, 즉 사회 질서를 만들고, 획일적인 이해와 믿음을 만들고, 이 사상의 지배하에 사람들을 묶어 놓으려고 종교에 부당한 역할을 맡기었다. 그래서 이 메신저를 통해 말하는 성령의 신비는 약간을 제외하고는 사라지게 되었다.

그의 삶의 큰 기적은 앎의 시현이었으며, 그러한 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앎을 가르쳤다. 그들은 그들의 환경과 가난, 억압의 노예였으며, 신들과 환상으로 가득 찬 세상, 언제나 그들을 압박하는 자연의 무자비함에 길을 잃었다.

그러나 신은 격동의 순간에도 훗날 이해할 수 있도록 씨앗을 심어야 한다. 신은 비록 극소수만이 처음에 큰 가르침을 받아들이거나 이해할 수 있더라도, 그 가르침을 주어야 한다. 혼란스럽고 타락한 세상에 순수한 계시를 가져오는 어려움이 바로 그것이다.

신의 새 계시가 전해지고 있는 지금도, 사람들은 새 계시를 자신의 현재 믿음과 선호에 들어맞게 이용하려 하고, 자신의 분노와 두려움, 타인에 대한 판단을 표출하는 데 이용하려고 하므로, 같은 문제가 존재하며, 똑같이 부패한 환경이다. 하지만 소수를 제외하고는 이 시대 사람들이 거의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큰 메시지는 전달되어야 한다.

예수는 신의 새 메신저와 함께 서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같은 그룹에서 오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류 문명을 더 발전시키고, 세상에서 앎을 더 키우고, 개개인에게 진정한 자유와 권한을 더 함양하기 위해 온다.

왜냐하면 모두가 세상의 현재와 미래 상황에 공헌하기 위해 세상에 파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공헌을 찾으려면, 자신의 깊은 본성과 결합해야 한다. 이 깊은 본성이 앎이며, 예수를 움직이고, 지구에서 그의 큰 사명으로 인도한 성령이다.

예수는 그의 가르침을 기록에 남길 만큼, 또 지구에 그가 온 의미를 받아쓰게 하여 기록할 만큼, 오래 살지 못했다. 그를 따르는 이들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그가 온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만큼 충분히 강하지 않았다. 그리고 후에 종교와 기독교를 대표하는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알지 못했다.

이제 신은 아주 많은 반복을 하면서 심도 있는 계시를 주었다. 이 계시는 길과 목적을 확고히 하고, 이해를 확립하고, 자신과 타인과 세상을 보는 법, 내면에 있는 앎과 조화롭게 생각하는 법을 구축한다. 그래서 세상 마음과 앎의 깊은 마음이 당신 내면에서 공명하고 결합하여, 당신 안에서 분리를 종식하고, 당신이 세상에 봉사하는 데 큰 공헌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게 한다.

만약 당신이 이런 식으로 기독교를 이해할 수 있다면, 당신에게 기독교는 완벽하게 의미 있는 것이 될 것이며, 당신은 기독교의 순수한 메시지와 목적이 오랜 세월 동안 기독교 이름으로 행해진 모든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 것이다.

사람들은 전쟁을 하기 위해 종교를 이용하고,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기 위해 종교를 이용한다. 그들은 종교에 관한 그들의 사상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고 나서, 그들의 믿음으로 주변 모든 사람을 억압한다. 그런데 그 믿음은 종종 지구에서 신의 목적과 사명이 갖는 현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들은 자신의 이념이 진실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단지 이념일 뿐이다. 그들은 앎길을 모른다. 그들은 개개인을 움직이는 힘과 현존을 모르며, 그들 내면에 사는 힘과 현존을 발견하여 알아보고 충실히 따를 수 있다면, 이 힘과 현존을 통해 신이 모든 이를 복원할 것임을 알지 못한다.

예수는 문맹의 세상에 말했다. 이것이 그 시기, 그곳에서 그의 공헌이었으며, 이것은 그 시기, 그곳에 매우 적합했다. 왜냐하면 그가 진정으로 대변한 신비와 힘은 여러 문화권의 특정 개개인들과 공명했으며, 큰 교회나 기관과 같은 주류체제보다도, 그들이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을 보존했고, 예수가 지구에 온 것과 그의 사명이 갖는 의미를 그들이 보존했기 때문이다.

예수가 신(a god)이라면, 당신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서는 안 된다. 당신은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신(God) 대신 그에게 호소하는 실수를 저지르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실수는 오랫동안 관습이 되어 왔고,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예수와 자연스러운 친밀감을 느끼는 것도 필요하고, 예수와 공명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예수는 회중의 일원이며, 그는 세상에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예수의 일은 큰 공동체라 불리는 삶의 더 큰 파노라마, 인류의 큰 공동체 출현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이곳에 온 모든 위대한 메신저들이 그리하듯이, 지금 이 메신저와 함께 서 있다.

자신의 사상이 대단히 도전받는 것은 사람들에게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사상에 아주 많은 것을 투자했다. 이러한 것들을 재고해야 한다는 것은 진정한 용기와 진실성이 필요하다. 당신들 중에 누가 이런 용기와 진실성을 가졌는가? 이런 용기와 진실성이 없다면, 신의 새 메시지와 신의 메신저를 거부하고 비웃고, 저항하고 박해할 것이다. 똑같은 이유로, 신의 위대한 이전 메신저들을 오만과 무지와 어리석음으로 거부하고 부정하였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오늘날 매우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한다.

신이 이 세상에서 하는 일은 인간의 이해 범주를 넘어선다. 그러나 당신 삶에서 신의 현존의 힘이 명백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그것을 완전히 다른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당신은 신의 현존이 정말 무엇인지, 정말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당신을 통해, 당신과 다른 사람들의 삶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신의 현존을 믿거나, 아니면 거부할 것이다.

예수의 생애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가 큰 힘에 완전히 휩싸인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는 완전히 꾸며낸 것이다. 그의 기적도 대부분 꾸며낸 것이다. 그것은 그 삶과는 무관하게 만들어진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세상 권력을 원하고, 예수가 아니라 바라바를 원하며, 그들의 땅을 지배하고 그들의 삶을 지배할 신격화된 왕을 원한다. 사람들은 적들을 이겨내고 다른 나라를 지배할 만큼 강력한 힘을 원한다.

신은 한 개인을 통해 완벽하게 완전히 표현된다고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결코 그럴 수는 없다. 우주의 신, 수십억, 수백억,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종족의 신은 한 사람으로 육화될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신은 단지 자신의 더 큰 형태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며, 이는 역사를 통틀어 사람들이 범해 온 오류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하는 신, 또 이곳 지구상에서 사람들을 억압하는 문제들로 둘러싸이지 않은 신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라. 우주 전역에 있는 개인들이나 국가들이 같은 실수를 저지른다. 이것은 분리 속에서 사는 데서 생기는 문제이다. 그러나 신은 분리의 문제에 답을 주었다. 왜냐하면 앎은 각각의 사람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은 단순히 당신을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 내면에 살면서, 당신이 응답하기를 기다리고, 당신을 곤경에서 벗어나게 하며, 당신 삶을 인도하려 한다. 그래서 당신이 큰 목적을 위해 이곳에 왔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하는 성숙기에 이를 수 있게 한다. 그 목적은 당신이 스스로 만들어내거나, 당신의 나라나 국가가 당신을 위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신을 알려면, 당신은 신이 당신 내면에 심어놓은 힘과 현존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당신이 기독교인이든, 무슬림이든, 유대교인이든, 또 어떤 나라 사람이든, 어떤 믿음을 가졌든, 이 힘과 현존이 당신 복원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당신에게 믿음이 없어도, 마찬가지이다.

신의 계획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다. 그저 선택된 소수나 신봉자들, 모범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신의 계획은 때가 되고 시간이 흐르면 모두를 구원하는 것이다.

종교에 대한 당신의 이해, 즉 당신이 배운 것이나 어쩌면 당신에게 강요된 것에 비추어, 이러한 것들을 생각해 보라. 지옥의 모든 위협이나 천벌은 인간의 창조물이다.

당신의 지옥과 천벌은 앎의 힘과 현존 없이 사는 것이며, 수많은 세력에 위협받고, 수많은 것들에 억압받고, 자신의 선호와 두려움, 다른 사람들의 선호와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로, 당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혼란의 삶, 노예 같은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금 이 순간, 분리 상태에서 살면서, 당신이 사는 지옥이고 천벌이다.

그러나 신은 예수를 통해서, 무함마드를 통해서, 또 붓다를 통해서,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요소를 제공했다.

당신이 예수에게 진실하다면, 당신은 예수가 정말 누구였는지, 어디에서 왔고, 진정으로 무엇을 가르쳤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무함마드의 진정한 학생이 되려면, 당신은 그를 메신저로서 이해해야 하고, 그가 실제로 무엇을 가르쳤는지, 어디서 왔는지, 또 무엇을 대변했는지를 그에 관해 남겨진 기록이 거의 없는 것에서 분별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것은 붓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지구나 다른 어떤 세계의 위대한 교사나 메신저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지구에서 신이 하는 일은 물질계 삶인 우주 전체에서 신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듣고 분노를 느낀다. 그들은 이것을 부정할 것이고, 이 말에 맞서 싸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믿음은 두려움과 불확실성을 숨기는 것이며, 그들은 두려움과 불확실성에 직면하기보다는 차라리 그들의 믿음을 가지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마도 자신의 종교적 견해나 심지어 종교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에 너무 많이 투자하여, 이러한 것들을 다시 생각해보고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너무 지나치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신은 당신이 어떤 종교를 믿든 상관하지 않는다. 신은 무엇이 당신 가슴을 움직이고, 당신이 무엇을 하고, 무엇이 그렇게 하도록 당신을 자극하는지에 관심을 기울인다. 신은 당신의 관계에서 당신이 표현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인다. 신은 당신이 내면에 있는 큰 힘과 얼마나 연결되고 결합될 수 있는지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 힘은 신이 당신 내면에 심어놓았으므로, 당신을 진정으로 복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이것은 큰 힘이지만, 이것을 받아들이려면, 깊이 내어주고 넘겨주고 책임지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당신 자신과 다른 사람들, 그리고 전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에 변화가 필요하다. 여기에는 용서와 동정심이 필요하고, 왜 사람들이 실수하는지, 무엇이 그들의 타락에서 그들을 회복하는지에 대해 매우 명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예수는 위대한 메신저 중 한 사람이다. 당신은 그의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당신은 그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고, 따를 수 있는가? 그를 신으로 만들지 말라. 예수를 통해서만 신에게 다가갈 수 있고, 그 큰 문턱을 넘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왜냐하면 예수는 앎의 힘을 위한 매개체였고, 바로 그 앎이 당신을 회복하게 하고 갱생하게 하고 복원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당신보다 더 위대하고, 이 세상을 거쳐 간 거의 모든 이보다도 더 위대했지만, 그에게 이 능력과 장엄함, 이 세상에서 지속되는 이 영향을 준 것은 바로 그의 내면에 있는 앎의 힘이었다.

종교적 사고가 있고, 그런 다음, 진정한 결합이 있다. 이 둘은 매우 다르며, 다른 결과와 다른 가르침, 다른 이해로 이끈다.

이것은 이 세상에 온 신의 새 계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신의 새 계시에는 대대적인 선전도 없고, 대단한 신(deity)도 없고, 환상적인 창조 신화도 없으며, 모두가 오고 있다고 말하지만 결코 올 것 같지 않은, 최후의 심판의 날에 정점에 달하는 인간의 마지막 체험도 없다.

그래서 지금 당신은 순수한 가르침, 즉 변질되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고, 바뀌지 않은 가르침을 받고 있다. 당신은 전에는 결코 가능하지 않은, 계시의 음성까지도 들을 수 있다. 그 음성은 예수와 붓다, 무함마드에게 말한 것과 같은 음성이다. 당신은 역사상 처음으로 이 음성을 들을 수 있다.

당신은 계시의 시대에 살고 있다. 지금은 역사상 가장 대단한 시대이고, 당신은 여기에 있다. 하지만 당신은 들을 수 있는가? 볼 수 있는가? 응답할 수 있는가? 아니면 당신 마음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가?

당신은 가시 면류관 같은 자신의 믿음에 둘러싸여 있는가? 당신의 가슴은 닫혔는가? 당신은 당신 삶을 자신의 생각이나 훈계, 고정 관념에 기반을 두는가? 아니면 당신 마음은 이런 것들에서 자유로워, 당신이 그 순간의 경이로움 그리고 신의 힘과 현존,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의 움직임을 체험할 수 있는가?

이것이 당신의 도전이다. 왜냐하면 신은 이 계시로 큰 도전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 계시는 단순히 위로와 위안이 되거나, 따뜻하게 안아 주기 위해서만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이 계시는 어떤 신앙을 가졌든, 누구에게나, 복원의 수단과 길을 제공하려고 이곳에 왔다. 그래서 당신이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 불교에 신의 새 계시를 가져갈 수 있게 하였다.

여기서 경쟁은 오직 생각의 수준에서만 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신이 하는 일의 통합은 새 계시를 통해 계속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해하면, 당신은 자신을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즉, 당신의 강점과 약점, 성공과 실패를 이해하고, 인간 가족에게 큰 전환점인 이 시기에 지구에 온 큰 기회를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것이 당신에게 이해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