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얻기


1989년 2월 24일에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에게
계시되다

이 본문에 관하여


What you are reading in this text is the transcription of the original voice of the Angelic Assembly as it spoke through the Messenger Marshall Vian Summers.

Here, the original communication of God, which exists beyond words, is translated into human language and understanding by the Angelic Assembly who watch over the world. The Assembly then delivers God’s Message through the Messenger, whereafter it is transcribed and made available to you and to all people.

In this remarkable process, the Voice of Revelation is speaking anew. The Word and the Sound are in the world. May you be the recipient of this gift of Revelation and may you be open to receive its unique Message for you and for your life.


Wisdom from the Greater community, volume 1
제5편 > 큰공동체 지혜 1 > 제35장

평화는 당신의 타고난 마음을 온전히 누리는 것이며, 세상에 당신이 온 기회를 완전히 활용하는 것이다. 이 체험의 가장 핵심에는 고요가 있다. 세상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행동력이 이 고요에서 나온다. 그래서 평화는 가장 중심에서는 완전히 고요하고, 외부에서는 매우 강력히 행동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체험을 하는 이들은 내면에서는 매우 고요하면서도, 세상에서는 매우 유능하게 일할 수 있다. 사실, 그들 마음은 집중되어 있으므로,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효능을 보이며 일할 수 있다.

마음을 모으고, 이 정도로 집중하려면, 당신은 고요해야 한다. 왜냐하면 고요할 때 당신은 집중하고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고요는 자연스럽게 세상으로 발산되고, 인간이 하는 모든 일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고요의 영향력이 쌓인 덕분에 지구가 여러 차례 살아남게 되었다. 이런 종류의 집중에 참여하는 소수 사람이 호전적인 세력들과 내부 갈등에서 지구를 지킬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러한 집중은 확실히 점점 더 많이 필요할 것이다.

평화를 얻는 것을 세상의 정치적·경제적 관점에서 생각하지 말라. 현시점에서 그것은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당신은 지금 내적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평화로운 곳이 아니므로 세상에서 평화를 얻기는 어렵다. 세상은 활동과 성장이 있는 곳이고, 마찰과 경쟁, 실망, 성취가 있는 곳이나, 조용하고 고요한 곳은 분명 아니다.

극소수 사람에게만 있는, 자신의 행동을 인도하는 자신의 중심부에 평화가 만약 당신에게 없다면, 당신은 자신의 표면에서 살면서 동적인 세상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세상이 평화롭기를 바라는 것은 사람들이 현재와 다른 마음 상태에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은 성취하기 어렵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 평정심을 얻을 필요는 없다. 극소수만이 이 평정심을 얻지만, 이 극소수는 반드시 얻어야 한다. 그들에게는 평정심이 필수이며, 그들의 성취는 다른 사람들과 공명할 것이고, 이 평정심의 힘을 계속 살아 있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매우 중요한 요점을 말해 보겠다. 우리가 여기서 말한 목표를 이루려면, 당신에게 익숙한 마음이 아닌 다른 마음이 있어야 한다. 당신에게는 이미 이 다른 마음이 있다. 그것은 당신이 고향에서 가져온 마음이다. 지금 당신의 생각하는 마음은 당신이 여기에 온 이래로 당신이 창조한 마음이다. 우리는 이것을 “개인 마음” 또는 “개인적 측면”이라고 한다. 이 마음은 나쁜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활동하려면 당신에게 개인 마음이 필요하다. 이 마음이 없으면, 아무도 당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당신 또한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개인 마음은 당신의 타고난 마음이 아니다. 개인 마음은 당신의 한 부분인, 신의 큰 마음을 섬기도록 되어 있다. 개인 마음에게 평화와 힘과 화합을 이루도록 요구하는 것은 잔인하다. 그것은 당신의 몸에 고통을 느끼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개인 마음은 갈등 속에서 태어났고 갈등 속에 살며 오직 큰 마음을 섬길 때만 평화를 얻을 것이다.

신의 큰 마음은 개인 마음이 아니다. 당신은 이 큰 마음의 한 부분이다. 당신은 이 개념에 익숙할지 모르지만, 개인 마음만으로는 평화를 얻을 수 없다는 점을 우리는 강조해야 한다. 이것은 중요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인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개인 마음은 평화를 얻을 수 없으므로 개인 마음이 당신의 중심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개인 마음은 오직 섬길 수만 있다.

우리가 이 말을 할 때 놀라지 말라. 왜냐하면 당신은 개인 마음이 본연의 당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개인 마음은 단지, 어린 시절 이래, 심지어 태어난 이래로, 당신이 세상에서 개별적인 한 인간으로 활동할 수 있게 매개체로서 조직되고 발달했다. 당신은 처음부터 인간으로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이 마음을 창조해야 했다. 사실은 당신이 마음을 정말 창조한 것은 아니다. 당신은 단지 이 마음을 조직하는 데 쓸 수 있는 구성 요소를 이용했을 뿐이다. 개인 마음을 효과적으로 조직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제구실을 아주 잘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모두 개인 마음이 있다. 축하한다. 하지만 당신 내면에서나 세상에서 평화를 얻는 것은 개인 마음이 아니다.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 말해보겠다. 개인 마음은 고요할 수 없다. 만약 고요가 평화의 가장 중심에 있고 평화를 낳는다면, 평화는 개인 마음에서 나올 수 없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자신의 개인 마음을 벌하고, 노예 상태로 몰아가고, 신처럼 만들려고 하면서 고상하게 하고, 개인 마음에 고상한 원칙과 이상을 주며 복종하도록 그 마음을 고문한다. 그들은 이렇게 하면서 거의 성공하지 못한다. 앎길에서 개인 마음이 고양될 수 있고 고양되겠지만, 신과 같은 상태에 도달할 수는 없다. 개인 마음을 신으로 만들지 말라. 그 마음은 일시적인 매개체이고, 당신이 세상에서 공헌하는 것을 허용하기로 되어 있다.

앎은 당신 내면에 있는 신의 큰 마음이다. 앎이 재발견될 때까지는 개인 마음이 당신을 지배할 것이고, 당신은 개인 마음이 참된 봉사를 찾을 수 있을 때까지 개인 마음을 섬길 것이다. 당신 몸 또한 당신 내면에 있는 이 큰 마음을 섬기도록 만들어졌다. 큰 마음이 없다면, 몸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당신의 유일한 희망은 당신이 죽을 때까지 몸을 편안하게 유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세상을 떠나 영적 가족에게 돌아가면, “어디 보자. 나는 아직 일을 끝내지 못한 것 같아. 내가 언제 돌아갈 수 있을까?”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들은 “글쎄, 당신은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해!”라고 말한다.

이루지 못한 채 저승으로 돌아간 이들은 모두 되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당신이 저승에 있는 영적 가족에게 돌아가면, 여기서 해야 하는 것이 아주 명백하다. 당신의 기억이 완전히 되살아난다. 그 전망점에서 보면, 당신이 해야 하는 것이 매우 분명하다. 하지만 당신이 세상으로 돌아와서, 세상의 전망점에서 보면, 그다지 명확하지 않다.

이 가르침의 목적은 당신이 여기 오기 전에 지닌 전망점을 당신에게 제공하는 것이며, 그 전망점은 모든 것을 매우 명확하게 해준다. 여기에 오지 않으면, 당신은 개인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타고난 마음인 앎의 마음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여기 있는 동안, 타고난 마음인 앎을 되찾는 방법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당신이 여기 있지 않으면 세상에 그다지 잘 공헌할 수 없다. 당신은 여기 있는 동안 공헌해야 한다. 당신이 여기에 오지 않으면 우리가 하는 것처럼 옆에서 응원할 수 있지만, 당신이 게임에 참여하면, 당신은 더 직접적으로 참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신에게 의지하며, 당신은 이것을 위해 내면에 있는 앎에 의존해야 한다. 만약 당신이 타고난 마음인 앎에 다가갈 수 없다면 앎에 다가갈 수 있는 누군가와 함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은 매우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당신이 평범한 기술이라도 배우고 싶다면 그 기술이 있는 사람과 함께 일해야 한다. 이것은 매우 명백하지만, 많은 사람이 그리하지 않는다는 것을 당신도 안다.

이제 타고난 마음인 앎을 이야기해보겠다. 앎은 개인 마음과는 매우 다르다. 당신은 처음에 앎을 텅 빈 것으로 경험할 것이다. 마치 말이 거의 없지만 많은 것이 이해되는 큰 절에 들어가는 것처럼 오싹하게 여겨질 것이다. 여기에 익숙하지 않다면, “아, 여기는 좀 이상하다!” 이것이 당신의 첫 경험이다. 모든 것이 매우 조용하다. 소음이나 분주한 것이 많지 않다. 고요는 매우 강력하므로 처음에는 매우 위협적일 수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평화를 텅 빈 것으로 경험한다. 왜냐하면 평화로운 상태에서는 당신에게 익숙한 매우 많은 것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화로운 상태가 처음에는 불편해 보일 수 있으며, 심지어 조금 무서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계속 준비하다 보면, 당신은 텅 빔이 ‘무’가 아님을 알 것이다. 텅 빔은 그 무엇이고, 그야말로 고요하다.

사람들이 평화에 가까이 다가갈 때, 처음에는 종종 자신이 갈등에 짓눌려 있음을 느낀다. 만약 당신이 매우 조용한 곳에 들어가서 그곳에 머무른다면, 가장 먼저 경험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압박감과 긴장감이 아닌가? 당신의 현재 마음 상태와 당신이 처한 환경 사이의 차이는 당신 자신의 중압감이 드러날 정도로 매우 클 것이다. 그래서 당신이 처음에는 더 많은 고통을 느끼므로 그곳에 가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면, 당신은 다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신선함과 편안함과 확신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세상은 계속 세상으로 있는다. 세상을 당신 고향처럼 만들려고 하지 말라. 이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다. 그렇게는 결코 되지 않는다. 세상은 항상 정신없는 곳이다. 하지만 세상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재발견하는 환경,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한 곳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은 완벽하게 고요하고 조용한 곳은 되지 않는다. 어쨌든 사람들은 처음에 신나는 것을 해보려고 세상에 왔다. 하지만 신나는 것은 오래가지 않는다. 이 부분은 다른 이야기이니, 지금은 논외로 하자.

그러므로 당신은 우리가 앎이라고 부르는 당신의 타고난 마음을 재발견해야 한다. 앎은 스스로 생각한다. 하지만 앎은 매우 조용하므로, 앎이 생각할 때마다, 그 생각은 매우 강력하다. 앎이 당신을 행동으로 이끌 때마다, 당신의 행동은 매우 강력하다. 앎이 생각하지 않거나 당신을 행동으로 이끌지 않을 때는 앎이 매우 조용하다. 이것을 더 많이 경험할수록, 당신은 앎이 자기 자신인 동시에 자신보다 더 큰 것임을 더 깊이 깨닫는다. 앎과 관계를 더 깊이 맺을수록, 당신은 이제 조용해지는 데 더 자유롭다는 것을 깨닫는다. 당신이 앎과 함께 생각할 때, 당신 생각은 강력하며, 앎과 함께 행동할 때 당신 행동은 방향성이 있고 강력하다는 것을 당신은 깨닫는다.

앎의 현실에 다가가려면, 당신의 개인 마음이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아마 어떤 것들은 포기하고, 다른 어떤 것들은 습득해야 할 것이다. 당신의 몸은 변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 몸은 이제 큰 힘의 매개체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앎의 학생들에게 체력을 관리하도록 격려하는데, 이는 단지 더 멋있어 보이거나 좀 더 오래 살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 큰 힘의 현존을 지니게 하려는 것이다.

당신이 내적으로 고요할 때, 당신의 고요는 당신이 세상에 하는 공헌이다. 고요한 마음은 다른 어떤 성취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세상에 미친다. 이것은 신비롭지만, 그래도 사실이다. 고요한 개인 마음이란 있을 수 없다. 부디, 우리가 한 이 말을 잊지 말라. 그것은 혈관에 흐르는 피를 멈추게 하려는 것과 같다. 개인 마음은 계속해서 매우 수다스러울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지는 점은 당신이 개인 마음과 함께하는 것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평화를 얻기가 왜 그렇게 어려운가? 물론, 어려운 일이다. 이론적으로는 당신이 평화말고 다른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다면, 평화를 얻기가 쉬울 것이다. 하지만 누가 이런 위치에 있는가? 평화말고 다른 것은 원하지 않는다면, 평화는 아주 쉽게 당신에게 다가올 것이다. 사실, 당신은 이미 평화로울 것이다. 하지만 누가 다른 어떤 것도 원하지 않고 평화만 원하겠는가?

앎은 당신을 인도하고, 당신 삶을 단순하게 하고, 당신에게 조용히 있을 자유를 주고, 당신이 개인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누가 수다쟁이와 항상 함께 있고 싶겠는가? 누가 작은 생각들에 항상 지배받고 싶겠는가? 그것은 텔레비전 재방송을 하루 24시간 꼼짝하지 않고 보는 것과 같다.

앎을 더 많이 체험할수록, 당신은 상실과 생존에 대한 걱정이 점점 더 줄어들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해야 할 일을 안내받을 것으로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수동적으로 이끄는 것이 전혀 아니며, 매우 높은 참여와 매우 큰 책임감, 즉 두려움에서 나오지 않는 책임감을 느끼도록 이끈다. 몸은 귀중한 매개체이므로 당신은 몸을 돌볼 것이며, 같은 이유로 마음도 돌볼 것이다. 당신은 일상의 일이 중요하므로 그 일들을 돌볼 것이며, 관계들이 필요하므로 그 관계들을 소중히 여길 것이다.

이것은 수동적 상태가 아니며, 하루 종일 꿈나라에서 빈둥거리며 세월을 보내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앎이 당신을 세상에서 행동하도록 재촉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해변에 누워 있으려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당신은 고향에 가면 해변에 누워 있는다. 물론 실제로는 해변이 없지만, 어쨌든 당신은 거기에 누워 있을 수 있다. 만약 누군가 해변을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 만들어 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당신은 우리가 말하는 이 모든 것을 어떻게 하는가? 사람들은 종종 그들 문제에 대한 답을 원한다. 그들은, “나는 나에게 일어나는 일을 알아내야 하고,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을 알아내야 하니까 이것을 읽고 있다. 나는 여러 교사를 만났고 학회에도 참석했으며, 여러 책을 읽었고, 이 모든 사상과 각종 방안이 있다.”라고 말한다.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은 그 해결 방법을 따르는 것이다. 답은 무의미하며, 더 많은 의문만 낳는다. 예를 들어, 당신들이 정글 한가운데서 길을 잃어 자신들의 위치를 알아내려고 애쓰는데, 누가 마침내 알아냈다고 상상해보라. “우리는 여기, 바로 이 나라의 정글 한가운데에 있다.” 그러면 모두 “아, 정말 안심이다! 적어도 우리는 우리 위치를 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당신들은 여전히 가장 가까운 소도시에서 천 킬로나 떨어져 있다. 그래서 1킬로를 걷고 나면, “우리 위치가 어디야?”라고 또 묻는다. 그러면, “우리는 바로 이 나라의 정글 한가운데에 있다.”라며 누가 위치를 알아낸다. 그러면 모두 “아, 정말 안심이다! 적어도 우리는 우리 위치를 안다.”라고 말한다. 이제 당신들은 목적지에서 999킬로 떨어져 있다.

그러므로 당신 목적을 이룰 수단이 있어야 하지만, 개인 마음으로는 이 수단을 알아낼 수 없다. 만약 개인 마음이 당신 마음의 5퍼센트를 차지한다면, 나머지 95퍼센트는 무엇인가? 담고 있는 그릇 무게인가? 돌이 든 자루인가? 빈 컴퓨터 디스크인가? 아니다. 이것은 단지 준비의 5퍼센트만이 마음의 5퍼센트의 몫임을 의미한다. 준비의 95퍼센트는 마음의 나머지 95퍼센트의 몫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도 당신이 준비의 5퍼센트만을 안다는 뜻이다. 그래서 앎의 학생들은 종종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잘 모른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들은 더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장 많이 쓰는 개인 마음은, 그들이 아직까지는 완전히 인식하지 못하지만 타고난 마음인 앎에 더 크게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 말해 보겠다. 당신이 사는 당신 개인 마음은 당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매우 큰 어떤 것에 영향을 점점 더 많이 받는다. 이 말에 당신은 누가 당신 삶을 실제로 책임지는지에 대해 걱정스러울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당신 삶에 이전보다 더 큰 목적과 의미와 방향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어쨌든 진짜 일은 대부분 당신이 통제할 수 없는 다른 수준에서 일어나고 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참여 여부를 결정하는 것뿐이며, 참여하려면 많은 의지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당신은 자결권을 가져야 하며, 이는 그 상황에서 수동적이 되는 어떤 기대도 할 수 없게 한다. 그것은 참 재미있는 현상이다. 평화를 얻는 것은 가장 적극적인 참여이고, 정글 밖으로 나가는 길을 찾는 것이다.

당신은 어쩌면 이렇게 자문할지도 모른다. “내가 이것에 준비되었는가? 먼저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사업에서 성공하거나, 예술에서 훌륭한 지위를 얻거나, 내 목표를 모두 달성하는 것부터 하는 것이 나을지도 몰라. 그런 다음 나이를 먹고, 이 모든 것이 다 충족되면, 그때 그러한 일에 내 마음을 돌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말한다면 어찌 되는가? “당신은 사다리 중간에 있을 때, 앎의 성장과 영적 삶으로 부름 받으며, 사다리 중간 지점에 다다랐을 때, 당신의 영적 삶이 시작될 것이다.” 그런 다음 당신은 나중에야 사다리가 양방향으로 무한히 확장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중간 지점으로 간다는 것을 잊지 말라.

그러므로 당신이 어디에 있든 그곳은 중간 지점이다. 그래서 당신이 노인일 때, 세상에 만족하든 신물이 났든, 당신은 중간 지점에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임종할 때 중간 지점에 도달하지만, 그때는 많은 것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중간 지점은 바로 지금이다. “글쎄, 이 일부터 먼저 해야 하는데.”라는 것은 없다. 그때가 언제든 당신이 시작하는 때가 중간 지점이다.

정글에서 벗어나는 길은 준비를 따르는 것이다. 그 준비는 당신 스스로 만든 것이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당신이 만든 준비는 당신을 현재 있는 곳에 머물게 할 뿐이기 때문이다. 당신 내면에 있는 큰 것이 그 준비를 하게 해야 한다. 당신 내면에 있는 큰 것이 당신을 그 준비와 결합하게 해야 한다. 당신이 앞으로 나아갈 때 세상 안팎에서 모두 다른 이들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당신의 영적 진보는 이승의 참여도 필요하고, 저승의 참여도 필요하다.

당신에게는 당신 내면에서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앎이 있다. 이 앎이 없으면 어디에서도 확실성을 얻을 희망이 없다. 왜냐하면 확실하게 보이는 것은 모두 매우 나약한 힘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당신의 정부는 쉽게 무너진다. 당신의 경제는 쉽게 무너진다. 당신의 몸은 쉽게 망가진다. 당신의 사고 체계는 쉽게 무너지며, 당신의 관계는 쉽게 깨진다. 앎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이 쉽게 무너진다. 앎은 저승에서 왔지만, 당신 내면에 있고, 당신은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저승에서 온 것이 여기에 있다.

앎을 찾아 따르려면, 여기에는 길러야 할 것이 몇 가지 있다. 먼저, 당신은 내적으로 더 고요해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렇게 하면 타고난 마음에 다가갈 수 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의 상황을 정직하게 이해하기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그 상황들이 적절하게 정리될 수 있고, 많은 문제가 해결되어 당신의 내면으로는 물론 삶 안으로 더 깊이 뚫고 들어가는 자유를 얻을 수 있다. 당신의 환경에 대한 이해력은 당신의 내적 삶에 대한 이해력과 정비례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타고난 마음인 앎과 더 가까워지고 그 앎에 더 깊이 연결될수록, 세상에서 당신 삶과 당신의 관계는 더 의미 있고, 더 깊이 인식되고, 더 진실해진다.

당신에게는 관계를 맺기 위한 다른 기반도 있어야 한다. 이 중 어떤 것은 단순히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지만, 당신은 분별력을 키워야 한다. 당신이 앎을 의식할 수 있다면, 또 앎이 가리키는 것들을 따르고, 당신을 지배할지도 모르는 다른 충동들과 그것들을 구분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앎은 자연스럽게 당신에게 분별력을 키워줄 것이다.

앎은 다른 모든 충동에서 당신을 자유롭게 한다. 자유로워진다는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당신이 해야 하는 것을 당신에게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은 매우 제한적이고 불충분한 자유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듣고 싶어 하며, 듣지 못할 때는 무력감과 불쾌감을 느낀다.

그러므로 자유의 목적은 당신 자신의 자유를 찾아 세상에 표현하는 것이다. 이때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것이 실제로 의미가 있다. 만약 사람들이 재미있게 즐기는 세상에 당신이 나가서 그들의 개인 마음 너머에서 들리는 그들 말에 귀 기울인다면, 당신은 “내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을 달라! 무엇을 해야 할지 나에게 알려 줘!”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것이다. 이것은 세상이 매우 큰 소리로 외치는 말이다. 그들은 해변에 누워서, “나에게 할 일을 줘! 여기 이 몸 안에서 내가 죽어가고 있어. 정말 죽겠어. 나에게 할 일을 달라.”라고 말하고 있다. 만약 당신이 개인 마음 너머에서 들리는 말에 귀 기울인다면, 사람들이 행동하거나 선언하는 것들과는 매우 대조적인 이 말들을 들을 것이다. 이것을 통해 당신은 사람들을 완전히 다르게 경험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깊이 동정심도 느낄 것이다. 당신은 이것에 관한 이론을 알지 않아도 되며, 그저 귀 기울이고 응답하기만 하면 된다.

그것은 당신이 배워야 하는 또 다른 것으로,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법이다. 배워야 할 것이 매우 많고 각각의 길에는 다양한 단계가 있다. 앎길을 배우고 따르면, 누구나 자신의 모든 복잡한 문제와 맞서게 되고, 결국 그 복잡한 문제들은 모두 풀리게 된다.

사람들은 종종 자유를 선택권이 있는 것과 동일시한다. 그들은 “나는 이 길로도 갈 수 있고 저 길로도 갈 수 있으며, 그것이 나의 자유를 나타낸다. 사실 나는 백 가지 길로 갈 수 있다. 그것이 내 자유를 나타낸다. 이번 주말에 나는 백 군데를 갈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두 군데만 갈 수 있는 사람보다 더 자유롭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 자유로운 사람은 한 곳만 갈 수 있으며, 나머지 아흔아홉 군데는 갈 수 없다. 그들은 정말로 가야 할 한 곳에 가는 데 자유롭다. 그러므로 확실성 없이 끊임없이 결정해야 하는 부담을 지지 않는다. 당신이 모든 것을 끊임없이 결정해야 한다면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는 행복이 없다. 하지만 다른 길이 있다.

매 순간 무언가를 해야 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므로, 선택권이 하나만 있는 곳에서는 나머지 시간에 편하게 쉴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가 되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지이다. 그러므로 자유를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이제는 모든 것을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당신의 타고난 마음에서 보면 매우 분명하다. 당신의 타고난 마음인 앎은 관계를 다르게 여기며, 자유, 자기표현, 성공 등 모든 것을 다르게 여긴다. 앎은 완전히 다른 인식이다.

헌신은 앎의 관계에서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관계이다. 당신이 인내하고 분별한다면 함께 있어야 할 적절한 사람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데 그 적절한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더 도전적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함께할 큰 목적 말고도, 여전히 씨름해야 할 개인 마음이 있고 삶과 관련된 온갖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관계는 온전하다.

당신이 세상에서 가치 있는 일을 하려면 당신 삶은 단순해야 하고 개인적 불행과 갈등으로 당신 삶을 소모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공헌하는 데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면 당신의 활력이 당신에게서 자유롭게 나올 수 있고, 당신은 제대로 일할 것이다. 그때 당신은 더 큰 일에 참여할 수 있다. 이렇게 할 때 당신은 체험을 통해, 당신의 기원, 당신을 돕기 위해 당신과 함께 있는 큰 힘, 당신의 관계들이 지닌 가치를 확인한다.

당신이 삶에서 해야 할 일은 다음 단계를 이해하고 그것을 완전하게 하는 것뿐이다. 간단하다!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지금 당장 모든 단계를 밟거나 훨씬 더 아래 단계들을 하고 싶어 한다. 당신이 앞에 놓인 단계를 할 때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으며, 당신은 이런 식으로 나아간다. 배우는 데 장애가 없다면, 당신은 이렇게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 쉽게 배울 수 있으며, 목적지로 가는 곧은 길을 따라갈 것이다. 이 단계들은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을 포기하고 꼭 필요한 것을 깨닫는 것을 수반한다. 당신은 필요한 것을 할 때, 자신을 필요한 존재로 느끼며, 필요하지 않은 일을 할 때, 자신을 필요하지 않은 존재로 느낀다. 왜냐하면 당신은 항상 자신이 하는 일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상이다. 심지어 앎도 앎이 하는 것과 동일시된다.

우리는 여기서 당신에게 그림의 일부만 알려준다. 당신의 이해는 분명 항상 불완전할 것이다. 당신이 완전히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당신은 배우는 것을 멈춘다. 어떤 새로운 것도 들어올 수 없는 완전한 우주론으로 의기양양하지 말라. “이제 내 이론은 빠지는 것 없이 다 포함한다.”라고 말하지 말라. 앎을 따르는 사람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예수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그는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그래서 그는 아마도 자신의 개인적인 면을 매우 우려했을 것이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랬을 것이다. 당신은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도 된다. 단지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는지만 알면 된다. 그것이 자유이다. 신이 우주를 지배하게 하라! 당신이 신과 친구라면, 삶은 신과 함께할 때 훨씬 더 낫다.

여기서 당신은 단순한 진실일수록 파악하기가 더 어렵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매우 복잡한 진실은 주의해야 할 것이 많지 않아 생각하기가 쉬울 수 있다. 매우 단순한 진실은 깊이 파고들어야 하며, 이해하려면 더 깊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여기에 단순한 진실이 있다. 삶에서 있을 수 있는 곳은 두 군데가 있다. 당신은 생각과 함께 있거나, 아니면 앎과 함께 있다. 왜 이렇게 두 군데뿐인가? 앎과 함께 있지 않다면, 당신은 생각말고는 달리 있을 곳이 없으므로 생각과 함께 있어야 한다. 개인 마음과 함께 있는 것은 매우 피곤하다. 개인 마음과 함께 있는 것은 온종일 두 살짜리 아이의 말을 듣거나, 수준이 높다면 네 살짜리 아이의 말을 듣는 것과 같다. 그래서 좀 있으면 당신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싶을 것이다. 특히 성숙의 표시인, 자신을 관찰하는 법을 배웠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당신은 개인 마음이 벌이는 끊임없는 마찰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싶을 것이다. 그것은 좋은 신호이며, 당신이 머물 더 중요한 곳이 있다는 점을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서로 그렇게 다르지 않지만, 그들이 사물에 내리는 평가는 크게 다르다. 당신이 개인 마음으로 바라볼 때, 개인 마음은 서로 매우 달라 보인다. 그래서 때때로 개인 마음을 내려놓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당신은 자신의 개체성을 포기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의 진짜 독특함은 이 삶에서 당신이 하는 표현이다. 그것은 다른 모든 것에서 당신을 분리하지 않으므로 매우 즐거운 개체성이다.

여기서 당신 믿음은 모두 재평가되어야 하며, 이 재평가는 당신이 앎과 관계를 맺을 때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앎은 사람들이 염려하는 것의 90퍼센트는 신경 쓰지 않는다. 처음에는 이것이 모욕처럼 보인다. 당신은 “음, 나에게 중요한 것들이 분명히 앎에는 중요하지 않아!”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것이 매우 모욕적으로 보이지만, 얼마 후 당신은, “지금 앎이 가만히 있으면, 나 역시 가만히 있어도 될 것이다. 앎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앎이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나도 지금 당장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때 진정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진정한 휴식의 가치는 가치 있는 행동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휴식은 항상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한 준비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휴식을 일종의 회복으로 보지, 준비로 보지 않는다.

처음에는 평화를 종종 텅 빈 것으로 경험한다고 우리는 말했다. 그리고 텅 빔은 무가 아니라고도 말했다. 텅 빔은 어떤 것이며, 현존이다. 그래서 당신은 텅 빈 느낌에서 매우 충만한 느낌으로 바뀐다. 당신이 텅 빈 것의 바깥에 서 있으면, 그것은 텅 빈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당신이 별들을 바라보고 그 별들 사이의 공간을 생각하는 것처럼 매우 고요하고 매우 크기 때문이다. 상상할 수 있다면, 두 별 사이의 공간이 실제로 생명으로 가득 차 있고, 그 별들 자체는 그 사이에 존재하는 것에 비하면 생명이 없는 물체라고 상상해 보라. 이 비유를 사용하면, 당신은 당신 내면에 있는 공간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활기차고 지적인 공간임을 이해할 수 있지만, 밖에서 보면 그것은 너무 고요하고 너무 커서 텅 빈 것처럼 보인다.

고요에 다가가려면 당신은 고요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큰 것들은 고요하지만, 모든 사람이 시속 200킬로로 질주하므로 그것들을 거의 경험하지 못한다. 만약 삶이 시속 10킬로로 가는데 당신이 시속 200킬로로 간다면, 당신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더 빨리 가는 자신의 속도만 경험할 뿐 당신 주변에 있는 것의 일부는 전혀 느끼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경험한 바로는 진실이 제공될 때마다 교정 수단도 함께 제공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 진실이 전체 그림이므로 빈틈없이 완전하다는 생각을 사람들이 하지 않는다. 모든 심각한 잘못은 완전하다고 여기는 진실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진실의 목적은 당신을 더 멀리 인도하는 것이지, 당신의 탐구를 끝내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당신이 매우 중요한 것을 발견하면, 그것은 당신이 물어야 할 완전히 새로운 질문들을 내놓는다.

고요를 준비하는 데는 분명히 당신의 외적 삶을 재조정하는 일이 수반되고 마음을 집중하기 위한 마음의 성장이 수반된다. 여기서 당신은 고요에 익숙해지는 법을 배우고 나서, 고요 속으로 뚫고 들어가 그 보상을 받을 수 있다. 가치 있는 모든 것은 고요에서 나온다. 고요의 중심은 완전히 고요하다. 그곳에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지만, 모든 움직임은 그곳에서 나온다.

물질 우주는 어디에서 생성되었는가? 고요에서 생성되었다. 물질 우주는 어디로 가는가? 고요로 되돌아간다. 고요는 죽은 상태가 아니라, 단지 움직임이 없는 삶이다. 여기서 당신은 그것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당신은 활동하기 위해 이곳에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움직임이 없는 삶을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움직임이 없는 삶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황홀한 상태이다. 고요를 준비하려면, 당신은 어떤 명상을 해야 하며, 당신에게 교사가 있어야 하고, 방법이 있어야 하고,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 이것들이 필요한 것들이다.